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환상[ 환ː상 ]
1. 幻想: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2. 幻像: 사상(寫像)이나 감각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보이는 환각 현상.
3. 喚想: 지나간 것을 돌이켜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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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캔버스 위에 목탄을 쥔 손들이 움직인다. 조심스레 그려지는 선도 있는가 하면, 대담하게 그어지는 선도 있다. 윤곽선, 다음은 실루엣. 각기 다른 눈들이 바삐 움직이며 데생에 몰두하는 동안 사각거리는 소리 사이로 피사체의 목소리가 들린다. “날 천천히 관찰해.”
그의 말에 따라 멈춰 선 카메라는 한 여성을 주시한다. 그리고 여전히 미동 없는 자세 위로 서서히 드러나는 감정의 동요를 포착한다. 그의 시선은 아주 오래전에 직접 그렸다는 그림 한 점으로 향해있다. 달이 비치는 드넓은 들판 위, 불붙은 옷자락을 뒤로하고 홀로 걸어가는 한 사람. 그곳에 가까워지는 동안 한 학생이 묻는다. “제목은요?”
클로즈업되는 화면의 대상이 바뀐다. 그림과 마주한 듯한 상태로 여성이 답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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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 깨트리기
오프닝 시퀀스에서처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세심한 관찰을 통해 어떤 여성들의 상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수많은 시대극이 답습해온 전형성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속단되는 보편성으로 여성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악습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남성’의 존재감을 지운 것이 이를 가능케 했다. 다양한 주인공을 손쉽게 꿰차며 여성에게 고백하고, 명령하고, 존재의 입증을 요하면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원하던 이들은 완전한 보조 인물로 전락한다. 그들은 그저 짐꾼, 모종의 결혼 상대, 관람객일 뿐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지금까지 쉽사리 조명되지 않았던 여성들이 차지한다. 18세기 중후반 무렵의 여성 화가 마리안느는 역사상 존재했던 어느 무명의 여성 예술가 중 한 명을 대변한다. 가업을 물려받아 허락되는 기준 하에 요청받은 그림을 그리는. 그리고 싶은 그림은 몰래 그리고, 출품하고자 하는 그림엔 아버지의 이름을 쓰는 화가.
그러나 영화에서만은 그의 화법과 작품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 영화 속 화구를 잡은 손과 마리안느가 그려내는 화폭들은 모두 엘렌 델메어(Hélène Delmaire)의 것이다. 덕분에 실제 여성 화가가 취하는 스타일, 유화를 그릴 시에 거치는 배경 칠하기, 밑그림 그리기, 덧대어 채색하기 등의 현장을 볼 수 있다.
한편, 부탁받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브르타뉴(Bretagne)에 도착한 마리안느는 백작 부인, 엘로이즈, 소피를 만난다. 부인은 밀라노로부터 자신보다 먼저 바다 건너 보내진 초상화 덕에 결혼 후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실패한’ 첫째 딸과 달리 엘로이즈의 결혼을 성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던 앳된 모습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지루함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곳으로.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언니의 죽음으로 ‘운명’을 대신하러 이곳에 왔다. 갑작스러운 사과 편지와 함께 “평등이 주는 안락함”과 자유로운 문화생활을 버려야 했던 그는 슬픔보다는 분노를 느끼고, 죽기보다는 달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특유의 고집스러움으로 포즈 취하기를 거절하며 앞선 화가를 돌려보냈는데, 이번 화가에게는 자신을 그릴 기회도 주고 자신의 마음도 준다.
결혼이 내정된 자와 결혼할 필요가 없는 두 사람의 만남. 서로를 바라보는 숏과 리버스 숏의 뒤에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만이 존재한다. 레즈비언의 관계를 그리는 가운데 이성애 중심적인 페티쉬는 개입할 틈이 없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요부나 성녀가 아니기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창조한다. 우리는 키스를 하면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애무의 절정에 이른 것 같은 눈동자를 끝으로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 이 연인을 그저 관조할 뿐이다.
그동안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사회 내 수직적 위계 조성 등, 영화에서 무리 없이 전유 되던 남성적 시선(male gaze)으로부터의 탈피는 전통적 ‘하녀’의 모습이 지워진 소피의 서사에서도 이뤄진다. 호칭과 높임말 없이 맺어지는 세 사람의 관계성. 수를 놓는 소피 옆으로 와인을 따르는 손님 마리안느와 식사를 준비하는 저택의 주인 엘로이즈가 차례로 위치하는 장면은, 위계가 소거된 이들 간의 균형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세 사람은 카드놀이를 할 때도, 한밤중에 책을 읽으며 토론할 때도, 소피가 임신중절을 결심한 후의 과정에도 함께한다. 소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거추장스러운 구도가 지워지자 ‘자매애’와 ‘연대’로 불리는 관계가 또렷해진다. 어느 하나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풍경이다. 여성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특히 오늘날에 까지도 여성의 인권과 생명권 사이에서 빈번하게 갈등을 빚는 임신중절은 영화에서 결코 소란하지 않게 그려진다. 원하지 않기에 낳지 않는 소피의 선택은 어떠한 사회적 평가 없이 담담하게 지나간다. 고통을 참는 그의 손과 눈물이 고인 눈은 곁에 누운 아기가 어루만져준다. 엘로이즈의 제안으로 재현하는 생의 한 장면은 마리안느를 통해 검소한 풍속화로 남게 된다.
빼곡하게 자리 잡은 여성들의 서사는 스스로 선택한 움직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배경음악이 전무한 상황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여성들의 아카펠라는 거대한 울림 속에 더 많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구전에서 벗어나 더 많이 기록되어야만 할 것이다. 구체적인 그 삶의 모양들이 ‘여성’이라는 망상을 깨트리고 여성을 그려낼 수 있을 때까지.
환영으로 남지 않는 사랑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상(像)과 동(動)으로 가득하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매만지며 상대에 도달하기를 반복한다. 감독은 그 미묘한 시도를 재현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 충분한 지연과 충분한 교감이 영화 안에서 이뤄지며 낯빛과 숨결을 통해 드러나는 정동을 붙잡는다. 그리고 이 실존하는 사랑의 감각은 그림으로 기억된다.
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방인이다. 산책 친구와 초상화의 주인공. ‘그’에 관해선 전해 들은 것이 전부인 상태로 시작한 첫 만남은 종잡을 수 없다. 안갯속을 앞서 걸어가는 동안 벗겨진 베일은 저 절벽 끝으로 갑자기 내달린 낯선 얼굴을 드러낸다.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느껴지는 흘긋거림만큼이나 이상한 조우다.
눈은 나 이외의 다름을 인지하는 첫 번째 수단이다. ‘본다’는 행위를 통해 얻는 이미지로 어떤 파악하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세히 보지 않고는 기껏해야 금방 사라질 잔상만 붙잡을 뿐이다. 마리안느 역시 그랬다.
응시 – 마주침 – 황급히 거두는 시선 – 돌리는 고개 – 다시 응시. 그는 이 어긋남을 반복하는 말동무가 되어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은 대상을 그려야만 했다. 하루 한 번의 짧은 만남에서 살핀 엘로이즈는 캔버스 위에 조각조각 나누어져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에 웃는 것도 못 봤다는 작은 푸념을 늘어놓자, 소피는 ‘웃게 해줘야 한다’고 대답한다.
정성을 들인 시선으로 문을 두드리기. 이제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굴을 훔쳐보는 대신, 먼저 다가가 마주하고 대화하기를 택한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수녀원에서의 생활, 결혼 시기를 묻는 말이 경계심과 정적을 사이에 두고 줄타기하듯 오간다.
두드림에 대한 응답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표지도 눈이다. 엘로이즈의 시선이 옅은 미소와 함께 자유해진 것은 ‘살아있는’ 음악을 피아노로 설명하려는 마리안느 옆에 앉았을 때다. 그의 손가락, 표정, 말투로부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마리안느에게 “처음으로 키스하고 싶었던 순간”이 바로 이때였을까.
성당에서 돌아와 마리안느의 빈자리를 언급하고, 화가라는 그가 자신의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고백했을 때 굳이 바다로 들어갔던 건, 수영만큼이나 아직은 모르겠는 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 확인하고자 했던 태도였을까. “그래서 날 봤군요.”
마음을 먹은 듯한 엘로이즈는 이 관계를 전복시킨다. 피사체의 권한으로 초상화는 다시 그려진다. 발그레한 볼과 살며시 머금은 미소 대신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이 담기길 원한다. 결혼 적령기에 합당한 모습 대신 마리안느의 눈에 잡히는 모습이길 원한다. 숨김없는 관찰로 상대를 알아가는 시간.
이를 위해 반대쪽을 볼 때, 그 깊은 시선은 비단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다. 당황스러울 때는 입술을 깨물고, 화가 날 때는 눈을 깜빡이지 않는 엘로이즈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이마를 만지고, 평정심을 잃으면 눈썹이 올라가는 마리안느는 동등한 위치에서 포착된다.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여러 번의 시선과 기나긴 눈 맞춤의 시작. 웃을 때도 궁리할 때도 집중할 때도 주저하지 않고. 치마 끝자락에 붙은 불보다도 홀린 듯이 쳐다봤던 건 서로의 존재였다. 거울보다도 또렷하게 남기고 싶었던 것은 당장 마주한 서로의 모습이다. 헤어지기 바로 전날 기억하기를 다짐하며 연신 주시했던 것은 서로의 눈동자였다.
단 한 순간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듯이. 오랫동안, 자세히 봄으로써 영원하게 되새겨질 잔상. 수십 번 수백 번을 바라보며 나에게 맺히는 당신이라는 상은, 이 영화에서 사랑을 영위하는 한 형태가 된다.
손
어느 날 밤, 손에 든 등잔으로 낯선 이의 손에 의해 미처 완성되지 못한 엘로이즈를 비춰보다 이내 그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이후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 잠식되는 그림을 보면서 마리안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 손으로 불꽃을 심은 그 순간,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고 다짐했을지 모른다. “사랑에 빠진 적 있어요?”
영화는 사랑에 ‘빠지고 있는’ 자에 대한 또 하나의 대답을 손을 통해 제시한다. 손은 타자에게 직접적으로 가닿을 만한 여지를 준다. 손을 잡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손이 스치는 것과 같은 행동들은 친밀감을 표하며 상대를 헤아릴 수 있게 한다. 그 용기가 아직 부족할 때. 혹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촉각이나 시각 어느 하나에도 매몰되지 않고 대상을 인지하고 싶을 때, 손은 그림을 그린다.
화구를 쥔 마리안느의 손도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신중함과 깊은 망설임, 그리고 결정하기까지의 흔적이 그의 그림에서 비롯된다. 부탁받은 그림이 아닌 엘로이즈를 담은 그림이 나오기까지 장장 1시간 정도가 걸렸다. 러닝타임의 절반에 이르고 나서야 등장한 것을 염두할 때, 사랑에 대해 그가 느꼈을 무게가 새삼 전해진다. 그리고 그 무게감에 대한 마리안느의 대응은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잠든 모습은 유약한 촛불 아래 작은 스케치북 위 애정 어린 선들로 묘사된다. 초상화를 그리는 손은 겹겹이 쌓아가는 붓질이 멈추기 전까지 지금의 엘로이즈를 표현하기 위해 완벽을 기한다. 손안에 든 엘로이즈의 상반신이나, 그의 몸 앞에 세워진 거울을 보며 그리는 자화상은 그리워할 서로의 모습을 위해 즉흥적으로 남겨두는 징표이다.
이후 마리안느는 불길 속 쓰러진 엘로이즈에게 황급히 다가가 내미는 손으로, 거친 해안 길을 거닐며 잡아주는 손으로 점점 더 커져가는 마음을 표현한다. 서로의 얼굴과 몸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손은 그에 대한 엘로이즈의 대답이자 둘 사이의 깊어진 신뢰를 의미한다.
비록 그것에 끝이 있을지라도. 절로 향하는 눈만큼이나 손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곧 떠나갈 애인에게 차마 결혼하지 말라 말하지 못한 심정을, 그럼에도 붙잡고만 싶은 이 무너지는 심경을 두 손으로 붙들고 고백한다. “용서해 줘요. 날 용서해 줘요.”
이와 같은 감각들의 축적은 결코 잊지 못할 사랑의 원형이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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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가 돌아본다. 이번에는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고 마는 형체가 아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가 말했다.
“뒤돌아봐.”
오르페우스의 신화 속 에우리디케처럼 나타났던 엘로이즈의 환영은 마리안느에게 두 번이나 목격되었다. 첫 키스 후 그를 잃을 것만 같던 조바심에 시달릴 때, 거의 완성되어가는 초상화에 다가올 이별을 체감할 때. 포옹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로부터 도망치듯 달아나는 마리안느를 엘로이즈가 불러세운다. 두려움은 둘만의 시간을 추억하는 것으로, 그리움은 서로를 위해 뒤돌아보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남기기 위해.
기억할 사람과 기억될 사람. 이제는 잊히지 않을 시선이 찰나에 맞닿는다.
환상-하다
“그녀와 처음으로 재회했다.” 마리안느는 전시회장 속 한 그림을 통해 엘로이즈를 다시 만난다. 어렴풋한 미소를 짓고 딸로 보이는 아이와 손을 잡고 있는 그는, 오른손 검지로 연인이 새겨진 28쪽을 내보이고 있다. 당신을 여전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이를 찾아낸 마리안느 역시 엘로이즈를 기억하고 있다.
마침내 진실을 밝혔을 때, 한 겹 한 겹 입고 있던 옷을 벗어놓고 파도치는 아득한 바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던 뒷모습을. 뜨거운 모닥불의 열기와 함께 일렁이던 형상에 옮겨붙어 타오르던 불꽃을. 엘로이즈들을 집약한 풍경화의 한쪽 끝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은, 이 사랑을 영원히 비추겠다는 듯이 한밤중을 은은한 빛으로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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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회상으로 시작하여 회상으로 끝맺는다. 마리안느가 상기한 부분들이 영화의 줄기를 이루며 이어지는 동안 기억의 현상現像은 계속된다. 그리고 이를 그 질감에 가깝게 담아내는 클레르 마통(Claire Mathon) 감독의 카메라가 있다. ‘떠올린다’는 시도에서 오는 불완전함과 각 시도를 반복하며 각인됐을 인상을 존중하고, 그 자체를 아름답게 구현하기 위한 노력들.
거칠고도 드넓은 바다, 깎아내린 듯한 절벽과 오랜 시간을 견뎌온 것 같은 암석, 우거진 억새를 배경으로 할 때는 그곳에 놓인 인물들의 모습을 함께 조망한다. 대상을 화면 가운데에 위치시키며 전개하는 숏들에 햇빛과 촛불이 더해지니 명암과 색조가 살아있는 한 폭의 고전적인 유화 작품 같다.
여기에 직접 등장하거나 해당 장면의 시점을 제공하는 마리안느는 이 영화의 초점 화자다. 함부로 설명하지 않고 지켜보는 구도를 통해 그의 회고를 따라가는 것 말고도, 가끔 엘로이즈가 렌즈를 뚫고 우리를 곧바로 보는 것 같을 때마다 마리안느의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장면 간 전환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점프 컷과 고정된 화면에서 천천히 이뤄지는 줌인은 파편처럼 남아있는 기억 속 응축된 것들을 표현한다. 엘로이즈와의 만남과 이별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이 미묘한 박자의 흐름은 조금씩 변화하는 관계와 그 가운데 일어난 감정의 고조, 낙차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정점에 이르렀을 때, 마리안느의 환상이 끝나고 엘로이즈의 환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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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녀를 봤다.”
무대를 제외한 채, 제법 어둑하고 약간은 소란스러운 공간 중에 제 자리를 찾아 한발씩 내디디며 들어간다. 남자, 남자, 여자, 남자, 다시 여자. 끼리끼리 앉은 틈에 홀로 앉은 마리안느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그를 발견했다. 저 건너편에 똑같이 차버린 좌석들을 지나 자신처럼 한발씩 내디디며 홀로 들어가 앉는 엘로이즈. 마리안느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엘로이즈에게 점점 다가가는 동안,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의 3악장을 듣고 있는 표정이 더 세세하게 붙잡힌다. 2분 26초 내내 연신 숨을 크게 내쉬면서 눈을 떴다가도 감고, 눈물을 보이다가도 말로 설명 못하는 소리들에 집중한다. 폭풍우가 치는 동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터뜨린 울음이 품은 미소와 벅차오름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도 지금 마리안느를 보고 있다.
“사랑에 빠진 적 있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어요. 바로 지금이라고.”
(…)
“기억할게요.”
두 여성의 스침이, 그 속에 깃든 사랑이, 한없이 끝없이 짙게 파도친다.
220901_예은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