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티스, 💔 앓던 마음 꽉 안아주기 🩹

섀넌 머피, 〈베이비티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밀라, 그의 앞에 갑자기 등장한 모지스. 그런 만남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안나와 헨리. 어느 날 아침의 4번 승강장에서 시작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운명의 장난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색색의 에피소드가 더해질수록 날만 죽이던 이들도 변해가는 중.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OST가 흐르는 동안,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을 넘나드는 조금은 특별한 날들이 반짝인다.

💔 앓던 마음 꽉 안아주기 🩹

영화가 끝났을 때마다 어김없이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허물어지듯 자세를 무너뜨리고 고개를 외로 돌려 천장을 봤다.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기가 싫었다. 숨 쉴 때마다 부풀었다 작아졌다 하는 몸만을 가만히 느끼며 이 짧은 공백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언제나 가장 먼저 밀라가 생각났다. 그다음은 모지스가, 그다음은 안나와 헨리가. 그 이후엔 전부가. 모두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헤아리고 싶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어떤 걸 더 할 수 있었겠냐고. 곧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은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고. 좋은 말, 나쁜 말. 하고 싶은 말, 하기 싫은 말. 모든 물음들을 모아둔 채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돌려봤다.

 

며칠이 채 안 될 동안 털어놓는 이야기들.

어떤 것들은 알게 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러브 스토리

 

선로를 보며 심호흡하는 밀라와 그에 한발 앞서 뛰어 들어가는 모지스. 첫 만남부터 흘러내리는 코피를 들키고, 퇴거 소식으로 당당히 돈까지 요구하는 적나라한 관계에 두 사람은 무장해제 된다. “50달러 줄 테니까 뭐 하나만 해줘” 내가 멀쩡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아버렸고 그래서 솔직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아무도 못 말리는 16살과 23살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갑자기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느닷없이 집에 (쳐)들어와도 서로에겐 거리낌이 없다. “이렇게 넓은 세상인데 한 가지 일만 하는 게 이상하죠. 그렇게 사는 순간 아름다움보다 기능에 집착하게 될걸요.” 같은 폼 잡는 말도 모지스라면 고개를 끄덕인다. 제아무리 들려야 할 곳이 여고라도 밀라가 생각나면 선물을 들고 직진이다. 새벽녘을 혼자 지새우고, 날카로운 얘기에 상처를 입어도 홀린 듯 서로를 다시 찾는 두 사람.

“네 꿈 꾸다가 깨서 온 거야.”

“내 꿈?”

“응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는데 네가…온 거야.”

역할 놀이

 

핑크빛 연애에 몰두하는 (아픈) 딸에게 최선을 다하는 역할이 안나와 헨리다. 안나는 ‘괜찮은’ 엄마가 되길 원한다. 하루아침에 싹둑 잘려 나간 딸의 머리를 보고도 일단은 말했다. “예쁘다 반짝반짝하고” 그는 밀라의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3월 시험 준비를 위한 플랫 하나에 더 신경 쓴다. ‘문제 있는’ 모지스와는 어떻게든 떨어트리려 했지만 딸의 간곡한 부탁에 이내 결심을 누그러뜨리고 만다.

“〈백조〉 치자”

“너 쉬어야지”

“뭐 치고 싶어?”

“그냥 네가 나아졌으면 해”

얼른 낫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헨리가 추구하는 아빠(혹은 정신과 의사) 역할로 이어진다. 그는 아내와 딸의 기분을 살핀다. 안나를 위해서는 화요일마다 주기적인 상담을 잡고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건넨다. 사랑에 빠진 밀라를 위해서는 ‘아빠답게’ 앞으로의 계획을 모지스에게 묻거나, 그를 붙잡아 둘 처방전을 써준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작금의 상황을 매끈하게 만들어 줄 노력이 계속된다. 따듯하게 칠해진 장면들과 일상대화 속 곁들어진 위트들도 가세한다. 그러나 빛 좋은 구실들은 아무리 건져 올려봤자 수면(瘦面)을 살짝 건드릴 뿐. 깊은 수심(愁心)은 알 길이 없다.

사실은 모두가

“조금만 참으면 돼.”

“맨날 그 소리.”

“이번엔 진짜야.”

“그 소리도 맨날 하잖아.”

밀라는 갑작스러운 메스꺼움이나 흉부감염 등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몸의 이상을 감지하며 점점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다. 유리창 너머의 가족에게 버림받으며 ‘친구’인 동생과 마음대로 만나지도 못하는 모지스는 ‘약쟁이’다. 약을 훔치기 위해, 약을 조건으로 밀라의 옆에 머물 정도다.

 

안나는 어릴 적 밀라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피아노를 치지 못한다. 만연한 불안은 약으로 잠재우려 했지만 도리어 불면증이 생겼다. 심란해진 헨리는 잠깐의 안식을 구하기 위해 괜히 ‘헨리’가 있는 토비 집을 방문한다. 물론 도움 제공과 차 한 잔 뒤에 얻게 된 건 순간의 후회와 모르핀을 향한 갈망이다.

 

모두들 지금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약을 먹는다. 그러나 어김없이.

약효가 떨어지면 또다시 지긋지긋한 현실과 소중한 얼굴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별이 알려준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을 거라는 공포, 긴밀한 누군가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경험에 노출되어 있을 때. 필요한 건 당장 괜찮아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잔뜩 흐트러질 수 있는 자유다. 괜찮은 척,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아니라 괜찮지 않음을 나눌 수 있는 솔직한 대화다.

 

불안정함에 익숙해졌지만 결코 무뎌지지 않는 아픔에 다시 외로워지긴 싫다. 잠시나마 허무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살아있는 기분으로 지내고 싶다. 우리 딸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어떤 낙관이나 걱정은 소용이 없다. 그럼 차라리 ‘최악의 부모’ 노릇을 하더라도 남은 날 동안 그 애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씁쓸하게 버려진 기분을 노래에 한껏 내맡기는 춤. 남의 시선으로 느낀 모욕감에 정돈된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내던진 포옹. 샤워기 수압 문제로 둔갑하던 예민함이 무너져 버린 심경이었음을 깨닫는 울음.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상처를 건드린 참에 아예 털어놓는 얘기. 차라리 죽여 달라는 부탁으로 우리를 아프게 한 순간. 

 

재고 말고 할 것 없이 단순하게 표현할 때. 비로소 미숙함은 조금씩 빠져나간다. 

어느 아름다운 날
 

밀라의 죽음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되어 찾아온다. 영화 내내 인상 깊게 흐르던 음악이 꺼지고 무거운 정적과 흩어지는 하소연만이 남는다. 그것 말고 어떤 게 더 남을 수 있는 걸까, 싶을 때. 감독이 택한 마지막 장면은 짙게 치는 파도와 밀라의 흔적들이다.

우리 좋은 얘기만 하자

 

(…)

 

손을 힘껏 뻗어도 수면은 그 너머에 있고

빛은 수면에서 춤을 춘다

하고 싶은 얘기와 좋은 얘기는
같지 않다는 것을 배웠어

산책의 끝을 궁금해하며

헤엄치는 너의 물보라를 따라

너의 뒷모습을 따라

멀어지는 빛을 본다

조금은 더 걸을 수 있겠지

끝없이 반짝이는 수면

 

느리고 조용하게

_박은지, 『여름 상설 공연』

다시 첫 장면으로 돌린다. 물이 든 컵에 빠진 유치가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시답지 않은 이유로 혹은 너무 그럴만한 이유로 이별은 항상 가까운 언저리에 도사린다. 관계 속에 머무는 이상 이 아픔은 계속될 것이다. 그걸 숨긴다는 건 종종 지나침을 경계하는 일이지만 아주 큰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두지 않겠다는 아집이 되기도 한다. 내가 솔직하지 않고 당신이 내게 솔직하길 바랄 수 있을까. 

 

우리가 예의를 차리는 사이보다 힘듦을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 좋은 말보다 하고 싶은 말을 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그 시간들이 마냥 허전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거기서 자라난 책임감과 깨달음이 또 다른 위로가 되어 빈자리를 채워나갈 테니까. 

230504_예은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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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좋은 얘기만 하자(…) 손을 힘껏 뻗어도 수면은 그 너머에 있고 빛은 수면에서 춤을 춘다
하고 싶은 얘기와 좋은 얘기는 같지 않다는 것을 배웠어 산책의 끝을 궁금해하며”

_박은지, 『여름 상설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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