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 🌴 아비는 잠 못 이루고 🚬

그토록 염원하던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 나와 걸어갈 때조차, 그는 현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말은 퍽 냉정하게 내뱉었지만 한껏 느려진 뒷모습으로부터 지금과 이후에 남아있을 그의 미련과 허망함이 떠오른다. 결국 연신 불안한 날갯짓을 하던 아비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영화 속 저편에 영원히 기억된다. 

한편 아비는 비단 극 중 한 명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아비(阿飞)는 사전적인 의미로 부랑아, 망나니, 건달 등을 뜻한다. 1960년대 당시에는 서구를 추종하던 특정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어에서 아(阿)가 호칭에 사용되고 비(飞)가 한자 상 ‘날다’라는 의미임을 감안한다면, ‘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던 다리 없는 새’를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저마다의 이유로 방황하는 주인공들 모두가 곧 ‘아비’이다. 

치명적이지만 지루한, 언제 내쫓길지 모르는 관계들의 연속. 수리진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헤어진 사람의 집 앞을 다시 와야 했고, 루루는 괜한 억지와 과시로 조바심을 눌러야만 했다. 혹시나 해서 그려봤을까? 굳이 때마다 찾아와 잊지 못할 ‘친구’가 된 그의 마음이나, 번호조차 기억할 의지 없는 그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어느 미래를. ‘만약’에 기대어 기다리는 건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짙게 그늘진 챙 아래 서 있던 경관이나 황홀한 짝사랑에 허우적대던 아비의 친구 말이다. 

좀처럼 마음을 주지 않으면서 엄한 사람의 마음은 홀려놓고 떠나버리는 ‘아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지만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또 다른 ‘아비’. 그들의 엇갈림은 연출적으로도 꾸준히 표현된다. 한 공간에 있을 때조차 동시에 얼굴이 비치는 일이 드물다. 화면의 초점은 말하는 사람에게만 맞춰지곤 한다. 나란히 걸을 때도 둘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숨죽일만한 클로즈업 전후의 대사는 독백으로 들릴 때가 많다. ‘아비’들은 그렇게 누구에게도 쉬이 정착하지 못하고 각자의 비행을 이어간다.

시도 때도 없이 째각대는 소리와 간간이 등장하는 시계만이 이 와중에도 흐르는 시간을 알려준다. 모월 모일 4시, 3시 1분 전, 7시 20분, 1시 2분, 12시, 3시 반, 9시 45분. 어딘가에 잔뜩 매여있던 1분들은 어쨌거나 지나간다. 이제 막 과거가 된 또 다른 현재들을 뒤로 하고, 아직은 알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온다. 그리고 이 모든 조류에 대해서. 스쳐 가는 만남뿐 아니라 그 시절 홍콩이 휩쓸린 역사적 조류에 대해서도 영화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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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정전〉이 개봉한 1990년 전까지 홍콩은 몇 차례의 소란들을 겪었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대대적인 봉쇄 정책이 시행돼 중국과의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했고, 1984년 맺어진 중영공동선언에 따라 1997년 반환이 예정되었으나, 1989년 6월 4일에 발생한 천안문 사태는 반환 이후 홍콩의 정치적 자유나 민주주의가 불투명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두 편의 아비정전을 각각 1960년과 1966년 배경으로 제작해 홍콩의 격동기를 담으려 했던 의도나, 작품마다 짙게 배어 있던 홍콩의 향수는 그래서 이번 왕가위 감독 영화에 공존한다. 

루루와 수리진이 피우던 ‘CRAVEN A’ 담배, 아비 친구의 라디오, 아비의 클래식 자동차, 텅 빈 밤거리를 홀로 지키던 전화박스, 주인공들이 머물던 퀸즈카페 등 소품과 장소들은 아직은 잠잠한 1960년대 홍콩의 풍경을 음미하게 한다. 동시에 ‘모국’이라는 개념조차 모호해진 이들이 겪던 근본적인 불안 역시 드러난다. 지난 1842년 아편전쟁 이후 대영제국의 영토로 속하다 중국령으로 넘어가게 된 홍콩인의 처지는 자신의 진짜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아비로 비유됐다. 

저마다의 이유로 자기 나라를 떠나 홍콩에 거주하고 있던 수많은 이주민과 원주민의 존재는 등장인물들로 대변된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인 마카오를 떠난 수리진, 필리핀에 어머니를 둔 아비, 홍콩을 떠나고 싶지만 가족 때문에 포기하고 있던 경관. 여기에 감독은 루루는 상하이, 아비의 친구는 홍콩을 상징하도록 설정해, 단순한 성애 그 이상의 감정들로 읽어낼 수 있는 5각 관계를 완성했다. 

이주민들은 돌아가길 원하지만 돌아가지 못하거나, 타지의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며 지내는 것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러니 아비에 대한 수리진과 루루의 마음은 같은 ‘이방인’의 입장에서 비롯된 끌림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두 여성에게 낯선 곳에서 만난 익숙함이자, 의무가 된 일상에 주어진 유일한 유희의 대상이었다가, 곧 목적지 없이 사무치는 또 다른 그리움이 된다. 

좀처럼 안착하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사정 역시 두 남성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상 호감을 느낀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상황은 본토인과 외지인 사이의 거리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은 본국을 두고도 자진해서 선원이 되어 떠나거나, 외국인 친구를 선망하며 ‘도둑’처럼 그의 자동차와 애인을 탐낸다. 그 과정에선 어떤 주인 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Days of Being Wild〉. 제임스 딘이 주연으로 나온 〈이유없는 반항〉(1994)의 홍콩식 제목이기도 한 영제처럼, 영화는 요동치던 시기 속 날것의 정서를 특유의 각색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2046〉(2004)까지. 혼란스럽던 홍콩을 내비치는 메타적 서사이자 방랑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아비정전〉은 그 연쇄의 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