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소마, 🌞 태양이 지지 않는 곳으로 💐

아리 에스터, 〈미드소마〉

주인공 대니와 친구들은 ‘호르가’ 마을의 한여름 축제를 즐기기 위해 스웨덴으로 향한다. 도착한 그곳은 아름답지만 섬뜩하다. 그는 끝내 웃으면서 도망칠 수 있을까?

〈미드소마〉에는 어떤 교훈도 위로도 없다. 기괴한 이미지를 나열하여 관객을 충격에 빠뜨린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을 떼기 힘든 매혹적인 영화기도 하다.

🌞 태양이 지지 않는 곳으로 💐

순수하게 빛나는 백야의 파란 하늘에 눈과 마음이 서서히 현혹되어 갈 때, 영화는 절정의 한복판에서 붉은 핏덩이를 튀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순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쌓아 올렸다는 듯이 힘차게 곤두박질친다.

어두컴컴한 방 안 작은 조명과 노트북의 불빛에 의지해 간신히 눈물을 삼키는 대니. 노트북 속에는 의미심장한 “good bye”를 남기고 3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 동생을 찾는 문자가 쌓여 있다.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해 보려 하지만, 이 애인은 대마 피우고 피자나 먹을 거라는 특유의 무심함으로 그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신경안정제를 챙겨 먹고 심리 상담을 다니는 그는 가족 일로 애인에게 과하게 기대는 건 아닌지 고민하지만, 상대는 헤어지고 싶어서 1년 동안 전전긍긍한 상태다. 한 방에 있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진처럼, 관계는 이미 끝날 대로 끝나 있다.

결국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날, 대니는 동생의 부모 살해와 자살 소식을 접하고 “안돼”를 연신 외치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하며 혼자 다른 곳에 떨어진 기분에 매몰된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플 땐 비좁은 화장실에 들어가 자신을 억누른 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밖으로 나온다.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남자친구 무리와 스웨덴으로 향하는 비행기 화장실에서도, 도착한 마을에서 약에 취해 환영을 보던 화장실에서도. 어쩌면 화장실 바깥에는 자신의 슬픔에 함께 울어줄 손길이 없다는 걸 알아서. 그래서 외롭고 괴로워서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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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가에 잘 왔어요! 행복한 하지제 보내시길.”

초원, 축제, 흰옷. 아기자기한 집들과 꽃다발을 쓴 적당한 수의 사람들. 공동체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은 외부인인 대니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그냥 축제라고 하기엔 다소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나는 장면 때문에 관객들은 불길해지지만, 일단은 주어지는 정보에 귀를 기울인다. 조각 같은 집에 감탄하다 5월의 여왕 사진을 구경한다. 그리고 “우린 삶을 계절처럼 생각해”라는 스쳐지나가는 말. 18세까지는 봄, 36세까지는 여름이고 54세까지는 가을, 72세까지는 겨울이다. 벽에 걸린 메이 퀸들의 사진에 눈길이 가는 대니는 묻는다. “72세가 되면 어떻게 되는데?”

뒤로 걸으며 꽃을 꺾는 사람들과 배고파도 쏠리는 음식을 보면 확실히 이곳은 미국의 도시에서 온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만찬이 마무리된 후 두 노인을 태운 의자가 절벽 위로 향하고 사람들은 그 광경을 가만히 주시한다. 잠시 후 두 노인이 절벽에서 떨어진다. 누가 밀친 것도 아니고 쫓기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도 아니다. 스스로 떨어진다. 대니의 질문에 대답을 내놓는 것처럼.

카메라에 포착된 검열되지 않은 시체를 목격한다. 죽음과 의도적으로 단절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의 묘사는 치명적이다. 망치에 둔탁하게 맞아 으스러진 얼굴과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마을 사람들의 괴성이 겹치면 더욱 혐오스러운 모양을 띤다. 생경한 감각이 몸 곳곳에 퍼지고, ‘순환하는 삶’을 들먹이며 자살을 오랜 풍습이라고 하는 장로에 대한 가치판단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모두가 절벽을 바라볼 때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너머의 우리와 눈을 마주하는 것처럼.

우리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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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에 빠진 대니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온다. 그런 그를 뒤따라온 것은 일행 중 대니의 아픔에 가장 공감하는 친구이자 이 끔찍한 곳으로 불러 들인 장본인 펠레다. “내 가족. 내 진짜 가족. 가족은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야. 너도 가족이 필요해.” 가족을 모두 잃은 그에게 펠레가 건넨 말은 어떻게 들렸을까? 유혹과 회유로 가득 찬 말일 뿐이지만, 대니에게는 마치 이곳 호르가가 자신의 두 번째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렸을 테다. 하지만 완벽한 안식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 후 사이먼이 홀로 도망쳐 남겨진 연인 코니를 보며 대니는 불안을 느끼고, 이 사실을 의지하던 크리스티안에게 알린다. 하지만 그는 대니의 말을 전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마을 어르신에게 근친상간의 존재 여부 따위를 묻는다. 이를 보는 대니는 생각을 고쳐먹는다. 사이먼이 크리스티안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아마도 “너도 그럴 수 있겠네”.

그렇게 미국에서 온 대학원생 친구들은 며칠 새에 서서히 분열해 간다. 머릿속에 섹스와 성기만 가득 찬 마크는 얼굴이 뜯어지고, 건드려선 안 될 경전을 탐낸 조쉬는 피를 흘리며 어딘가로 끌려간다. 차례차례 사라지는 두려움에 질린 커플도 있다. 결국 둘만 남게 된 상황. 그러나 후경에 흐릿하게 잡히는 벽화를 자세히 보면, 크리스티안도 마야의 내정된 짝짓기 상대 역할을 다하고 최후를 맞이할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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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이곳에서…

검은 자가 호르가의 청년들을 풀밭으로 꾀어내어 춤을 추게 하였다.

춤을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고 죽을 때까지 춤을 췄다.

검은 자에 개의치 않고 우린 쓰러질 때까지 춤춘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왕관을 쓸 것이다.”

드디어 축제의 마지막 날. 5월의 여왕을 뽑기 위한 춤이 시작된다.

‘특별한 재료를 넣은 샘물’을 마시고 음악에 취해 정신없이 춤을 춘다. 불길 속 내 모습이 빛처럼 스쳐가고 알지도 못하는 스웨덴어로 대화하다 보니 마지막에 남아있는 한 명은 대니 자신이다. 모두 5월의 여왕을 축하해 주고 그는 얼떨떨하게 그게 “무슨 뜻인데요?” 하며 묻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친구들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자가 벅찬 표정으로 내게 키스한다면, 더 질문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 가족이죠? 우린 가족이에요! 자매!”

메이 퀸이 되면서 정말 호르가 사람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은 걸까. 크리스티안의 배신과 괴이한 성행위에 충격받은 대니가 통곡하며 쓰러지자, 자매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와 함께 울어준다. 다 같이 호흡에 맞춰 오열하고 괴성을 지르는 위로 방식은 우리에게는 기묘하게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진심으로 함께 슬퍼하고 치유 받는다.

대니는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다. 꽉 막힌 울분을 눈치 보지 않고 터뜨리는 순간, 타인과 나의 아픔을 나누는 순간.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함께한다. 대니의 감정도, 마야의 오르가즘도. 그리고 곧 다가올 살갗이 불타는 뜨거움까지도 공유하는 ‘자웅동체’ 집단이다. (개인으로 나뉘고 그 경계를 쉬이 넘지 않는 오늘날의 마을 혹은 아파트 문화와는 양립할 수 없는 대극의 공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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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의 제물과 불타는 노란 집.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대니가 콜록대던 것을 멈추고 드디어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다 함께 축복하고 즐거워하는 축제니까 말이다.

영화의 끝까지 겨우겨우 다 보고 나면, 매번 무의미한 생각들이 산발적으로 떠오릅니다. 대니가 크리스티안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 아픔을 토로했다면, 가족 문제로 너무 자책하지 않게 도와주는 타인이 있었다면 대니가 스웨덴이라는 낯선 땅으로 향했을까요. 절벽 위를 보며 가까웠던 누군가를 떠올리고 엄마의 환영을 보는 그가 과거를 떨쳐낼 방법은, 새로운 안식처와 가족의 품이었습니다. 벽에 걸린 사진 속 5월의 여왕들도 그처럼 삶 속에서 타자를 상실하고 홀로 고립된 사람들(혹은 상징)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들은 왜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건지, 축제 이후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영화에는 내내 어떤 유혹이 흐릅니다. 알면서도 제물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욕망을 향한 유혹 같은 거요. 대니는 소중한 이들을 허무하게 보내며 무력함에 익숙해집니다. 타인에게 슬픔을 쏟아내고 싶지만, 마땅한 사람은 없고 결국 내 안으로 파고들 뿐이죠. 흑(黑)과 밤으로 덧칠된 미국의 도시에서 벗어나, 백(白)과 낮으로 환한 호르가에서 위안 받습니다. 그렇게 다시 웃을 수 있게 된 대니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이 영화에는 어떤 교훈도 위로도 없지만, 굳이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면 이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좁은 화장실에 숨어 잘 안 보이지만 분명히 힘들어하고 있을, 내 곁의 다른 대니들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내 안의 대니 또한 들여다보자.

230621_수연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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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6월 28일 / 2:00 오후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옆에 있는 친구의 팔을 꽉 붙잡고 커다란 스크린에서 도대체 뭐가 나올까 두려워하면서 봤던 기억이 나요. 너무 밝다 못해 눈이 부신 화면에 적나라하게 분해된(으깨진) 몸들이 나오니까 솔직히 비위도 상하고 내가 뭘 본 건가 싶었어요. 근데 영화가 끝났을 때는 또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이한, 아주 기이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공동체의 회복 같기도 하다는, 이상한 생각.

“꽉 막힌 울분을 눈치 보지 않고 터뜨리는 순간, 타인과 나의 아픔을 나누는 순간.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함께한다. 대니의 감정도, 마야의 오르가즘도.

그리고 곧 다가올 살갗이 불타는 뜨거움까지도 공유하는 ‘자웅동체’ 집단이다.”

“이 영화에는 어떤 교훈도 위로도 없지만, 굳이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면 이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좁은 화장실에 숨어 잘 안 보이지만 분명히 힘들어하고 있을, 내 곁의 다른 대니들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내 안의 대니 또한 들여다보자.”

외롭고 괴로워서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사람들, 가족이 필요한 사람들, 아픔을 나눌 상대가 필요한 사람들, 죽음을 떠올리면 어색하고도 생경한 감각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감독은 이들에 대한 추모이자 제사로, (인정하기 싫지만) 위로 또는 경고로 다가가기 위해 대낮에 굳이 잔인함을 전시하려 마음먹었을까요? 글을 읽는 동안 그런 조각난 생각들이 제 머릿속에 마구마구 떠다녔어요. 힐링인지 킬링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묘한 영화…아리 에스터의 또 다른 작품들이(이번에 새로 나오기도 하던데) 수연님께는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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