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아워, 🌌 우리의, 푸르던 🌌

블루 아워: 하루의 시작과 끝에 찾아오는, 푸르고 애매한 시간.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것. 제자리걸음으로 도망치는 것. 일상이 의문스러운 몰입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블루 아워〉는 그런 불편하고 초조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스나다’를 블루 아워에 내던져버리는 영화입니다. ‘기요우라’의 경쾌한 외침으로부터 시작된 여정임에도 따뜻한 위로나 나긋한 치유 따위는 바랄 새도 없이 죽음, 불안, 잔인, 소음 등이 끝없이 이어지죠. 그렇게 스나는 익숙해서 생경한 감각 한가운데서 지금껏 감춰 온 고향과 가족, 유년, 일기를 하나씩 들춰봅니다. 유쾌한 농담을 던지는 기요와 함께이지만 도무지 스나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이 영화는 모호한 감각을 향한 불친절한 안내서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푸른 이미지들을 잔뜩 늘어놓은 이 영화를 추천하게 된 건, 스나와 같이 유약하고 불행한 인물들의 손을 잡아 줄 사람을 기다리던 마음이 깃든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나가 기요라는 멋들어진 핑계를 앞세워 이바라키현으로 향했듯, 이 오묘한 감정이 예은의 글과 함께 완성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 우리의, 푸르던 🌌

하코타 유코, 블루 아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주말이면 아침인지 밤인지도 모를 시간에 일어나서 푸르스름한 우리 집을 구경하곤 했어. 마치 내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도 깨우지 않고 살금살금 걸어가서 거실을 한 바퀴 빙 돈 후에 다시 방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안심하면서도 들떴던 것 같아. 그 정돈됨과 고요함을 홀로 누릴 수 있으니 만족했고, 조금 후에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놀 수 있을지 궁리하는 설렘이 있었지.

돌아보면 그 순간의 감정들은 모두 내 것이었어. 그 어떤 거짓도 없이, 젠체할 것도 없이 솔직하게 온전한 내 것. 그런 경험은 지치지도 않고 꼭 한 번씩 나를 찾아오더라.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에 불과한데도, 자꾸 뭐라도 되는 듯이 돌아와서 나에게 물어.

지금 이게 맞아? 정말 맞아?

그럼 나는 금방이고, 조금 울적해져 버려.

방금까지 같이 자고 온 그 사람의 차에 카시트가 있을 때, 그놈이 공개석상에서 남의 입을 빌려 자기 부인의 둘째 임신을 알릴 때, 남편이 갑자기 어제 역 앞에서 본 고양이 얘기를 꺼낼 때, ‘대배우’를 어르고 달래서 겨우 ‘독백’씬을 마무리했을 때, 정작 들어야 할 사람은 없이 ‘개 경찰’을 무자비하게 외쳐 대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만취가 됐을 때. 망연자실한 시선과 당황함을 감추는 억지 미소도 저편에서 외치는 명랑함에는 허물어지고 말지.

“바보 같아” “죽었다” 그리고 이내 녹다운.

그렇게 직장에서도 결혼생활에서도 제대로 제동이 걸린 그의 앞에 뿅 하고 나타난 건, 위아래 하얀 점프 수트를 입고 자꾸 실없이 신나 보이는 기요야. 그래서 그랬을까? 스나는 모처럼 쉬는 날에 올라탄 그의 파란 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 할머니의 병문안이라는 훌륭한 계기와 기요의 능글맞고 떠들썩한 권유에 왠지 모르게 넘어간 거지. 그들은 누차 별 볼 일 없다던 지루한 그곳. 스나의 고향 이바라키현으로 향해.

도착한 그곳은 한순간 맑았던 하늘도 금세 어두워지고 대차게 비가 쏟아질 수 있는 곳이야. 퍼부어 내리는 빗방울에 몸이 다 젖어버려서 무겁고 찝찝해진 만큼, 왠지 모를 스나의 불안감과 불편함이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에 스며드는 곳이기도 하고. 그를 그렇게 비(非)적응자로 만들어버리는 건, 바로 자기 가족이야.

너는 ‘가족 신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믿지 않는 편이거든. ‘핏줄이니까~’로 시작하는 가정들과 ‘내가 널 낳았는데 널 모르겠니?’와 같은 확신들, ‘우린 가족이니까’로 퉁 쳐지는 그 모든 암묵적 합의에 항상 드는 반감이 있어.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저질러지는 섣부른 판단과 무례함을 너무 쉽게 정당화하니까. 스나네 집은 그런 지점들을 참 명확하게 보여주지. 그들이 함께 있는 장면은 관계 내 존재하는 경계심과 낯섦을 자꾸만 드러내.

결국 자기 할 말과 행동만 하다 본인의 질문에 답하면 ‘안 들린다니까’를 시전하는, 늘 웃으면서 그렇게 핀잔을 주는 엄마. 동물 박제품과 휘두르는 진검만큼이나 위협적인 말투로 무턱대고 죽음을 논하며, 우는 아이의 뒤통수를 갈기는 무자비한 아빠. 재미없는 농담이랍시고 영 변태스러운 말을 내뱉거나 주춤대고 하는 말들의 저의를 알기 힘든 오빠까지. 직설적인 말투와 푸념 섞인 한 마디, 이해할 수 없는 과격한 행동들이 스나를 얼마나 움츠러들게 하는지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아.

이들에게 스나는 도무지 마음을 붙일 수가 없어 보여. 자꾸만 도망가려 하거나 작은 목소리로 용케 답하다가도 차라리 입을 다물지. 그럴 때마다 생각하게 되더라.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하는 법을 배워 지금의 스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지내고 지새웠을까. 그래서 온갖 음담패설로 자욱한 공간 중에 의례적인 웃음을 보인 그에게, 추하다면서 습관이 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은 너무 잔인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 이런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게 본인의 선택이라 해도 결코 자의에 의한 것만은 아닐 테니까.

그렇게 마음이 조금 안 좋아지려 할 때마다, 기요의 존재는 불쑥불쑥 눈에 들어와. 그런 스나의 곁을 지키는 기요는 유일하게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누구보다 이 귀성을 즐기는 모양이야. 그는 궁금한 것도 많고 넉살도 좋아. 덕분에 스나의 애물단지 공책은 두 사람의 웃음 코드가 되고, 어디서든지 스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기요는 일단 반응하고 봐. 가릴 것 없이 유쾌하지. 그래서 스나는 무엇이든 넉넉하게 대하는 그에게 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어.

과거의 살아있음에 대해서. 자신에게 잔인했던 순간과 자신이 잔인했던 순간을. 그리고 아직은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할 때라 날 것으로 남아있는 그 감각들을. 또 어떤 죽음들에 대해서. 할머니의 말처럼 살려고 발버둥치고는 있지만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죽음은 예기치 못한 것이거나, 그냥 지나쳐 왔거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이지. 아마 떠올랐더라도 차마 내색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과 생의 어두운 단면이었을거야.

근데 기요는 그냥 덤덤히 대답해. 원래 모두가 죽는다고. 그리고 말해줘. 마침내 할머니의 손톱을 깎아주며 사랑했던 사람이 삶의 끝에 놓인 모습을 대면한 스나에게. 이해할 수 없지만 한때 부대껴 온 엄마의 모습을 찍어주기도 하며,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 보고 ‘안녕’이라 말할 수 있게 된 스나에게. 그로 인해 당장의 울음과 웃음을 같이 터뜨리며 자신이 촌스럽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진짜 바보네요. 스나 씨, 원래 촌스러워요.

촌스럽다는 거 괜찮지 않아요? 진짜 살아있는 것 같고.”

형언할 수 없는 푸른 공기. 온전히 소유할 수 있을 시공간이 주어지는 블루 아워에 스나는 무서울 것 없이 앞으로 앞으로 내달려. 그때 느낄 수 있던 해방감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자신만이 알 거야. 다시금 주어진 블루 아워에 달려보는 스나는 이내 멈추고 말아.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손을 흔드는 기요가 보여. 여기까지 함께해준 그는 진짜 알록달록한 소리로 찾아오는 도깨비였을까? 아니면 스나가 상상한 또 하나의 자아였을까? 그것 역시 자신만이 알 거야. 무엇이 되었든 이제는 다시 살아가야만 해.

세련되고, 능숙하고, 숨죽여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그간 놓치고도 애써 무시해 온 감정과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주워 담아봐. 어떻게 사람이 속으로 삭이고만 살 수 있겠어. 가끔은 실컷 소리를 내지를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지. 내일 먹을 빵 좀 사다 달라는 말에 나는 아침에 밥이 좋다고, 된장국도 필요하다고 한껏 외쳐보는 스나처럼. 눈물과 콧물이 섞인 그 괴성이 참 별로라 생각될지라도.

그래서 다음에 이 영화를 보게 되면, 그때는 소리를 한껏 키워서 볼 거야.

〈블루 아워〉를 다시 찾고 싶어진 순간의 그 마음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

사슴의 일족 – 清く、ただしく(깨끗하고, 정직하게)

너의 블루 아워에게도 ‘안녕’을 전하며,

220616_예은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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