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그 질레스피, 아이, 토냐
“이 시국에?”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가장 많은 생각을 남긴 올림픽이었다. 순위에 연연하지 않는 관람 문화 덕에 더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고, 경쟁심을 떠나 경기를 즐긴 덕에 선수들이 더욱 빛났기 때문이다. 체조에서 엄청난 기량으로 주목을 한 몸에 받던 미국의 시몬 바일스가 심적 부담감으로 기권을 선언했을 때, 선수들은 매 순간 아주 작은 동작 하나까지도 그들을 영웅 또는 공공의 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이해하고 감수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공감하듯 많은 이들이 선수의 의사를 존중해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일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선수들은 스타의 생활도 감수해야 한다. 운동과 관련이 있든 없든 스캔들로 인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한국 최초 3관왕이라는 역사를 쓴 안산 선수가 단순히 숏컷 스타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스트 ‘논란’을 창조했고, 이로 인해 선수가 온전히 경기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연맹 차원에서의 이미지 관리가 이뤄지기도 하며, 어떤 종목에서는 연맹이 지향하는 바가 선수들의 커리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관심과 경멸을 한꺼번에 받은 이 피겨 스케이터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토냐 하딩은 미국의 전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올림픽과는 연이 없었지만 아직까지도 종종 회자되는 이름이다.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뛰는 등 훌륭한 기량으로 사랑받았지만, 라이벌이던 선수 낸시 캐리건이 피습당한 사건에 의도치 않게 연루되어 불명예스럽게 선수 생활을 마감한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 스케이트장에서 연습을 마치고 나오던 낸시의 무릎을 누군가 타이어 렌치로 공격했는데, 나중에 배후에 토냐의 전남편과 그 친구가 있음이 밝혀지며 토냐가 사주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 사건은 그를 한순간에 ‘은반 위의 악녀’로 만들기 충분했고, 토냐는 이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평생 미국에서의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다.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조금 다른 토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수로서의 역할을 다 하기도 벅찬데 피겨계는 미국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잣대를 요구했고,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와 남편의 끊임없는 가정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토냐의 강점인 뛰어난 기술을 살리는 것은 피겨 종목의 특징인 우아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부모가 이혼하고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도 이혼한 토냐가 ‘미국적인 가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심사위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토냐의 스케이팅 커리어는 의도적으로 배제당하고 축소되었다.
영화는 토냐가 낸시 캐리건 피습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진 않지만, 섣불리 그를 ‘악녀’로 몰아갔던 것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직접적인 폭력의 가담자가 전남편과 그의 친구로 알려져 있는데, 범행 당시 토냐는 이미 그와 이혼한 상황이었다. 언제든 다시 남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토냐에 대해 이야기한 인터뷰 진술을 100% 신뢰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또한, 토냐의 인터뷰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따르면 당시 토냐는 코치가 요구한 ‘미국적인 가족’을 연출하기 위해 전 남편과 다시 잘 지내는 듯한 모습을 언론과 심사위원 앞에 보여주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전 남편이란 자는 토냐를 돕겠다는 명목으로 친구와 함께 상대 선수에게 폭력을 가했다.
영화 속 인터뷰 클립에서 토냐는 자신은 폭력을 가할 생각은 없었으며, 당시 모든 선수가 겪었고 자신도 그러했던 것처럼 그저 협박만 하려 했다고 말한다. 견제 차원에서 협박만 하자고 이야기했고, 폭력은 전혀 협의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당했다고 해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문제긴 하지만, 가정폭력 가해자인 제프와 자신이 테러 전문가라는 망상에 빠져 일을 키웠던 션이 정말 토냐를 돕겠다는 목적만으로 범행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을까? 또 이들이 정말 돌발 행동으로 낸시를 공격한 거라면, 둘이 아니라 토냐가 ‘희대의 악녀’가 되어야 하는 상황은 괜찮은가?
나아가 영화는 토냐에게 악녀 프레임을 빠르게 씌울 수 있었던 요소들을 드러낸다. 먼저 토냐가 연맹이 바라는 피겨선수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점은 사건이 터졌을 때 그가 연맹으로부터 빠르게 배제당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우아함을 요구한 당시 피겨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선곡과 화려한 기술은 선수로서 토냐를 튀어 보이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연맹은 토냐의 사생활이 시끄러운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에서 심사위원과 코치는 토냐의 모습이나 뒷배경이 대외적으로 ‘미국적’인 것으로 보여주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주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첫 장면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코치가 토냐에 대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토냐가 얼마나 ‘미국적’이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토냐는 사람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확실히 갈렸죠. 사람들이 미국을 좋아하거나 아주 싫어하는 것처럼요. 토냐는 미국인 그 자체였어요.” 말하자면 토냐는 너무나도 미국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피겨계가 선전하고자 했던 ‘미국적인 모습에 부합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실제로 영화가 조명하는 토냐의 유년기와 선수 생활 초반은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다. 엄마는 토냐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혹독한 훈련을 시키면서 화장실 한번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했고, 언어폭력은 물론 물리적 폭력까지 일삼았다. 부모의 정서적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에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 때문인지 토냐는 15살 때 처음 만난 남자와의 관계를 사랑이라 믿고 결혼했다. 이후로도 그는 줄곧 토냐에게 폭력을 행사한 후 사랑이라며 그것을 정당화해왔다. 토냐는 이혼 후에도 바로 그런 사람과의 관계를 억지로 다시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영화가 이렇게 조금은 다른 토냐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이유는 그 또한 피해자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토냐뿐 아니라 사건에 연관된 제프와 션, 그리고 엄마 라보나와 코치 다이앤의 진술과 토냐에 대한 평가까지도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겨났는지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해당 사건으로만 토냐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인지’ 되묻는다. 이때 인터뷰 장면의 화면비는 캠코더 재생 화면처럼 좁아지고 실제 삶을 재현할 땐 시네마스코프로 넓어진다.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픽션에 도입함으로써 토냐에 대한 무거운 진실에 적당히 진중한 태도로 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겁게만 이야기를 끌고 가지도 않는데, 토냐가 ‘악녀’가 아니라고 해서 수동적인 피해자의 위치에 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드러나는 위트는 작품의 블랙코미디적 성격을 강화한다. 폭력적인 상황은 이를 회고하는 토냐의 목소리를 통해 스크린에 펼쳐진다. 제프와 싸우거나 맞는 장면에서도 이 상황을 재연하고 있는 토냐가 종종 카메라를 바라보며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남긴다. 토냐의 피해 상황이면서도 토냐의 언어를 통해 폭력적인 상황을 다시 씀으로써 가해자 제프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토냐를 잊어버리고 난 후인 2018년에 이 영화는 개봉했다. 사실 그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인물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마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당시 사회에서 토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했을까? 아마 시대가 어느 정도 변화했고, 여성 선수들이 억지로 행복한 가정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나 부조리한 연맹 자체에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이 늘어난 덕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연맹이나 종목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에서처럼 여자 선수들 간에 경쟁을 붙이고 그들의 사생활을 가십으로 삼는 언론들은 여전히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사실 (제작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토냐의 이야기가 영화로 개봉될 수 있었던 건 가해자의 이야기를 가십으로 궁금해하는 언론과 대중 덕도 있을 것이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과 그때가 다르지 않다는 점은 이 영화가 씁쓸함을 남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