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아, 🐹 자꾸자꾸 궁금한, 심달기 🍅

〈말아〉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갈지 정하지도 못했는데, 팬데믹이 찾아와 집 안에 갇힌 꼴이 됐다. 주인공 ‘주리’는 늦잠을 자고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주리를 연기하는 심달기 배우는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을 가만히 위로하는 이 이야기를 자신만의 에너지로 이끌어 간다. 어느 날, 엄마의 명령 하달에 주리는 계획에 없던 출퇴근을 시작한다. 홀로 김밥을 ‘말아’ 가게를 지키러!

🐹 자꾸자꾸 궁금한, 심달기 🍅

처음 심달기 배우를 봤을 때 “진짜 귀엽다!”고 생각했다.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속, 교무실에 잠입해 봉사활동 인증서를 훔쳐 나오는 ‘완수’로 분한 그녀는 드라마 자체의 미스터리와 명랑함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우라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난 안 들켜, 뭐든’ 하고 말하는 그 자신만만한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후에 다른 이야기에서, 다른 배우들 사이에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내게 심달기는 언제나 심달기였다. 변화가 없는 배우라는 말이 아니라 그 반대다. 곽민승 감독의 〈말아〉에서 지난한 청년 시기를 겪는, 우리 모두를 닮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조차 심달기는 너무나 특별한 배우다. 항상 ‘모르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나는 그녀는 어떤 이야기든지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화면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김밥집 딸 주리는 한 번도 김밥을 말아 본 적이 없다. 이십 대 중반, 눈 뜨면 커피 타 마시고 배달음식 시켜 두고 게임 하는 게 하루 일과이다. 우리는 이미 그녀가 지쳤음을 알고 있다. 무언가 다른 일, 잘하는 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시작해본 적은 없다. 자신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것은 벌써부터 힘들고, 하루는 끊임없이 무료하다. 어느 날 주리는 엄마가 편찮으신 외할머니를 돌보러 지방에 내려갈 동안 김밥집을 맡거나 아니면 당장 자취 중인 방을 비우라는 청천벽력 같은 전화를 받는다. 단 두 개 뿐인 선택지에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가게로 갈 채비를 한다. 그날 처음으로 김밥을 말아 본 주리는 엄마의 멸치김밥 테스트를 거치고, 이내 혼자 가게를 지키며 단골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 누가 꽁다리 귀신 아니랄까 봐 꽁다리만 다 먹구 왔네. (…) 멸치가 너무 달다.

– 걍 멸치 안 하면 안 돼? 엄마 멸치는 매콤한데 내 거 자꾸 달어.

– 물엿을 좀 빼야 돼. 많이. 치즈는 괜찮네.

– 아 그냥, 엄마, 멸치 빼자.

– 쓸데없는 소리 말어! 멸치 연습 더 해.

– 물엿을 넣으라 그래서 넣었는데 또 빼라네.

언뜻 보면 잠깐 가게를 보는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말아〉는 그런 일 또한 삶을 살아가면서 지나게 되는 시기, 해결한 사건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자신만의 리듬으로 스펙터클과 코미디를 보여주는 주리의 이야기를 심달기 배우가 서술한다. 그녀는 커피 타고 담배를 피우고 고양이 세수를 하는 장면, 빨랫감 사이의 양말을 발굴해 다시 신고 나가는 장면을 말 그대로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완성해낸다. 엄마의 불호령에 ‘알았어, 알았다고…’ 하고 답하며 짓는 표정에는 ‘아, 씨… 하기 싫은데…’ 하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본능적인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평범함이 이 배우의 특별함으로 거듭난다. 심달기의 장기는 어떤 역할이든지 자신의 톤으로 만들어내는, 다시 말해 그녀만의 방식으로 평범함을 연기하는 것이다.

수많은 팬데믹 영화 중에서도 〈말아〉는 대규모 프로덕션이 어렵다는 태생적인 한계와 시기적인 조건을 영리하게 이용해서 관객에게 다가간다. 폐업을 고민하는 식당에는 단골 손님들만이 이따금씩 찾아온다. 친구들을 오래 못 만나 아쉬운 어린이 손님이 오기도 하고, 동네 빵집은 확진자가 방문하는 바람에 문을 닫기도 한다. 첫 손님은 자격증 공부를 하는 남자 손님이다. 이른 아침에 찾아와 김밥 한 줄을 먹고 가는 그가 마음에 든 주리는, 그가 챙겨 준 반창고를 버리지 않고 모아 둔다. 밀고 당기는 로맨스가 결코 아니기에, 두 사람은 이름도 모르고 쭈뼛거린다. 하지만 손님이 김밥에서 쏙 골라낸 단무지 조각, 화장실 거울에 덕지덕지 붙인 반창고를 보며 주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작은 디테일과 심달기의 섬세한 연기를 보면서 관객은 도입에는 없던 귀여운 로맨스가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말아〉는 여성의 성장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 모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리와 엄마는 방 문을 걸어잠그고 악을 쓰며 싸우는 드라마틱한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틱틱거리는 말투와 흘겨 보는 눈빛이 오가지만 그럼에도 깨지지 않는 관계가 오히려 균형을 지키면서 삶을 이야기하게 해 준다.

초등학생 손님과 수다를 떨고 빵집 사장님이 챙겨 온 반찬으로 식사하는 일상을 겪으면서 주리는 김밥집을 운영하는 것을 심부름 정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 진짜 노동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심달기는 주리가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한가지 사건과 한 벌의 옷을 마주칠 때마다 말을 넌지시 던지고 어색한 웃음을 보이고 또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매력을 마음껏 드러낸다.

– 주리 씨, 그러면 워드랑 운전 말고 잘 하는 게 뭐예요?

– 저는… 김밥…을 잘 말아요.

마침내 주리에게는 잘 하는 것 하나가 생긴다. 노트북 화면 속, 부족한 스펙을 지적하며 잘 하는 게 뭐냐고 묻는 면접관에게 그녀는 김밥을 잘 만다고 대답한다. 주리는 담배도 덜 피우게 되고, 단골 손님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 단체 주문을 완수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건들은 영화의 리듬만큼이나 천천히 이루어진다. 주리는 그저 가게를 돌보는 데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그녀가 사실은 성장하고 있음을, 그리고 고립 속에서도 새로운 만남과 재발견, 과거를 잠깐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조그만 성장은 대사와 몸짓으로 호흡을 마음껏 조절하면서 극을 이끄는 배우 심달기, 원래 ‘달래다’ 라는 뜻을 지닌 그녀의 이름과 꼭 닮았다.

심달기는 불편한 행동,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영웅적인 캐릭터, 즉 ‘나’를 만족시키는 캐릭터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되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함으로써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쟤’를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최선의 삶〉, 〈사람냄새 이효리〉, 〈악귀〉, 〈소년심판〉, 〈그림자 미녀〉 같은 작품에서 그녀는 폭력과 비극에 노출된 인물들을 맡았다. 거기서도 입술을 비죽이며 눈물을 터뜨리고, 그러다가도 예상치 못한 해맑음으로 비극을 외면해 보려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을 연기했다. 그래서 〈말아〉를 통해서 새로운 얼굴, 희망에 찬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마음, 다 펼치지 못한 욕망을 짊어지고 앞으로 살고 또 살아야 하는 시간이 남은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청춘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그녀를 각인시킨다. 그리고 계속해서 궁금한 인물이 되도록 해준다.

언젠가 한 아이돌 팬이 ‘그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어도 키우던 소가 방송국에 제보해서 연예인이 됐을 것’이라는 글을 쓴 것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심달기 또한 그런 연기자다. 마치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배우 부부에게 아이를 내려 주고 또 카메라 앞으로 떠밀어 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쉽게 장면을 완성해낸다.

캐릭터의 본능을 궁리한 후에 배운 적도, 외운 적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평범함을 재현하는 연기가 그녀를 너무나 매력적인 배우로 만든다. 어떤 때는 필요에 의해서, 또 연출자가 원해서 일할 때도 있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쟤’를 연기하고 싶다는 그녀의 지향점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빛나는 재능과 연기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발휘하듯, 앞으로 청년 캐릭터를 넘어 더 다양한 배역을 맡을 그녀가 궁금하다. 서른, 마흔, 또 수백 수천 살을 먹고 수만 가지 색깔을 지닌 캐릭터를 자신만의 특이한 에너지로 연기하는 심달기 배우가.

241003_효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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