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 공들여 행복 알기 🌸

🌸 공들여 행복 알기 🌸

김초희, 찬실이는 복도 많지

#2. 나는 네가 걱정이 된다.

 

영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어쩌면 영원은 비운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삶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잘 알잖니.

살아간다는 건 기차 선로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겠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찬실은 마흔 살의 영화 프로듀서였다. 평생 영화만 만들고 살 줄 알았는데, 함께 일하던 감독이 갑작스럽게 죽어버리자 일만 하며 살아온 지난 삶이 통째로 부정당한다.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일도 없는 신세가 된 그는 산동네 하숙집으로 이사 가 새로운 시작을 도모한다.

 

극중 화면이 두 번 열린다. 그중 첫 번째 개방은 영화가 시작한 지 2분도 지나지 않아 나타난다. 영화의 첫 장면, 4:3 비율의 화면 속 웅장한 술자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지 감독으로 끝을 맺는다. 이후 천 위에 가지런히 쓰인 이 영화의 제목,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함께 화면의 좌우가 활짝 열리며 새로운 장을 맞이한다. 이 2분의 도입부를 통해 영화는 우리를 찬실의 새로운 시작으로 안내한다. 그는 지금껏 해왔던 영화와 예술, 그리고 ‘예술 하는’ 영화감독의 종말이 있어야 본인의 것을 시작할 수 있다. 단절 직후 화면이 트이고 세상이 열리면 비로소 할머니와의 만남, 김영과의 만남, 장국영과의 만남이 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 조각난 만남과 이야기들을 풀질해 지속의 낙으로 만든다.

 

찬실은 친한 배우 소피의 가사도우미 일을 하다 영을 만나게 된다. 그는 소피의 불어 선생님이자, 단편 영화감독이자, 단편 워크숍 강사이다. 찬실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듯 보이나 (찬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감독님인)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지루해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재밌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날 밤의 실망이 우습게도 찬실은 영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데, 이들이 나누는 정가득한 대화를 살피다 보면 ‘영화를 대하는 영화인의 태도’라는 주제로 흘러간다. 영화 밖의 우리는 삶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고민하게 되고, 각자 구역만의 것들을 걱정하게 된다.(나의 경우 여섯 번째 글을 쓰는 여담의 태도였다.)

“영이 씨는 혹시 영화 안 하고도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영화보다 중요한 게 더 많죠. 사람들하고 함께 있는 거. 우정을 나누는 거. 사랑하고 사랑받는 거.

그런 것들도 영화만큼 중요하죠. 전 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영은 영화 하며 사는 사람이고, 찬실은 영화 아니면 못 사는 사람이다. 영화는 ‘이거 아니면 못 사는’ 태도, 그러니까 누군가의 인생에 뿌리내리고 있는 무언가의 가치를 들춰보는데, 찬실은 이 고민을 소위 ‘망하고’ 나서야 한다. 영 또한 그런 찬실의 질문을 듣고서야 생각해 본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은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소피와 영을 오가며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찬실의 길을 가다듬어 주는 것이 바로 간간이 등장하는 집주인 할머니의 말마디들이다. 엔딩 크레딧에도 별다를 이름 없이 그저 ‘할머니’라 올라와 있는 집주인 할머니는 돌아가신 찬실의 할머니이기도, 이제는 손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영의 할머니이기도, 이들 앞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는 할머니들이기도 하다. 할머니들은 삶의 해답을 다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할머니의 짧은 시구를 읽은 찬실은 문득 울음을 터뜨린다. 그 눈물은 어떤 감정의 폭발이고 어떤 의사의 표현이었을까. 슬픔도, 호소도, 자책도, 그리움도 될 수 있는 이 눈물에 마땅한 설명이 없는 것은 부언이 대수롭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 마음이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다고 생각하고 살수록 마음이 중요해진다. 오늘의 뜻과 지금의 마음과 무렵의 시간은 내일의 운동을 위한 양분이 된다. 이 신비한 관계는 할머니의 숙제를 돕는 거실과 딸의 방과 찬실의 셋방을 따라 흐른다.

 

그래서 찬실이는 복도 많다. 한순간 망해도 이사를 도와줄 후배들이 있고, 걱정해 줄 소피가 있고, 함께 식사할 집주인 할머니가 있고, 스쳐 지나갔지만 솔직하게 좋아했던 영이 있다. 그리고 멀리 우주에서도 응원하겠다는 장국영이 있다.

갑자기 나타난 장국영(이라 주장하는 귀신)은 자주자주 만나고 깊이깊이 생각하자 한다. “잘 된다”와 “잘 지낸다”라는 말이 다르듯, “아무거나 써도 된다”와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라는 말이 다르듯 ‘자주 만나고 깊이 생각하는 것’과 ‘자주자주 만나고 깊이깊이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작은 것에 정성을 들이고 애써서 사는 태도는 나에 대한 존중이고 삶에 대한 예찬이다.

 

재생바가 거의 끝에 도달해서야 화면이 다시 열린다. 두 번째 개방이다. 어두운 터널을 달리던 기차가 터널을 벗어나자 흰 눈이 가득 쌓인 선로가 펼쳐진다. 그 운행은 지나온 목격담보단 한창의 경험담이기 때문에 기차의 몸체나 돌아본 경치가 아닌 앞으로 뻗은 기찻길로 담긴다. 삶의 목격자는 따로 있지 않은가. 설광의 화면으로부터 출발한 빛은 이제 스크린 너머 극장에까지 닿는다. 영화만 하고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데 영화가 있는 거다.

 

#3. 나는 내가 걱정이 된다.

 

뤼미에르의 오즈의 놀란의 기차.

그리고 영사기 소리.

영화를 보는 건 즐거운 것일까 기쁜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즐거운 것일까 기쁜 것일까.

솔직해지는 것이 두려워서 일기도 안 쓴다는 겁을 기억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의 연속인 걸 알지 않니.

성장하고 시작할 수 있다면 그 불행도 행복이고 기쁨일 수 있겠지.

순간의 기쁨이 아닌 지속될 즐거움이었으면 한다.

220421_세림 보냄.

“찬실이는 복도 많지, 🌸 공들여 행복 알기 🌸”의 1개의 댓글

  1. 원래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였는데 여담 글을 읽고 역시나 이 영화는 누구나 좋아할 만하구나 라고 다시금 느꼈습니다. 사는 데 영화가 있다는 마지막 문장이 참 좋네요. 답장은 처음 남기지만 항상 좋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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