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75, 👵 '미래를 지키기 위해, 플랜75' 👴

하야카와 치에, 〈플랜 75〉

“인간은 태어날 때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 죽는 때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어떻게 죽을지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75세 이상이면 누구든 무료입니다. 이용자 개개인에게 맞는 심도 깊은 지원. 우선은 부담 없이 상담해보세요. 당신의 마지막을 도와드립니다. ‘플랜 75’

👵 ‘미래를 지키기 위해, 플랜75’ 👴

하야카와 치에, 〈플랜 75〉

뒤집힌 휠체어, 피가 뚝뚝 흐르는 총을 든 남자. 살아있는 생명체는 남자밖에 없다는 듯이 조용한 주위. 화면과 대조적인 클래식 음악. 남자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일본인은 국가를 위해 죽는 걸 민족의 긍지로 여겨왔다. 나의 이 용기있는 행동을 계기로 진솔하게 논의하고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카미카제 특공대가 떠오르기도 하는 말에 국가는 근본적인 해결을 논하기보다는 조종간을 현대의 노인들에게 넘기기를 택했다. ‘플랜 75’, 국가 재정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안락사와 상장례를 지원하는 국가 사업이 탄생했다. 준비 지원 자금 10만 엔은 어떤 것에도 사용할 수 있고, 죽고 싶지 않아지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마치 노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이 제도는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혹을 제거함으로써 유토피아로 향한다는 달콤한 꿈에 빠져있는 젊은이들 역시 디스토피아로 견인한다.

영화는 78세 여성인 미치, 플랜 75를 담당하는 공무원 히로무와 상담원 요코, 필리핀 이주노동자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각각의 인물에게 해당 제도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느린 흐름으로 따라간다. 우리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와 건조한 연출은 마치 영화가 공상을 그리는 것이 아닌,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게 한다.

미치가 국가와 사회에 의해 ‘스스로’라는 말로 포장된 죽음으로 내몰리는 과정은 가상의 일본 사회에서 자행되는 조용한 대량 학살의 단면을 보여준다. 호텔에서 일하던 미치를 비롯한 고령의 여성들은 “노인들이 일하는 게 불쌍하다”는 투서에 의해 내쫓겼다. 설상가상으로 살고 있는 주택에는 철거 안내문이 붙었다. 미치가 집을 빌리려고 해도,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돈을 빌리고자 해도 도움을 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소중히 살아왔던 일 년 일 년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 길을 건너려는 미치를 가로막는 건널목의 차단봉은 그의 상황을 나타내는 장치가 된다.

그런 그가 일과 여가를 함께하며 나름대로 의지하던 친구가 식탁에 앉아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것을 목격했을 때,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아왔던 것들이 무너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자신을 죽이려는 ‘플랜 75’밖에 없는데 그 누가 그 선택을 스스로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직접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노인들이지만, 그 과정 속에 있는 청년들 역시 멀쩡할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노인들에게 제도를 안내하는 히로무와 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노인의 모습, 다시 맞장구치는 히로무. 죽음, 자살을 논하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은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다른 청년 요코의 역할은 죽음을 선택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죽음을 준비하며 난생 처음으로 해본 것들도 자랑하고. 노인들의 들뜬 목소리 뒤로 피어오르는 불편한 감정을 애써 무시해본다.

아무리 시스템이 무뎌지게 만들지라도 제도를 안내하는 히로무도, 마지막을 도와준다는 요코도 결국 학살에 동참하는 인물들이라는데는 변함이 없다. 미치와의 마지막 통화 뒤 어디론가 계속해서 전화를 거는 요코의 모습이나, 삼촌을 데려다주고 결국에 다시 돌려버린 히로무의 핸들은 죄책감의 발현이자 저버릴 수 없는 인륜이다. 우울감에 빠져있는 요코의 뒤로 들리는 신입 상담원들을 교육하는 목소리는 사회가 이들에게 떠넘겨버린 것이 실질적인 버튼을 누르는 사형집행자의 역할이 아닐까 고민해보게 된다.

“노인분들은 외롭거든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죠. 그런 분들께 다가가서 얘기를 들어드리는 게 여러분의 일이에요. 실제로 도중에 그만두려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렇게 되지 않게 잘 유도하셔야 해요. 인간이라면 무서워지는 게 당연하죠. 좋아서 죽으려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그런 다음에 고객님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지 않고 편히 떠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주세요. 그게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요코는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응시한다. 인물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은 이게 처음이 아니다. 영화 초반 호텔에서 일을 하던 미치에 의해 제4의 벽 뒤의 관객들은 이미 의식됐다. 그 후 별다를 것 없이 다시 관음적인 위치로 돌아간 관객들은 요코에 의해 다시 한번 호명된다. 그렇게 상상의 세계를 관음하던 관객은 영화 속 현실에 침묵하는 적극적인 방관자로 탈바꿈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이 절망적인 세계를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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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쓰고 두려움에 떨며 옆자리 노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미치는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해가 뜨고 있는 건지, 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이 저 너머에 걸린 태양을 바라보며 노래한다. 오늘의 해는 지지만 내일 또 만나자. 비록 영화에서 미치는 당장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그 말이 곧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에서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감독 하야카와 치에는 팬데믹 상황에서 죽음에 관해 너무 절망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감독의 전작인 옴니버스 영화 〈10년〉 속 〈플랜 75〉와 세계관을 같이 하는 사회는 보다 절망적이다. 치매 노인은 본인의 동의 없이 플랜에 참여할 수 있고, 죽음을 앞둔 노인은 체육관에 어설프게 쳐진 커튼 아래 두려움에 떨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만약 이 세계를 그대로 둔다면 미치가 다음에 맞이할 미래는 이쪽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아주 조그마한 희망을 남겨놓고 막을 내린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스스로’ 중단을 선택한 미치, 방관에서 벗어나 개입하기 시작한 요코와 히로무, 히로무가 삼촌의 시체를 거두는 것을 도와줬던 마리아. 균열과 변화는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우리의 몫이다. 이런 절망의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보라는 감독의 물음과 함께 말이다.

영화가 그리는 것은 일본 사회지만 바다 건너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리 멀지 않다. 저출생, 초고령사회.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논의되지 못하는 사회. 가끔은 정답을 알면서도 피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피상적인 해결책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뿌리를 뽑지 않는 이상 잡초는 계속해서 자란다. 나와는 먼 일이라 생각해 침묵해도 결국에는 나를 겨냥한다.

영화의 중반부, TV에서 플랜 75가 성공적으로 국가 재정 확충에 기여했으며, 이에 정부는 대상 연령을 65세 이하로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이미 와버린 100세 시대에 65세는 노년이라 부를 수도 없다. 어느덧 나도 부모님도 나이를 먹으면서 65세는 멀지 않은 나이가 됐다. 처음에는 75세, 그 다음엔 65세,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55세, 45세, 35세, 25세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나와는 멀다고 생각했어도, 언제 나의 목을 조여올지 모른다.

일본, 미래, 공상이 한국, 현재,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 78세 키쿠타니 미치가 23세 신유안이 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40801_유안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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