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한 줌의 시간이라도 함께 굴러가자 👀

🪨 한 줌의 시간이라도 함께 굴러가자 👀

다니엘 콴·다니엘 쉐이너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지난날들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그날, 미국의 한 코인 세탁소 역시 파티 준비로 정신없다. 빛나지 않는 원색의 홍등이 천장을 메우고, 붉은 옷을 입은 몇몇 이들은 신년 축하 노래를 부른다. 본국은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 물리적 거리만큼 조촐하지만 구색은 갖춘 행운의 적(赤)색이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붉은 종이에 거꾸로 박힌 글자 복(輻)처럼 이번 해는 부디 성공과 감축의 해가 되기를. 아메리칸-드림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세탁소 세무조사가 무탈하게 끝나기를. 앞으로도 남편과 딸내미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꾸려 아버지 앞에서 떳떳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붉은 스웨터를 입은 한 여성이 소음을 뚫고 딸에게 달려간다. 비록 모든 통계적 필연성을 경험하다 못해 삶의 덧없음까지 깨달아버린 그가 자신의 소망을 잃고 돌멩이가 되었을지라도. 불확실한 다정함에 한 번 더 기대어, 한 줌의 시간이라도 좋으니 함께 계단도 오르고 절벽도 구르자면서. 에블린과 조이가 부딪힌 순간 그곳의 적(赤)은 성공보다는 나란히 걸어갈 존재에 대한 축하의 의미가 된다.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는 거야?

엄마의 딸의 모습이… 안 이런 곳.

이곳은 그래 봐야…

상식이 통하는 건 한 줌의 시간뿐인 곳이야.”

“그럼 소중히 할 거야 그 한 줌의 시간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괴상한 방식으로 평행우주를 오가는 SF 영화이자 한 동양인 이주 여성을 중심으로 3대 공동체의 화합을 그리는 가족 영화이다. 악을 물리쳐 인류의 평화를 도모하는 전형적인 영웅담을 기대했다면 이 영화는 매우 낯설고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대 멀티버스 세계를 위협하는 빌런 조부 투바키가 다름 아닌 주인공 에블린의 딸 조이이기 때문이다. 제거가 아닌 이해의 방식으로 조부와 맞서는 에블린의 모습 역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대의를 추구하는 영웅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에블린은 그저 조이에게 달려갈 뿐, 세상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구원된다.

 

다른 세계에 접속하는 버스-점프의 설정값이 통계적 필연성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점 역시 기묘하다. 영화 속 전투 능력은 립밤을 씹어 먹거나 손가락 사이로 네 번 종이에 베이는 행동, 바지에 오줌을 지리거나 코를 물고 바람을 부는 방식을 통해 발현된다. 우스워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유약한 웨이먼드가 눈빛이 형형한 웨이먼드가 되고, ‘최악’의 에블린이 소지(小指)의 힘으로 의자 다리를 구부리는 강력한 에블린이 되기 위해선 말이다. 그러나 이 기이하고도 터무니없는 상상력이 에블린을 둘러싼 혈연과 사랑 이야기에 덧대질 때 영화는 관객에게 기상천외한 울림을 선사한다.

혈연

피는 강력한 결속의 매개이자 치명적인 결핍과 상처의 원인이 된다. 조이에게 엄마 에블린과의 관계는 피로 맺어진 타의적 인연이다. 낯선 미국 땅에서 악착같이 세탁소를 운영하며 나를 낳고 키워준 엄마. 만날 때마다 살쪘다는 잔소리나 늘어놓는 사람. 자신의 여자친구 베키를 친한 친구라며 에두르는 편견 가득한 인물. 여느 자식처럼 조이 역시 에블린의 무한한 애정과 기대에 부응한 삶을 살거나 그의 모난 모습까지 이해하고자 노력했을 테다. 그러다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라며 에블린을 원망하거나 슬그머니 피어나는 불안감에 길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가족을 상징하는 돼지 문신처럼 조이에게 에블린은 피부에 각인할 만큼 소중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런 존재이다. 

 

알파버스 속 조이는 알파 에블린에 의해 정신의 극한까지 내몰린다. 버스-점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는 최고의 실험체가 되어 모든 세계의 조이로 확장한다. 에블린의 ‘나의 조이’는 곧 알파 조이이자 멀티버스를 위협하는 인물인 조부 투바키가 된다. 인간을 손쉽게 종이 꽃가루로 만들거나 죽이 되도록 때리는 무서운 빌런이지만 에블린의 편견 섞인 말에 ‘여자 좋아하는 게 아직도 그렇게 거슬리냐’며 반박하던 모습은 에블린과 우리가 알고 있는 딱 ‘나의 조이’처럼 보인다.

한편 에블린은 대 멀티버스를 수호할 임무를 시작한다. 첫 번째 설정값은 그리도 본인을 괴롭히던 세무관 디어드리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외치는 것. 이를 시작으로 에블린은 무수한 삶의 갈림길에 들어서며, 다양한 인생과 조우한다. 특히 버스-점프 과정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갈림길은 웨이먼드와 함께 가족의 곁을 떠나던 젊은 시절의 에블린이다. 지금의 남편과 함께 떠나지 않은 에블린은 무술을 연마해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거나, 노래의 재능을 한껏 펼치는 가수가 된다. 셀 수 없이 많은 실패와 포기를 거쳐 완성된 지금의 에블린에게 그 시점은 무궁무진한 삶의 결정적 분기점인 셈이다. 자신을 붙잡지 않은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웨이먼드와 함께 떠난 자신에 대한 한탄의 시작점도 바로 그곳이다. 야속하게도 그때 아버지의 매서움과 닮아있는 이는 다름 아닌 현재의 에블린이지만 말이다.

 

조이 입장에서 에블린은 못난 엄마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집과 오기는 에블린만의 생존 방식 중 하나다. ‘그’와 ‘그녀’를 제대로 구분해내지 못하는 서툰 영어 능력만으로 그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미국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벌레 한 마리도 쉽사리 죽이지 못하는 남편과 함께 코인 세탁소를 운영해야 했고, 성공의 척도인 대학에 조이를 보내기 위해 뒷바라지했으며, 이제는 아버지까지 부양해 살아가야 한다. 혹독한 세무조사를 앞두고 있음에도 베키와 조이의 도움 없이 어떻게든 부딪혀보고자 하는 모습은 에블린 특유의 억척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에블린의 면모는 조부 투바키와 비슷한 존재가 되는 방식으로 그에게 대항하겠다는 결심을 가능케 한 요소이기도 하다. 에블린은 자신의 한계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투사라도 된 양 어떻게든 할 수 있다며 온갖 곳에 버스-점프한다. 그는 라따구리와 경쟁하는 레스토랑 셰프가 되기도 하고, 피자 광고판을 능숙하게 돌리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인류 초기 핫도그 손가락 유전자가 승리한 멀티버스에 침투해 디어드리와 사랑을 나눈다. 조이가 그러했듯 에블린 역시 온갖 통계적 필연성을 경험한다. 그 모습을 지켜볼 때면 그의 무한한 잠재력과 삶의 가능성이 저주처럼 느껴진다. 이 일련의 시도는 지금의 에블린이 최악이라는 사실의 반증이자 유한한 삶에 종말을 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이가 얽히지 않았더라면 에블린의 이러한 시도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혈연은 애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 관계는 무한한 애정을 주고받는 건강한 연(緣)일 수도 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더 커다란 상처를 주고받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에블린과 조이의 경우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로 한층 더 복잡미묘한 관계성을 띤다. 유독 살가운 딸을 바라는 엄마와 다양한 이유로 그처럼 살지 않겠다는 딸의 이야기가 자주 들려오곤 하는데 이 모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에블린은 조이의 무심함에 서운한 감정을 삼키며 괜히 살쪘다는 말만 늘어놓고, 엄마의 언행에 상처받은 조이는 그 원망을 삼킨다.

 

더욱이 동양인과 이민자 2세라는 정체성은 세대 차이 위로 한 겹의 벽을 더 쌓는다. 자신의 고유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와 의존이 더해진 이 관계에서 엇갈림은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여전히 웨이먼드와 중국어나 광둥어로 소통하는 게 익숙한 에블린과 다르게 점점 중국어를 잊어버리는 조이의 모습이나, 딸의 성적 지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에블린에 대한 조이의 실망감과 같은 것들 말이다.

다정함

무수히 쪼개진 멀티버스를 시끄럽게 지나가다 적막에 도달할 때면 조이가 겪은 공허함이 조금은 느껴진다. 어지럽게 그려진 동그란 낙서와 뻥 뚫린 베이글처럼 조이 마음의 모양새도 텅 비어있나 보다. 그가 온 멀티버스를 오가며 끝내 발견한 한 가지 진실은 ‘전부 다 부질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베이글 위로 올렸다. 좌절된 꿈과 희망, 옛날 성적표로 대변되는 학업에 대한 압박, 개의 품종을 구분 짓듯 옳은 것이라고 여겨진 이 세계의 전통과 믿음까지. 모두 검정색 베이글 위에 뒤섞여 붕괴한다.

 

다만 조이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줄 에블린에 대한 기대 하나는 붙잡고 있었다. 그토록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또다시 딸을 이해하고자 할 에블린이기에, 괜히 자신이 느낀 이 세계의 덧없음을 경험하기를 바라 본다. 가끔은 좋은 감정이 일렁일 때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끝내 사라지니 함께 소멸의 길을 택하자면서. 그래서 ‘나의 에블린’이 다른 우주의 에블린과 조우해 하나가 될 때까지 조이는 그 주변을 맴돌며 기다린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에블린 역시 무한한 가능성의 경험 끝에 삶의 무(無)를 깨닫는다. 적(赤)색으로 물든 그날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디어드리의 압류 압박에 유리창을 깨부수다 마침내 돌멩이가 되어버린다. 오래전부터 에블린에게 삶은 돌아가는 세탁물마냥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퍽퍽해진 머릿결과 문득 어딘가 잘못됐다는 생각들. 온 세계를 돌고 나서야 그 내면 깊숙이 깃든 무의미함을 인지했을 뿐이다. 그러기에 에블린이 조이와 함께 ‘인간은 하찮고 어리석은 존재’라며 세상을 향해 ‘ha ha ha’ 조소하는 것은 그리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영원의 무(無), 즉 죽음의 길에 선 에블린을 웨이먼드의 다정함이 붙잡는다. 가장 미약하다고 생각했던 웨이먼드의 생존 방식이 세탁소의 압류를 잠시 멈추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할 때, 에블린은 그곳에서 불확실한 다정함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사실 웨이먼드의 다정함은 영화 내내 에블린 주위를 맴돈다. 그는 세탁물에 눈알을 달고, 그것이 행복해할 자리를 찾아주고, 직접 구운 쿠키를 디어드리에게 선물해 화를 누그러뜨린다. 에블린을 공격하려는 사람들로부터 그를 보호할 때는 자신이 믿는 다정함을 설파하기도 한다. 미숙하지만 수많은 노력들이 가닿아 빛을 발한 것이기에 웨이먼드의 다정함이 이뤄낸 것을 마냥 운이라고 칭할 수만은 없다.

“사랑스러운 점들은 언제나 있어요.

손가락이 소시지인 황당한 우주에서도

발을 능숙하게 잘 쓰게 돼요.”

Be kind. 다정해야 한다는 다소 이상적인 메시지가 에블린의 힘과 더해져 조이에게 향한다. 몸에 박힌 총알이 다정한 눈알로 바뀌자 그는 이제 제3의 눈을 가진 신이 된 듯하다.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이에게 당신은 사랑스러운 존재라며 긍정의 말을 전하고, 라따구리를 되찾기 위해 동료와 함께 전력으로 질주한다. 아버지에게 당신의 인정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자랑스러운 존재라는 해묵은 말을 건네며, 본인처럼 엉망인 조이에게도 그 다정함을 알려줄 베키가 있다는 사실도 밝힌다. 딸을 구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멀티버스에서, 모든 에블린을, 한꺼번에 경험한 그가 보여준 이토록 치열한 과정에 그 다정함을 믿고 싶어진다. “너 살쪘어”로 시작해 “너랑 여기 있고 싶어”로 끝맺는 그 다정함을. 그래서 조이는 또다시 붙잡혀 그와 나란히 걷는 길을 택한다.

이 영화는 비단 에블린과 조이 모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검붉은 혈연이 때로 버겁게 느껴지거나 만약을 상상하며 현실을 회피하는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다정함의 무한 예찬을 비관하다가도, 다정함을 올곧게 밀고 나가는 이 영화에 매번 설득당한다. 삶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통계적 필연성으로 굴러가는 게 인생이라면 지금 나는 어느 지점에 있을까. 어디에 다다라야 할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상념에 빠지다 가끔은 주변에 다정함을 건네기도, 받기도 하며 살아가자 다짐해본다.

221201_한님 보냄.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