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경 단편선〉
2011년 〈오늘의 개털〉로 데뷔 후, 13년 동안 다양한 장르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이태경 배우는 자신의 강점을 살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지우는 데에 탁월하다. 그가 선택한 수많은 영화 중 〈경주의 진실〉, 〈오늘의 자리〉, 〈신기록〉, 〈해미를 찾아서〉, 〈새로운 마음〉을 모아 ‘이태경 단편선’을 꾸려 보고자 한다.
표정이 인상적인 배우다.
촬영 때보다 준비 기간에 더 시달린다. 시나리오를 많이 읽고 감독과 나누는 대화를 중요시한다. 현장에서 감정이 읽히는 대로 연기하는 것보다,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해야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저는 제가 맡은 어떤 인물을 파헤친다기보다는 이 인물을 수긍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거든요. 친구 사귀는 것처럼요.”라고 자신의 연기를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그가 녹아든 인물은 전부 이태경이지만, 누구도 이태경이 아니다.
〈경주의 진실〉
경주는 비주류 영화만을 찍어 왔다. 경주가 스태프로 참여한 영화들은 모두 영화제에 갔지만, 정작 본인은 이번 학기가 지나면 학위를 얻지 못한다. 졸업을 위해 교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글을 써 오길 원하고, 주변 사람들은 대중적인 내용의 영화를 찍어 보길 권한다.
“내가 이런 걸 못 쓰는 게 아니야. 안 쓰는 거지.”라는 짜증 섞인 대답은 거짓말이다. 경주는 그런 글을 쓸 수 없다. 제자 예빈이 가져온, 교수님 취향에도 부합하는 ‘주류’ 영화는 찍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경주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내 세상을 함부로 확신하는 주류 권력 사이에서, 자신이 지나온 게 갈림길이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주류’에 속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종종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 선택의 다양한 가능성은 이태경이 표현하는 수많은 얼굴들로 나타난다.
지원은 공립고 기간제 교사 계약 만료를 앞두고 사립고 채용 면접을 보러 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은사와 반가운 대화를 나눈 것도 잠시, 오늘의 면접이 정교사가 아닌 비정규직 채용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여선생들은 결혼, 출산, 육아 뭐 이런 거 때문에. 좀 부담스럽잖냐.
사실 너 추천한 이 자리도 남자 선생으로 미는 거를 내가…”
이 한 마디에 지원은 학교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은사의 도움으로 면접 자리를 얻었다는 빚을 지게 된다. 익숙한 현실이다.
휘파람 소리에 올려다 본 창가에서 교원대 국어교육과를 꿈꾸던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선생님을 많이 도와서 든든했던, 그리고 그런 국어 선생님이 롤 모델이었던 국어부장 똑순이 윤지원이. 함께 동료로 일하게 될 미래가 기대된다는 은사 옆의 지원은 본인이 과거에 꿈꾸던 자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것 같다.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공간 속의 그는, 오늘의 자리도 버겁다.
소진은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운동장을 달린다. ‘안정권’의 기록이 나와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는 어느 날부터 현숙이 신경 쓰인다. 철봉에 더 오래 매달리기 위해 연습하는 듯 몇 차례 매달리는 현숙을 멀리서 보던 소진은 갖고 있던 초 시계로 기록을 재 본다. 1분 40초.
〈바그다드 카페〉, 〈델마와 루이스〉 등에서 자주 보았던 연대의 서사다. 각자의 이유로 위축되어 있던 두 여성이 만나 서로로 인해 구원받는 이야기는 익숙하다. 다만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건조하고 조용하다. 화면 밖 상황, 두 여성의 성격, 겪고 있는 폭력의 정황까지 명쾌하게 주어지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소진에게 연락이 안 된다며 불쑥 찾아오거나 알려주지도 않은 집 주소로 택배를 보내는 데이트 상대가 있다는 점이다. 또 현숙의 집에서 종종 큰 소리가 나고, 그의 손목에 멍이 들었다는 점이다.
이런 간결하고 불친절한 지점들은 짧은 호흡에 전부를 담아야 하는 단편 영화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고, 자세한 설명을 자제하려는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쇼트 하나, 표정 하나를 낭비하지 않는 이태경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면 그렇게 오래 매달려 있으면 안 돼요. 지치기 전에 올라가야죠.”
민주는 교내 성폭력 가해자 백 교수를 규탄하기 위해 탄원서를 모으는 중이다. 그가 속한 동아리에선 백 교수를 거부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해미’로 대변되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아 공개하려 한다. 백 교수가 한 학기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서 조용해졌지만, “아직 안 끝났다.”
허지은·이경호 감독과 작업한 세 영화를 돌아보며, 이태경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을 연기했다는 공통점을 짚었다. 다만 〈오늘의 자리〉의 지원은 여성의 앞을 가로막는 벽을 이제 막 마주한 인물, 〈신기록〉의 소진은 그 벽을 향해서 나도 모르게 달려가는 인물, 〈해미를 찾아서〉는 그 벽을 부수는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벽을 부수는 인물. 민주는 그런 힘이 있다. 과 선배는 ‘나중에 정치해도 될 전투력’이라며 조롱하지만, 민주는 그 힘으로 백 교수를 깨부술 수 있는 인물이다.
“근데 선배는 이거 왜 하는 거예요? 선배도 해미예요?”
“글쎄, 네가 보기엔 어떤데? 해미처럼 보여?”
‘벽을 깨기 위해’ 달려온 이태경의 연기, 그리고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폭발하는 작품이 바로 〈새로운 마음〉이 아닐까 싶다. ‘하나의 신, 하나의 장소, 두 사람의 대화, 반나절의 촬영’이라는 조건을 바탕으로 기획된 옴니버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의 마지막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노동자의 애환을 연기하는 이태경의 얼굴을 가장 좋아한다. 〈평평남녀〉의 만년 대리 ‘영진’, 〈순자와 이슬이〉의 청소 노동자 ‘순자’, 〈새로운 마음〉의 ‘정 대리’까지.
정 대리는 같은 팀의 워킹맘 윤서 씨의 이른 퇴근으로 인한 잔업을 종종 떠맡는다. 거듭된 야근과 주말 출근이 버거워 업무 조정을 요청하지만 돌아오는 건 더 많은 일, 관두고 시집을 가라는 종용, 이참에 오래 쉬라는 무급휴직 권유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힘든 것도, 육아로 인한 공백을 채우는 싱글 직원의 과로도 현실인 작금의 노동환경을 떠올리며 보는 김 팀장과 정 대리의 대화는 그야말로 끔찍하다.
같은 상황이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점이 인상 깊다. 그 두 번의 상황에서 하는 김 팀장의 말이 전부 이기적인 변명, 무례한 헛소리로 일관된다는 점은 진저리가 난다. 정 대리에게 머리를 맞은 김 팀장이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연출로 보아 첫 대화는 꿈이든 생각이든, 김 팀장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 같다.
그의 머릿속에서 정 대리는 예민하게 굴고, 한 마디를 안 지는 별종이다. 그리고 예전 일, “그 정도까지는 아닌 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요즘 여직원’이다.
정 대리는 직장 내 성추행 피해자이다. 인턴 시절 술자리에서, 귀갓길 집 앞에서 김 팀장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그는 이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는 예민하지도 않고, 별종도 아니며, 오히려 아무도 안 먹겠다는 야식을 혼자 먹으러 와 조심스럽게 상급자와의 대화를 이어가는 ‘사회생활 잘 하는’ 직장인이다.
그 앞에서 괘씸한 언행을 늘어놓던 김 팀장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대뜸 무릎을 꿇는다. 우리 이 자리에서 딱 끝내자고. 제멋대로 용서를 구하고 보상을 제안하는 그의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 한심한 머리통을, 뺨을 후려칠 때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통쾌해지는 건 이태경이 지나온 수많은 얼굴들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좌절하고, 감내하고, 연대하고, 의지하고, 움직이고, 분노하는 여성들.
그들의 얼굴이 모두 이태경이라는 배우 안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