녹색 광선, ☘️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당신께 ☘️

☘️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당신께 ☘️
에릭 로메르, 녹색 광선

그런 생각, 해 보신 적 있나요?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자기 길을 찾아간 것 같고,
내 꿈만 너무 멀리 있는 것 같고,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위해 딱히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요.
그런 당신과 이번 여름,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 광선〉을 함께 보고 싶어요.

델핀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인간입니다. 여름 휴가는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어딜 가고 싶은지 물어도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친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델핀은 어김없이 휴가 장소를 정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런저런 제안을 하는 친구에게 이도 저도 싫다고 말하자, 친구는 원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델핀을 비난합니다. 적당히 거짓말을 둘러대자 친구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묻고, 이에 델핀은 자신이 우연히 자주 마주치고 있는 녹색에 대한 작은 미신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길거리에서 델핀이 발견한 녹색 물건들

그러나 이 녹색에 대한 미신도 델핀을 확고하게 붙들어 주고 있지는 못한 듯합니다. 대화가 이어지던 중 잠시 자리를 뜬 델핀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때 델핀을 위로하러 온 친구 프랑수아즈가 찾아와 함께 자신의 집이 있는 쉘부르로 갈 것을 제안합니다.

 

델핀은 프랑수아즈를 따라 가지만, 쉘부르는 여름 휴가의 종착지가 되지 못합니다. 보통의 휴가에 익숙하고 만족하는 휴가지의 사람들은 조금 다른 델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처음 보는 델핀을 파악하려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다짜고짜 그의 신념을 좌지우지하고자 합니다. 활동적인 일 없이 산책만 해도 좋다는 델핀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델핀에게 끝없는 질문 공세를 펼치거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불편한 자리에서 휴가를 잘 보낼 수 있을 리가 없고, 결국 황급히 휴가지를 떠나고 맙니다.

 

이후로도 델핀은 여러 휴양지를 전전하는데요, 우연히 마주친 친구가 빌려준 비아리의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던 델핀은 길을 가던 중 녹색 광선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녹색 광선은 쥘 베른의 동명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찾아가는 것으로, 해가 지는 순간 해 위에 나타나는 녹색의 선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녹색 광선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옆에 있는 타인의 마음을 읽었다고 하죠. 델핀은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습니다.

 

녹색 광선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비아리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에 실망한 델핀은 급히 파리로 올라오는데, 모든 짐을 챙겨 기차역에 앉아 있는 순간 한 남자를 마주칩니다. 영화 내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던 델핀은 이 다정한 낯선 이를 쫓아 돌연 생장드뤼로 향합니다. 이어지는 카페 장면에서 그에게 남자에 대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는 델핀은 영화 내내 보여준 것과는 달리 프레임 안의 다른 요소들과 편안하게 어우러집니다.

 

카페에서 나와 그와 산책을 하던 델핀은 우연히 ‘녹색 광선’이라는 이름의 상점을 발견합니다. 그 우연을 신기해하다가 황급히 녹색 광선을 구경하러 달려가지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지금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던 델핀은 결국 녹색 광선을 발견하고야 맙니다.

이 녹색 광선은 델핀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델핀은 정말 참을성 있게 기다렸기 때문에 녹색 광선을 발견한 걸까요? 휴양지에서 만난 낯선 남자는 이번에는 좀 다른 사람일까요?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사람들의 말처럼 쥘 베른 소설의 주인공은 녹색 광선은 보지 못했어도 함께 그것을 찾아 떠난 옆 사람의 마음을 읽었다고 하는데, 정작 녹색 광선을 발견한 델핀은 옆에 있는 사람의 반응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그에게 녹색 광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정확히 알려주지 않죠. 옆 사람을 향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로 녹색 광선이 지나간 자리만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입니다.

함께 녹색 광선을 본 것만으로 지금 델핀의 옆에 있고 그녀와 남은 휴가를 보내길 바라는 이 남자가 진짜 델핀이 찾던 낭만적인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 다정하지만, 어찌 보면 델핀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 빼고는 앞에서 델핀에게 호감을 표한 이들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죠. 그렇지만 델핀은 모든 걸 알려주기라도 할 것처럼 녹색 광선에 자신의 운을 점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녹색 광선을 발견한 바로 이 순간, 델핀은 남은 휴가를 그와 함께 완벽하게 보낼 힘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델핀이 바라던 것은 ‘완벽한’ 누군가가 아닌, 그저 옆에 있는 그 사람이 델핀이 찾던 누군가일 거라는 확신과 용기를 줄 녹색 광선이었을지도 모르죠.

 

다시 돌아와서, 제가 왜 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영화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델핀이 녹색 광선을 발견했을 때, 그 사건이 제게 힘을 준 것은 희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는 즐거운 사실만 빼고 델핀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였으니까요. 델핀이 녹색 광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믿음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관계, 의미 없는 대화들, 우울한 파티 등을 거부하는 델핀에게 사람들은 자꾸만 조급하게 무언가를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델핀에게는 휴가에서든, 관계에서든 자신이 믿는 구석이 있었고, 델핀은 그것을 얻기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려왔죠. 휴가가 실망감만을 안겨줄 때는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했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 델핀은 처음 만난 사람을 믿어보는 모험을 택하고, 그런 델핀에게 영화는 마법 같은 녹색 광선을 선사했습니다. 결국, 녹색 광선은 델핀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한 발짝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찾아온 것이죠.

 

어쩌면 델핀의 녹색에 대한 미신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불확실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의 경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늘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길을 찾은 듯한데 내 미래만 아직 이렇게 불투명한 것 같고, 새로운 도전을 해 보고 싶지만 그럴 경우 안정적인 생활이 주는 만족감은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저를 망설이게 하죠. 그런 불확실한 마음 상태로 이것저것 해 보기는 하지만, 맞게 가고 있는지도 잘 모를 때가 많아요.

 

그래서인지 갈팡질팡하는 델핀을 보며 제 모습이 많이 겹쳐 보였습니다. 갈림길에 선 마지막 순간 믿는 구석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 봤다는 것, 그랬을 때 녹색 광선이 찾아왔다는 것. 어쩌면 불확실성의 한가운데 놓인 저도, 또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이제 이 편지를 읽는 당신께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녹색 광선을 발견하셨나요? 어쩌면 델핀과 달리 녹색 광선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네요.

210805_녹색 광선을 발견했다고 믿고 싶은 성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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