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라운드, 🥃 달든 쓰든 삼키는 인생 🥃

🥃 달든 쓰든 삼키는 인생 🥃

토마스 빈터베르그, 어나더 라운드

‘시작’이라는 말은 괜스레 사람을 설레게 한다. 잔잔하던 일상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변화를 꿈꾸게 한다. 게으른 과거는 언제였냐는 듯 성숙한 미래만이 나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수 있다며, 겸허히 마음을 가다듬고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 이렇듯 시작은 설레는 동시에 고결하고 거창한 일이 되어 간다.

 

물론 시작이 반드시 성공적인 맺음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끝에는 고결함을 좇다 생긴 잔재들이 곳곳에 남겨진다. 예컨대 신년을 맞이해 구매했지만 두 달을 넘기지 못한 다이어리, 심리학 박사가 될 것처럼 구매했던 책들이 겹겹이 쌓인다. 느닷없이 운동 욕구가 발동해 구매한 요가 매트와 아령은 그 용도를 잃은 채 방구석에 널브러져 있다. 촘촘하게 짠 계획은 하나둘 밀리다 서서히 무너진다. ‘제발 사용해 줘!’ 외치는 이들을 애써 무시한 채 또다시 새로운 다이어리를 구매하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 내일을 위한 의례로 맥주 한 캔까지 구매하면 완벽한 준비가 끝났다. 그래, 오늘은 마시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여기 마르틴,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 역시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소원해진 가족과의 관계, 그저 줄줄이 책을 읽고 의미 없는 노래만 부르던 수업.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열정도 자신감도 잃은 이들 앞에 ‘술’이라는 변수가 등장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스코르데루의 가설을 실험하고자 하는 목표가 생긴다. 본디 인간은 혈중알코올농도 0.05%가 결핍되었고, 이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정 말이다. 규칙은 다음과 같다. “반드시 술은 근무 시간에만 마셔야 한다. 저녁 8시 이후와 주말은 금주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를 통해 네 친구는 더 느긋하고 침착해진, 음악적인 데다 대담해지기까지 한 삶을 시작하려 한다.

 

이 가설을 가장 먼저 실험한 이는 역사 교사 마르틴이다. 술로 빚은 일상은 그를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익살스러운 선생으로, 집안의 활력을 북돋는 아버지로 재탄생시킨다. 재즈 발레를 하던, 청바지를 입고 허세를 부리던 과거의 그가 조금씩 돌아오는 듯, 아내 아니카와 그의 경직된 얼굴도 점점 웃음을 띠기 시작한다. 톰뮈는 열정적인 체육 교사를 자처한다. 물병에 술을 담아 마시며 열 오른 가르침을 펼치던 그는 따돌림을 당하던 스펙스에게 위로와 자신감을 건넨다. 학생들과 한층 가까워진 니콜라이는 자신감 있게 심리학 수업을 진행하며, 페테르는 아이들에게 영혼으로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 발칙한 실험은 그들의 생활을 점점 변화시킨다.

 

그러나 실험은 그들의 삶을 파멸로 이끈다. 0.05%를 유지하자던 계획은 ‘각자 최적의 능력을 갖출 수 있는 혈중알코올농도 찾기 실험’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해방감과 관련한 심리적 영향을 파헤친다며 마구잡이로 술을 마시는 행동까지. 술은 그들의 실험 도구도 삶의 동력도 아닌 인생 그 자체가 되어간다. 만취한 마르틴과 친구들은 느닷없이 생물 대구를 잡는다며 낚시하고, 술집에서 발가벗은 채로 피아노를 치며,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바닥에 쓰러진다. 이에 가족들은 하나둘 그들을 떠나기 시작한다. 음주 실험의 잔재로 톰뮈는 교사직을 박탈당한다. 대담해진 삶을 즐겁게 보내던 그들의 곁에는 어느새 고통만이 가득하다.

“인간의 혈중알코올 수치가 0.05% 부족하다는 스코르데루의 이론 연구는 여기서 종료한다.

지대하고 부정적인 사회적 영향과 우려 때문이다. 알코올중독에 대한 우려가 크다.”

아니카와의 결별과 톰뮈의 죽음. 불안을 이겨낸다는 명분으로 술을 마시던 그들의 삶이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원래 술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뱉어버릴 수밖에 없는 독한 냄새와 함께, 뇌를 마비시키며 각종 질병으로 우리의 건강을 앗아가는 물질. 무엇보다 한번 중독되면 빠져나가기 힘든 게 바로 술이다. 위 이론처럼 적당히 마신다면야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 정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술을 마신다. 고작 공병 값이 우승 상품인 대회에서 맥주 한 상자를 마시고 경주하던 학생들처럼, 네 친구 역시 위스키를 들이붓고 밤거리에서 우스꽝스러운 경보 시합을 펼친다. 면접을 앞두고 긴장감에 잡아 먹힌 학생을 지켜보던 페테르는 그와 술을 나눠마시기도 한다. 우리 역시 술을 마신다. 언젠가 좋아하는 이들과 들뜬 분위기에 취하고 싶을 때면, 혹은 술맛이 달게 느껴질 만큼 고된 하루를 떠나보낼 때면 말이다. 그놈의 술 술 술! 이처럼 많은 해악을 인지함에도 우리가 다시 술을 마시는 이유는 알코올이 정체된 삶을 붕 뜨게 만들기도,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술은 아예 마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삶은 술과 닮아있다. 첫 술처럼 스무 살은, 1월 1일은, 시작은 설렘을 안겨주는 성대한 일이다. 그날은 흥겨운 분위기 속에 취한 채 더 성숙해진 나를 그린다. 파란만장한 미래를 꿈꾸며 쓴맛을 애써 지워간다. 물론 달콤한 환상 뒤에는 고통이 뒤따르는 법이다. 이윽고 고결한 마음가짐은 예측하지 못한 일들 속에 변해간다. 무언가에 쫓기고, 뒤처지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며, 목적을 잃고 무기력한 여정으로 뒤바뀐다. 게워내고 싶어진다.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현실이라며 핀잔을 놓는다. 누군가는 술로, 매운 음식으로, 소소한 취미생활로 그 고통을 잊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리라, 버티리라 다짐하면서. 기어코 삶은 단맛과 쓴맛을 오간다.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때도, 거창하게 출발했던 계획이 초라하게 끝날지라도, 우리를 본뜬 술과 함께 말이다.


“이 다채롭고 사랑스러운 세상이여.

그 옛날 족장들의 시대처럼 어려움과 갈등이 있어도 지구는 내게 아름다운 곳.

나의 환상이 깨졌을 때 나도 남들처럼 고통으로 눈물 흘렸지.

그러나 환상은 현실이 아니고 저주받은 건 현실이 아니라네.

싸워서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너와 난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난 이 세상을 사랑하네.

태초에 그랬던 것처럼 어려움과 갈등이 있어도 지구는 내게 아름다운 곳.”

그래서 영화는 또 다른 ‘시작’으로 귀결된다. 실험의 실패와 친구의 죽음, 졸업이라는 끝과 맞닿은 그곳에서 이들은 톰뮈를 기억하며 술을 마시고, 새로운 출발을 내디딘다. 벤치에서 튀어 오르며 곡선을 그리는 몸짓처럼, 터지는 샴페인을 가로지르다 바다로 몸을 던지는 모습처럼. 달든 쓰든 삼키는 이 여정이 멋지지 않냐면서.

220407_한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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