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진짜 왜 저래?
이경미 감독이 “양미숙은 왜 그럴까?”를 되뇌며 썼다는 장면들을 보며 질문한다. 〈미쓰 홍당무〉는 그런 영화다. 미숙의 무한 삽질은 어이가 없다(피식). 그보다도 더 나가는 종희의 과감함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또 피식). 여기에 유리까지 합세하고 나면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공기 빠진 웃음이 계속되는 그런 상태) 그런데 그 사이에 아까의 질문은 살짝 변형된다. 도대체 미숙이는 왜 저럴까? ‘미숙이’가 들어오고, ‘왜’에 방점이 찍힌다. 그를 이해해 보고 싶어진다. 붉은 얼굴에 자꾸만 성을 내는, 양 양이 궁금해진 것이다.
마냥 재밌는 영화인 줄 알았다가 곳곳에 배인 신랄함에, 마음 한구석이 영 켕겨서 누군가의 글을 읽고 싶었나 보다. 이 이상한 영화가 주는 복잡함을 극복하고 용케 자기 얘기로 풀어낼 솔직한 문장들이 그리웠다. 그래서 어떡하나? 유안에게 맡길 수밖에. 조금은 짓궃을지 몰라도 용기 내서 요 괴짜들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넘긴다. 미리 고맙습니다! 하고 건네는 우렁찬 감사 인사와 함께. 반가운 말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 미운 우리 홍당무 🥕
이경미, 미쓰 홍당무
예은의 추천작 중 〈미쓰 홍당무〉는 정말 골때리는 영화였다. 황당하고 황당해서 실소가 나오고, 육성으로 ‘이게 뭐야?’, ‘왜 이래?’ 하게 만드는 영화. 그래서 〈미쓰 홍당무〉를 고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자꾸 미숙의 홍조가 생각났다. 그래서 영화를 또 봤다. 미숙이 안쓰러웠고, 계속 눈에 밟혔다. 그래서 또또 영화를 봤다. 미숙이 사랑스러워 보였고, 종희, 유리, 은경 한 명 한 명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나는 〈미쓰 홍당무〉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내가 너무 창피해
미숙에게 안면홍조증은 평생의 콤플렉스다. 병원도 꾸준히 다니고, 시술까지 받았는데. 조그마한 자극에도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러나 미숙이 사는 세상에서 ‘홍당무’는 그리 관심받는 존재가 아니다. 이를 특별히 의식하는 사람은 없다. 미숙의 홍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상징하듯 미숙이 다니는 병원의 피부과 의사조차 일방적인 상담의로 전락해버렸으니 말이다. 관객인 나도 제목을 의식하고 보던 초반을 제외하고는 그 빨간 얼굴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미숙은 아니다. 미숙의 머리는 커튼을 친 것처럼 항상 닫혀있다. 그 커튼을 걷어보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참다 참다 폭발해버린 날들이 있다. 그러나 참다못해 앞을 가리는 것들을 넘으려 점프를 해봐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런 미숙을 찾고 그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서종철뿐이었으니, 어쩌면 미숙이 서 선생에게 집착하게 된 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양 언니도 사람인데! 양 양도 사람인데!
미숙은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는 사람이다. 내 주위에는 제발 없었으면 하는 사람. 사랑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한다. 그래,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 거!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이렇게 나한테 안 했을 거면서! 미숙은 자신을 되돌아볼 줄 모른다. 자신이 받는 시선들이 ‘내가 나라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은 ‘사람이니까’ 하지 않을 상식들이 미숙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미숙의 행동에 ‘왜 그랬어?’를 던지는 사람은 없다.
이쁜 것들… 다 묻어버리고 싶다!
이유리만 없었다면! 이유리만 없었다면! 이유리만 없었다면!
유리 선생은 미숙의 열등감을 지속해서 건드리는 존재다. 이쁘고, 같은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덕분에 미숙이 고등학교 선생 자리에서 밀려나 새벽 영어학원을 다니며 중학교 영어를 가르치게 만든 여자. 미숙이 사랑하는 서 선생님과 진짜 썸씽이 있어, 꼬투리 하나에도 오만가지의 의미를 부여하는 미숙과 달리 서종철의 와이프가 집까지 찾아오게 한 그런 사람. 미숙은 유리 선생에게 ‘남자들은 그냥 모든 게 그냥’이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헷갈려 죽네 마네 하는 사람은 미숙처럼 보인다.
물론 완벽하게만 보이는 유리에게도 고충은 있다. 그에게는 태생적인 외로움이 있다. 장 선생과 양 선생이 늦은 밤에 전화를 걸어도, 서 선생과 썸씽이 있어도, 유리의 외로움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아직 순수함과 순진함을 가진 유리가 남자들의 마음을 받아주면, ‘정확히 2개월 15일 뒤에’ 모두 떠나가 버린다. 그 외로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양 언니와 서종희의 계략에 속절없이 넘어가 버린 건.
찐따와 찐따 애인
미숙과 종희의 연합은 이유리를 엿먹이기 위해 탄생했다. 왜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가. 같은 것을 좋아할 때보다 같은 것을 싫어할 때 더 깊어지는 법이라고. 미숙과 종희는 이유리를 싫어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목표가 있다면 이유리를 서종철에게서 떼놓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둘을 보고 ‘찐따’와 ‘찐따 애인’이란다.
찐따와 찐따 애인은 마치 썸을 타는 것 마냥 서로에게 스며들고, 서로를 시험하기도 한다. 작전의 일환으로 시작한 연극이지만, 막상 연극을 안 하게 되니 서운하다. 우리가 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나와 연극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속상하다. 너도 내가 창피해서 나랑 같이 공연하기 싫은 거지! 선생님도 내가 싫은 거잖아요! 결국 얼굴에 핏자국 스크래치를 나란히 새기고 찐따 커플은 연극으로 돌아간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소.’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천만에.’
‘아니, 정말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을.’
‘아니, 정말 고맙습니다.’
‘원, 별소리를 다 하는군.’
아빠는 태어나기 전, 엄마는 어릴 때 돌아가신 미숙은 이제껏 마음 붙일 곳 하나 없이 살아왔다. 종희 역시 아빠의 외도와 소원한 부모님의 관계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상처받아왔다. 그런 둘에게 서로는 처음으로 외로운 밑바닥까지 보여준 사람이자, 그런 밑바닥까지도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
2번 새 출발로 하겠습니다!
사랑에 눈멀어 파국을 향해 달려가지만, 처음으로 미숙의 인생에도 ‘왜?’를 물어봐 줄 사람들이 생겼다. 내 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얘기를 들어준다. 심지어 종희는 아빠 대신 내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정해진 방향 없이 악셀을 밟거나 급정거하기만 했던 미숙에게 서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란다고 다 해요? 얼굴을 가리던 커튼을 열어젖혀 질근 묶고, 명상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정해본다.
미숙과 엮였던 모든 사람은 강제적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서종철을 버리고 변 선생과 새 출발을 하게 된 유리 선생, 이혼이든 재결합이든 새 출발을 하게 될 성은교, 그리고 어쨌든 서종철까지. 새 출발은 미숙만 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 떠날 마음이 안 나는데?’
‘그게 인생이죠!’
‘그래도, 고맙습니다!’
이런 대환장 골때리는 찐따 커플은 앞으로 두려울 것이 없다. 이전에는 나만 미워한다며 한탄했을 일에도 이제는 나의, 우리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을까 행복한 고민을 한다.
아, 난 이제 뭐 하면서 살지?
‘박찬욱’ 원장님을 쫓아 전국으로 여정을 떠난 찐따 커플이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을 벌이고 다닐지 생각만 해도 이마를 짚게 된다. 하지만 또 그 여정이 궁금해지는 건 왜일까. 미운 놈들 떡 하나 더 준다는 마음으로 어느새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난 네가 참 마음에 든다!
〈미쓰 홍당무〉는 주인공을 재탄생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끔 만든다. 그게 이경미 감독이 그리는 여자들의 특징이다. 차분하고 청순했던 미디어 속 전형적인 여성상과 달리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비호감만 쌓기도 하고, 쌍욕을 내뱉기도 하는 그 캐릭터들이 결국에는 사랑스럽게 보인다.
미숙이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왜 저래’만 나오게 만들어도, 내가 만약 저 세상 속 사람들이라면 그들과 똑같이 미숙이를 대했을지 모른다 생각하게 만들어도. 아무리 뒤통수를 맞아도 결국엔 미숙을 안아주는 유리처럼, 등짝 한 대 때려주고는 끌어안아 보듬어주고 싶게 만든다. 모두가 미숙이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미숙이 같은 챙피함은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를 너그럽게 봐주고 싶다.
220623_유안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