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덕 · 소리도 없이, 📝 문승아의 헤매는 눈동자 🐰

이지은, 〈비밀의 언덕〉 · 홍의정,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자리잡힌 이목구비 위로 유독 또렷한 눈동자가 눈에 띈다. 1996년, 초등학교 5학년 명은의 세계는 명백하다. 어떻게 사는게 맞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명은의 세계에 균열이 가는 것은 전학생 혜진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그토록 선명하던 눈동자가 점차 흔들리는 순간, 이 어린 배우의 얼굴은 우리 모두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소환한다.

📝 문승아의 헤매는 눈동자 🐰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 어린이라기보다 작은 인간에 가깝게 스스로를 감각하는 5학년의 아이들은 세상과 나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격동의 나날을 보낸다. 명은 역시 마찬가지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면화되고, 삶의 청사진이 비로소 그려지는 시기, 명은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처음 경험한다.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엄마는 도저히 옆을 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명은은 엄마가 전업주부가 아니라 억척스러운 젓갈 가게 사장이라는 사실만큼, 시민이라면 응당 해야 할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후원전화를 단 한 번도 걸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명은은 그런 아이인 것이다. 환경은 보호해야 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존과 평화의 가치를 믿는 아이. 그런 명은에게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는 가훈은 심히 당혹스러웠을 테다.

보이는 것에 예민하고 인정욕구가 강한 명은은 학기 초,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행해지는 가정환경조사 면담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회사원 아빠와 가정주부 엄마를 얻게 된 명은은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로 덮으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짓 위에 자기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세운다. 그 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명은의 글이다. 명은의 글에는 자신이 좇는 가치들로 가득하다. 그 사이에 가족이나 현실이 끼어들 틈은 없다. 철저한 자료조사를 기반으로 적절한 형용사와 비유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무랄 데 없는 글을 선보이는 명은은 그러나 매번 2등 상인 우수상에 그친다. 주어진 상장에 만족하는 명은이지만 전학생 혜진이 최우수상을 수상하자 명은의 마음속에는 혼란스러운 열꽃이 핀다.

 

명은에 대해 “조용한 줄 알았더니 무척 명랑하더라. 어떤 느낌의 아이인지 확 느껴져서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는 문승아 배우는 또래이기에 누구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청소년기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내며 명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명은이 시장에서 엄마를 피하면서 느끼는 안도감과 죄책감, 자신의 글에 대한 청자의 미지근한 반응을 확인했을 때의 혼란스러움, 오빠로부터 거짓말을 들켰을 때의 수치심 등 낯선 감정들 앞에서 헤매는 마음이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하다. 그 모든 것이 문승아 배우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꼼지락거리는 손을 통해 전달된다.

영화는 어린이의 마음을 납작하게 바라보는 어른들의 손쉬운 편견을 꼬집고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입체적인 마음들, 처음 느껴보는 양가적인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불편함을 비추며 각자의 우주가 확장하는 과정을 목격한다. ‘솔직함’을 필승전략으로 삼는 혜진의 조언대로 가장 숨기고 싶던 진실을 적어 내린 명은의 글은 대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지만, 자신의 솔직한 마음으로 인해 상처 받을 가족들의 마음이 명은은 신경 쓰인다. ‘가족을 정말 사랑하는구나’라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는 엄마에게 ‘막 살지 마’라고 애원하면서도, 도무지 존경할 수 없을 것 같은 아빠를 숨기는 와중에도 명은이 느끼는 생경한 불편함은 기어코 명은이 대상을 포기하게 만든다.

 

명은은 하늘을 바라보며 적어 내린, 부끄럽지만 솔직한 마음들을 제 손으로 회수한다. 그리고 언덕을 올라 흙으로 덮어 놓는다. 그런다고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가족이 밉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의 마음으로 향했던 시선을 돌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로 선택하는 위선이 뭉클하다. 그리고 물음표뿐인 가족일지라도 꼬깃한 상장을 품에 안고 젓갈가게로 달려가는 명은의 비밀을 지켜주는 영화의 다정한 태도 역시 헤아리는 마음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함의한다. 수면 아래 마음들은 결국 얼마나 많은 마음들을 지켜냈던가.

명은의 성장이 더욱 반가웠던 이유는 그 얼굴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비밀의 언덕〉 속 명은 이전에, 영화 〈소리도 없이〉를 통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초희’가 있었다. 토끼 가면 뒤 훨씬 앳된 얼굴의, 10살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는 피유괴자의 입장에서 영리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확실한 기회가 오기 전까지 섣불리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상황이 거짓말을 낳은 〈비밀의 언덕〉과 달리, 〈소리도 없이〉는 초희의 거짓말이 극 전체의 흐름을 이끌어나간다.

 

초희는 시종일관 낯선 환경, 낯선 인물을 마주한다.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초희는 발버둥치기보다 그 환경에 적응하기를 선택한다. 유괴범 ‘태인’의 어질러진 집 안을 청소하고, 태인의 여동생 ‘문주’를 깨끗이 씻어준다. 남매와 함께 쌓인 옷가지를 빨래하는 모습에서는 심지어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들 사이에 쌓이는 유대의 감각은 관객으로 하여금 태인에 동화돼 초희가 이곳에서 그려갈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처음으로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 자신의 영역에 도달하는데 성공한 초희의 선택은, 결국 그가 단 한 번도 토끼 가면을 벗지 않았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관객과 태인의 최면을 풀고 현실로 복귀하게 한다.

그제야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던 초희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어른들의 얼굴을 확인하느라 언제나 고개를 약간씩 들어 눈동자를 바삐 움직이던 초희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관망하기에 언뜻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행동한다. 눈칫밥을 먹고 자라 가면을 쓰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아이는 본인에게 생존전략인 거짓말을 익숙하게 구사한다. 다른 속내 따위 없어 보이는 무해한 얼굴은 어린아이의 ‘순수함’이라는 관념적 편견을 손쉽게 강화하는 것이니 이 또한 좋다. 그러나 실은 그 누구보다도 현실을 가장 잘 직시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문승아 배우는, 다부진 입매와 꼿꼿한 자세로 극을 이끌어 나간다.

 

공교롭게도 초희와 명은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공통적으로 거짓말을 택한다. 다만 초희는 거짓을 자신만의 언어로 체득한 사람 같이 유려한 반면, 명은은 어설프고 아무래도 초조하다. 문승아 배우는 이 미묘하고도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눈으로 표현한다. 상대를 또렷이 응시하는 눈과, 헤매는 눈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초희는 안도하거나 무너지지 않고 정돈된 자세와 평온한 얼굴로 그저 고개를 숙여 부모님께 인사한다. 마치 쓰고 있던 가면을 고쳐 쓰듯, 초희의 얼굴은 태인과 함께였을 때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아마도 초희는 이후로도 가면을 벗지 않고,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벽을 더욱 공고히 세울 것이다. 헤맸을지언정 더 큰 세계를 마주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품게 된 눈동자가 또렷이 빛나는 <비밀의 언덕> 속 마지막 장면의 명은과 대비되는 순간이다.

초희의 안녕이 우려되던 찰나에 마주한 명은의 헤맴이 반가웠다. 초희와 명은의 차이는 두 사람을 둘러싼 세계의 간극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삼대독자인 남동생과 비교당하는 환경 속에서 세상은 초희에게 헤맴까지 허용하기엔 너그럽지 못한 곳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만큼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이대의 인물들을 연기해 온 문승아 배우는 그 역시도 초희와 명은을 통과하며 성장했으리라.

 

“5학년이다 보니 진중한 역할은 지양했다”고 말하는 문승아 배우는 자신만의 비전이 확실하고 연기자로서의 직업정신이 투철한, 다시 말해 진중한 배우이다. 단역으로 참여한 작품에서 감독을 찾아가 대사 한 줄만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이 배우의 얼굴에서 초희와 명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자신이 명은을 만든 만큼 명은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문승아 배우의 말마따나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그의 앳된 얼굴이 많은 이야기들을 거쳐 또 새롭게 만들어지고, 겹쳐질 모습을 기대하게 된다. 지나온 길보다 더욱 길게 펼쳐져 있을 그의 앞에 놓인 길을, 마음껏 헤매며 말이다.

241017_상희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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