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외 3편, 🌠 차근히 쌓아올린 아성 위의 고아성 🌠

〈한국이 싫어서〉외 3편

어릴 적부터 천천히 그리고 단단히 쌓아온 20년이라는 세월은 30대 배우 고아성을 지탱한다. 우리가 계속 그의 작품을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가진,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궁금하다. 

🌠 차근히 쌓아올린 아성 위의 고아성 🌠

영화와 드라마를 보다 보면, 모르는 새 많은 것들이 변하고 그에 적응해왔음을 느낀다. 텔레비전 크기에 맞춰 변한 드라마의 화면비, 익숙해진 시네마스코프 비율, 자글자글하고 뽀얀 필름 카메라 대신 등장한 매끄럽고 선명한 디지털카메라와 같이 말이다. 카메라에 담기는 대상들도 마찬가지다. 유선 전화기 소품은 스마트폰으로 바뀌었고, 거리, 의상, 스타일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게 없다.
 
특히 청소년 배우들의 성장은 이런 변화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어른들의 어깨에도 오지 않던 키는 머리를 훌쩍 넘겨버렸다. 어리고 어렸던 화면 속의 소녀는 ‘아역’ 타이틀을 당당히 벗고 어른이 됐다. 그래서 가끔 기분이 묘해질 때가 있다. 마치 함께 자라온 친구들이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처럼 말이다.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의 ‘나영’을 볼 때 그랬다. 머리를 단정히 묶고 예스런 서울 말씨를 쓰는 고아성. 여자라는 이유로 커피만 타더라도, 불편한 경찰 정복을 입고 범인을 단숨에 제압하는 1988년의 고아성은 〈괴물〉의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이 익숙한 대중들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였다. 어른의 고아성을 마주한 것은.
 
그의 새로운 모습은 어쩌면 당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고아성은 벌써 데뷔 20년 차 배우다. 오랜 시간 차곡히 쌓인 필모그래피는 그를 다양한 모습으로 구성한다. 디스토피아 속 열차 꼬리칸의 ‘요나’, 동생의 진실을 찾아나선 ‘만지’, 만세를 부르던 ‘관순’, 매일 아침 영어를 공부하는 ‘자영’, 그리고 한국이 싫어 떠나버린 ‘계나’까지. 그 외에도 많고 다양한 여성들이 고아성에 의해 완성됐다.
 
이 개성있는 여성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불합리한 현실에 안주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는 이상을 향해 직접 발을 내딛는다는 것이다. 고아성은 이 여성들을 “자유 의지”로 설명했다. 그가 인용한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이성은 신이 부여한 선물”이라는 에라스무스의 말처럼, 고아성의 인물들은 구조에 순응하지 않는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관순’은 1919년 3.1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 유관순이다. 만세 운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관순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인 수감자들을 와해시키고 회유하고자 해도,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작은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관순의 자유 의지는 일제에 부역하는 정춘영과 대비되어 도드라진다. 일제 아래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관순으로 반박된다.
 
그런 ‘관순’을 연기하는 고아성에게 주어진 〈항거〉의 무대는 그리 크지 않다. 대부분의 장면은 1평 남짓한 작은 감옥, 복도, 고문실에서 전개된다. 이렇게 좁은 흑백의 세상에서 극을 이끄는 것은 온전히 배우들의 몫이다. 고아성은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그 선봉장에 있다. 언뜻 두려움도 내비치지만, 혹독한 환경에도 꺾이지 않는 ‘관순’의 의지는 크고 또렷한 눈빛으로 표현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자영’은 승진하기 위해 토익 공부에 열진하는 삼진그룹의 사원이다. 자영을 비롯한 여성 사원들은 상사들보다 능력 있고 회사 사정도 더 잘 파악하고 있지만,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승진하지 못한다. 임신을 이유로 퇴사를 강요 당했던 선배를 보며 우리의 미래 역시 똑같을 거라 좌절하는 목소리 속에 자영은 승진할 수 있다며 결의를 다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삼진이 최고의 기업이라 말하던 자영이 마주한 회사의 어둠과 그로 인한 피해는 다시금 거대한 회사에 맞서는 외롭고도 험난한 싸움을 시작하게 한다.
 
‘자영’은 〈라이프 온 마스〉의 ‘나영’과 비교해보면 더 흥미롭다. 1988년의 ‘나영’과 1990년대 중반의 ‘자영’ 사이의 간극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서울에 살고, 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조직의 말단에 있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두 인물은 명확히 구분된다. 차분한 말투와 동작, 부드러운 눈빛의 ‘나영’과 당당한 자세와 강인한 목소리로 행동하는 ‘자영’의 차이는 세심한 연기에서 비롯한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한국이 싫어서 뉴질랜드로 떠나버린 현대의 20대 후반 여성이다. 인서울 좋은 대학을 나오고, 서울에 위치한 회사에 취직했음에도 모든 걸 버리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 시작하기를 택했다. 선택의 이유는 간단히 말해 “한국이 싫어서.” 그 여섯 글자에는 지쳐버려 자세한 설명도 포기한 현대 한국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새로운 땅에서 계나는 알바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이방인 여성임에도 자신이 선택한 고생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이런 ‘계나’의 모습은 여러 갈래로 나타난다. 추위가 싫고 지겨운 버석한 모습의 계나,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뉴질랜드에 도착한 계나, 향상된 영어 실력과 함께 뉴질랜드 사회에 섞여 들어간 계나, 쫓겨날 위기를 맞이한 계나,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현실과 마주한 계나까지. 〈한국이 싫어서〉에는 이토록 다양한 ‘계나’들이 명확한 시간과 순서 없이 교차된다. 그럼에도 계나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고 그의 앞날을 지지하게 되는 것은, 계나를 담아내는 고아성의 건조하면서도 굳센 눈빛과 연기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아성의 여성들은 구조를 전복하고자 하거나, 그 아래에 있더라도 바꾸고자 하거나, 혹은 떠나고자 한다. 순응이나 종속과는 거리가 먼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젊은 여성들이다. 이런 고아성의 작품을 좋아하고, 기대하는 이유는 우리 역시도 지금보다 더 나은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가 좋아하던 동화의 펭귄 파블로처럼,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따뜻한 세상을 맞이한다. 고아성의 필모그래피는 어린 티를 벗고 그런 항해를 떠나는 어떤 젊은이의 발자취이자 성장일기다. 열정 있는 이 여배우가 풍파 속에서, 그리고 향후 도달할 따뜻한 세상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더욱더 기대되는 바이다.
 

240926_유안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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