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E, 🌱 안녕하신가요, 이 적막함 속에 🌱

🌱 안녕하신가요, 이 적막함 속에 🌱

앤드류 스탠튼, 월-E

🎵 월-E가 사랑하는, 영화 〈헬로 돌리〉(1969)의 OST It Only Takes a Moment – Michael Crawford

시작하기 전에, ‘적막’은 사실 여담과도 잘 어울리는 단어랍니다. 화상 회의 때마다 각자 할 말을 고민하느라 고민에 차 있는 순간에는 적막만이 가득하거든요. 😅

반쯤 농담으로 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적막은 온라인 소통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작금의 상황과 맞닿아 있는 단어이기도 하죠. 저의 경우 학교나 친구들과 있는 공간이 아닌 방 한구석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적막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당장 강의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며 멀리 사는 친구들은 만나기 어려워졌고, 여러 제약을 감수하고 만나는 상상을 하다가도 결국 ‘코로나 잠잠해지면 만나자’는 인사말로 대체하게 되는 일이 잦아졌고요. 액정에 떠 있는 몇 마디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소통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겼던 것 같아요.

분명 말은 하고 있지만 어쩐지 적막을 느끼게 하는 이 시대의 소통은 영화 〈월-E〉 속 사람들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지구 청소 계획이 실패해 우주를 떠돌고 있는 사람들은 기대어 앉은 자리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우주선 ‘액시엄호’에서 살아가고 있죠. 분명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우주선이지만, 누구와 얼굴을 맞댈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필요한 건 로봇들이 해결해 주고, 대화는 화상통화로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이곳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말하는 소리로 북적이지만, 정작 대화는 없어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입니다.

한편 지구는 오랫동안 인간 없이 방치된 상태로, 기계가 내는 소리만이 남은 적막한 공간입니다. 그곳에 남겨진 ‘지구 폐기물 수거-처리용 로봇’ 월-E는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지내고 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우주선에서 이브라는 한 로봇이 내려옵니다. 월-E는 무서워하면서도 이 낯선 존재와 가까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요. 경계하는 이브에게 자신이 위험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 졸졸 따라다니고, 열심히 모은 소중한 것들을 보여주며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죠.

이 소통의 순간이야말로 ‘적막’입니다. 둘은 음성 언어를 사용해 대화하지 않기 때문이죠. 나눌 수 있는 대화라곤 기껏해야 서로의 이름이나 ‘임무’ 같은 기본적인 단어들뿐입니다. 그러나 눈빛이나 몸짓만으로도 이들이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와닿습니다. 말이 없어진 만큼 서로를 바라보고 귀 기울일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 소통에는 섬세함마저 느껴지죠.

이처럼 적막하고 황폐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소통을 시도하던 월-E는 이브가 지구에서의 목적을 달성하고 우주로 귀환하자 무작정 쫓아갑니다. 이브를 되찾는 월-E의 여정은 이브에게 감동을 줄 뿐 아니라 인간 사이의 ‘적막’에도 균열을 내죠. 의자에 앉아 앞만 보던 이들은 소동을 일으킨 로봇들 덕에 처음으로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누군가를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존과 메리는 각각 월-E, 이브와의 충돌을 통해 스크린 바깥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이들이 서로 대화하는 모습에서는 마치 처음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법을 익혀가는 사람들마냥 조심스러움이 느껴집니다. 둘은 화면만 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상대의 얼굴과 손이 닿았을 때의 촉감 같은 것들을 느끼게 되죠. 언어도 거의 거치지 않는, ‘적막한’ 소통을 하는 로봇들을 통해 처음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가는 겁니다.

월-E와 이브의 소통이 인간에게 잊었던 것들을 상기시켜주기도 합니다. 액시엄호의 선장은 하루의 유일한 일과가 아침 연설이었고, 우주선 바깥의 삶에는 관심이 없던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이브가 가져온 식물을 통해 처음으로 무언가를 보호하고 길러내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게 된 선장은 지구로 돌아가길 택하죠. 700년 동안 특별한 일 없이 우주에 표류했던 인간들 사이의 적막을 깨 버린 것입니다.

이 적막을 깬다는 것은 또한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로봇이 혼란을 가져오기 전까지 액시엄호에서의 생활은 수백 년을 거쳐 오며 안정된 상태였습니다. 인간의 실수로 더는 지구에서 살 수 없게 되자 통제된 조건 속의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죠. 그러나 지구를 (다시금) 처음으로 발견한 인간인 선장은 실존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곳에는 인간이 직접 노동하며 먹을 것을 얻어내는 보람이 존재하고, 월-E와 이브가 우주에서 펼치는 춤과 같은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도 보장되지 않은 세계에 발을 들이고, 계속해서 닥쳐오는 새로운 일들을 발견해 나가기를 택하는 것이죠. 아름다움은 이곳에서의 안정된 삶이 아닌 지구의 불확실성 속에서 생겨나니까요.

“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원해.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주변의 모든 상황이 어떤 확답도 해 주지 않는 시절을 원망하던 저는 이 시기를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적막에 익숙해지기를 택해왔어요. 외로움이 나를 잠식하는 듯했죠. 아마 이 영화에서 ‘적막’과 그것을 깨는 모습을 발견한 것도 그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요. 존과 메리처럼 언제든 원하면 화면을 끄고 누군가를 마주 볼 수 있는 시기는 아니지만, 적막 속에서도 충분히 소통해낸 월-E와 이브가 어쩐지 용기를 주거든요. 내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무의미한 말들로 공백을 메우기에 급급했던 제게, 〈월-E〉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혹 비슷한 기분을 느끼셨다면, 제가 월-E와 이브에게 받은 용기가 여러분께도 전해지길 바라며 오늘의 여담을 마무리해보려 합니다.

이 적막함 속에, 안녕하신가요?

220210_성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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