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썬, 📹 찬란히 부서지는 아지랑이를 따라서 🌅

샬롯 웰스, 〈애프터썬〉

〈애프터썬〉은 소피가 아빠와 함께 보냈던 마지막 여름방학을 떠올리는 이야기다. 쨍하고도 아른거리는 색감의 여행지를 따라다니며, 우리는 선명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던 어떤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복기되는 기억 한 편에 자리하는 것은 지울 수 없는 그리움과 영원히 답을 들을 수 없는 의문들이다.

📹 찬란히 부서지는 아지랑이를 따라서 🌅

그렇게 당신도 이제 알게 될 겁니다, 결코 위안 같은 건 찾을 수 없으리라는 걸,

날이 갈수록 더 많이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이 사실을 깨닫는 일이 다름 아닌 위안이라는 걸.

–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1977) –

🎼 One Without – Oliver Coates

소피는 꿈을 꾼다.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깜박이는 시야 속에 어렴풋이 아빠가 보인다. 그를 향해 서서히 다가간다. 정신없이 춤추는 사람들 사이 자신에게 심취한 듯 유영하는 캘럼을 향해. 비집고 들어가다 어깨를 거칠게 밀치고, 어떤 말들을 소리친다. 원망과 분노가 내비치는 듯한 소리들. 악을 쓰며 괴로워하는 듯한 표정들. 그러나 모조리 어둠에 잡아먹힌다. 아마 그 말들은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이내 놓게 될 때까지 부둥켜 안은 짧은 순간이 있다.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아빠를 꼭 안아버리는 순간. 이 영화는 그 찰나를 붙잡기 위해 명멸하는 기억 속 마지막 여행을 헤집는다.

테이프를 되감던 캠코더가 멈추고 11세의 소피와 30살의 캘럼이 보인다. 저화질 화면 속 천연히 빛나는 모습과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두 사람은 여름 방학을 맞아 함께 튀르키예에 도착했다. 낮에는 내리쬐는 햇볕이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 사이로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인상적인 휴양지. 공사가 한창인 조금 어수선한 공간이어도 상관없다. 쉬러 온 사람들의 틈에 남매로 오해받기도 하는 이 부녀는 호텔과 수영장, 보트 위와 뷔페 자리 그리고 바닷가를 여유롭게 누빈다.

같이 자고, 먹고, 놀고, 가볍게 실랑이하고. 당구를 치다가 물장구치고 체스를 두다가 카드 게임을 하는. 선베드에 누워 음악을 듣거나 저녁에 마련된 공연을 보거나. 시답지 않은 말장난과 함께 최고의 휴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너무 많았다. “내일도 신날까?” “그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사이사이 배겨 있는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면 마냥 즐거울 수 있었을까. 그렇게 아름답게 추억될 수 있었을까.

소피는 궁금했다. 둘이 헤어졌는데 왜 전화를 끊을 때마다 엄마에게 ‘사랑한다’ 말하는지. 애인과 카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딱 자기 나이일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고 그 해 생일에는 뭘 했는지. 호신술은 왜 그렇게 진지하게 가르치고, 5살 때부터 하던 노래는 왜 홀로 부르게 두어 민망하게 하는지. 그래서 스코틀랜드에는 결국 안 돌아올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빠의 단호함에 낯설어진 적도 여러 번이다.

캘럼은 영 위태로웠다. 아슬아슬하게 난간 위에 올라서 있거나, 자격증도 없이 다이빙한 후로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서. 위협적으로 울리는 경적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건너거나, 괜히 젖은 수건을 얼굴 위에 덮고 답답하게 숨 쉬어 보곤 해서. 맨몸으로 축 늘어진 채 노크 소리도 못 듣고 잠만 자거나, 참았던 괴로움을 터뜨리듯 온몸을 들썩이며 오열했으니까. 급격한 감정 변화에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괜찮은 거야?”

“모르겠어, 그냥…약간 우울한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 그런 기분 있잖아. 그냥…

아주 근사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지치고 멍한데 뼈들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느낌.

몸에 힘이 없고 그냥 다 지쳐서 가라앉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 말이야.”

각자의 이유로 혹은 옆에 있는 당신 때문에 가지게 되는 조금은 버거운 시간. 남몰래 우울함에 시달리던 두 사람은 그럼에도 애를 쓴다. 때로는 눈치를 보고 때로는 대신 돌봐주며 서로를 챙긴다.

잠시라도 혼자 있을 소피 생각에 계단을 다시 내려오던 캘럼은 작은 소리에도 별일 없는지 걱정한다. 깁스를 풀다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더라도 딸은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싶다. 며칠 안 남은 시간 속 애 앞에서는 우울함 따위 침 한 번 뱉으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소피에게 미안한 일들은 몇 번이고 사과해도 개운치 못하다.

소피는 시시각각 변하는 캘럼의 표정을 주시하곤 한다. 실수로 받지 못한 물안경이지만 비싼 거지 않냐며 머뭇머뭇 미안한 기색을 보인다. 팔목이 부러졌을 때 아프진 않았는지, 어깨의 상처는 어디서 난 건지 넌지시 물어본다. 어린 시절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게 이번 생일은 많은 사람들의 축하로 아빠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쏘아붙이는 말로 상처를 주고 떨어져 있는 시간을 늘려 가다가도. 어둠 속으로 멈추지 않고 걸어가서 몰아치는 파도에 자취를 감춰버리다가도. 솜으로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눈길과 손길로 어루만져 서로를 확인하던 때가 있었기에. 다시 돌아와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고, 앞으로도 함께할 것을 약속해 본다.

알 수 없는 당장의 아빠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훗날 이 시간을 돌아봤을 때 딸이 행복하길 바라며. 뜨거운 햇빛에 타들어간 살갗을 매만지는 ‘애프터썬(aftersun)’처럼 둘은 미지의 슬픔으로부터 서로에게 보호제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여름, 사랑하는 방식마저 닮아가던 때가 있었다.

휘발되고 남은 그날의 조각들은 끊겼다가도 이어지는 촬영본을 통해, 소피의 상상인지 회상인지 모를 주관에 의해 그렇게 다시 짜인다. 어떤 것들은 반복되고 어떤 것들은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소피가 찍은 부분과 캘럼이 찍은 부분, 캘럼의 시선과 소피의 시선은 한데 모여 뒤섞인다.

머리카락과 함께 땋인 하얗고 푸른 실처럼, 캘럼을 거쳐 소피의 소유가 된 굵은 문양이 수놓아진 카펫처럼. 흐트러진 모자이크마냥 직조된 기억은 그때의 아빠처럼 30대가 된 딸에게 전승된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애도가 끝나갈 때 다시 건네는 배웅과 함께 캘럼은 혼란 속으로 되돌아간다.

아기 울음소리, 파도 소리, 비행기 소리, 경찰차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그리고 들을 수 없는 사연에 잠기는 소리. 순서 없이 떠올랐다가도 가라앉는 시선 끝에 그는 더 이상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마치 물속에서 눈을 떴을 때 흐린 시야에 잡히는 대상처럼, 캘럼은 철저히 파편화되어 소피에게 상기된다.

–

이제는 무의미해진 가정들, 닿을 수 없는 질문들을 쉽게 지우지 못할 것이다. 자꾸 뒤돌아볼 때마다 후회되는 순간들을 곱씹어 볼 것이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은 무엇이었는지. 사랑하는 당신이 내게 남겨둔 걸 어떻게 해야 할지.

Because love’s such an old-fashioned word

And love dares you to care for

The people on the edge of the night

And love dares you to change our way of

Caring about ourselves

This is our last dance

왜냐하면 사랑은 너무나도 진부한 단어니까

그리고 사랑은 네가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어루만질 수 있게 하니까

그리고 사랑은 네게 우리가

우리를 보는 방법을 바꿀 수 있게 하니까

이게 우리의 마지막 몸부림이야

그래도 딸은 다시 한번 아빠를 안아본다. 그의 품을 잃고, 또 되찾기를 반복한다.

230629_예은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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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7월 06일 / 2:00 오후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캘럼의 모습. 그리고 그 캘럼에게 다가가는 어른 소피의 장면. 개인적으로 영화 중간중간 삽입된 장면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 자체가 워낙 캠코더로 촬영한 씬이나 순서가 불분명하게 뒤섞인 씬들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해당 장면이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이 저에게는 아름답지만 모호한 영화로 남아있었어요. 그 장면도 캘럼 본인의 기억 파편 중 하나로만 이해하고 무작정 넘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장면을 풀어 설명해 주신 부분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홀로 서 있는 캘럼을 꼭 안아버리는 순간처럼 그와의 기억을 붙들기 위한 소피의 환상이라고 생각하니 그 장면이 다시 보이더라고요. 그를 기억하려는 소피의 노력이 기특하고 애틋하면서도, 계속해서 흐리터분해지는 그 씬이 더욱 따갑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소피가 물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아버지를 찍는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이 씬을 비롯해 영화 속 찰나의 순간들을 세밀하게 적어주셔서, 글 읽는 내내 캘럼과 소피의 감정 하나하나를 곱씹어 볼 수 있었습니다. 기억하기도 바쁜 삶이지만 덕분에 잊고 있던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좋은 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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