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의 여름방학, 🐢 케케묵은 여름 일기 꺼내 읽기 🐢

허우 샤오시엔, 〈동동의 여름방학〉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동은 여름방학을 맞이해 동생 팅팅과 함께 할아버지 댁으로 향한다. 제 또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외삼촌의 결혼과 마을 내 강도 사건, 어머니의 건강 악화까지 안 좋은 소식이 잇따라 닥쳐온다. 명랑하지만은 않은 그 여름날, 우리 주인공의 케케묵은 기억 한 조각을 함께 열어 보자.

🐢 케케묵은 여름 일기 꺼내 읽기 🐢

보고 싶은 엄마 아빠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귀에 성가실 정도예요.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창문이 덜컥거리네요. 슬픈 일이 있었어요. 삼촌 결혼식엔 우리 가족 중 저만 갔었거든요. 피윤 외숙모는 웨딩드레스도 못 입었어요. 결혼 앨범에 있는 엄마만큼은 예쁘지 않더라고요. 삼촌이 불쌍해요. 할아버지 앞에선 아무도 삼촌 얘기를 하지 않아요. 갑작스럽게 삼촌을 잃어버린 것만 같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결혼식에 와 주셨더라면 삼촌이 훨씬 더 행복했을 텐데 말이에요. 매일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다 기억하기가 힘드네요. 나중에 다시 생각나면 알려 드릴게요. 오늘은 왠지 기분이 울적해서 이만 쓰도록 할게요. 엄마가 빨리 회복되길 바라면서.

사랑하는 아들 동동이.

매미와 귀뚜라미, 개구리가 지독하게 울어대는 한여름의 소리. 벼꽃이 피는 듯 어느새 무성하게 자라버린 녹빛의 논과 이미 베어버렸는지 황량해진 땅덩이. 졸졸 흐르는 강 하류에서 발가벗은 채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오래된 대만 시골 풍경이 찬찬히 지나갈 때면 언젠지 모를 그 시절의 아련함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아픈 어머니와 그를 간병하는 아버지를 타이베이에 남겨둔 채, 남매는 여자친구 피윤에게 모든 관심을 쏟기 바쁜 외삼촌 창밍을 따라 기차에 몸을 싣는다. 편지는 귀찮다며 제 번호를 막 불러대는 친구 창의 말을 읊기만 하는 동동. 기차가 움직일 때면 오줌도 제대로 못 누는 영락 없는 어린아이지만, 마음에 드는 팬티는 기필코 입어야 하는 팅팅. 닭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다 옷을 두고 내린 피윤과 그 옷을 가져다주려다 기차를 놓친 창밍. 조카들을 잃어버린 죄로 할아버지께 야단맞을 외삼촌을 걱정해 역에 잠시 머물던 남매. 정말이지 이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편이 갑갑하다가도 끝내 실소가 터져 나온다.

그 여름은 새로운 만남과 뜻밖의 우정으로 기억되리라. 동동은 거북이를 볼 때면 친구 아칭쿠오와의 추억을 떠올릴 테다. 거기에는 상류에서 흘러온 소똥을 보며 퉤퉤 뱉던 물의 맛도 있다. 팅팅이 옷을 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채 집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창피함과, 오랜 시간 벌을 서며 맛본 다리 저림도 있다. 팅팅은 늘 들고 다니던 장난감 선풍기를 볼 때면 마을에서 미치광이로 소문난 한즈를 떠올릴 테다. 기찻길에서 넘어진 저를 업고 집까지 데려다주던 그 등의 온기, 죽은 아기새를 위해 대신 눈물을 흘려주던 특유의 웃음소리까지. 어른이 되면 흐릿해질 치기 어린 날의 기억이지만 그래서 더 귀엽고 소중한 우정이다.

 

그 여름은 옅어졌지만 절대 지워지지 않을 충격으로 남아있으리라. 분별력이 부족한 한즈가 갑작스레 임신한 사건이나 지하도에서 발생한 강도 사건처럼, 영화는 동동이 방학 동안 우연히 맞닥뜨린 여러 폭력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새 장수를 무자비하게 때리던 한즈의 아버지를 저 멀리서 담아낸 장면과 할아버지와 마을 경찰이 나누던 대화를 통해 관객은 그 전말을 감히 짐작해 볼 뿐이다. 의사의 권유에도 불임 수술을 거절하던 한즈의 아버지나 친구라는 이유로 강도들을 숨겨주기 급급했던 외삼촌까지, 우리 어린 주인공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세상이다.

 

그 여름은 도통 이해되지 않는 묘한 어긋남으로도 회상되리라. 갑작스러운 피윤의 임신으로 류씨 집안이 발칵 뒤집힌다. 인륜지대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가까운 이들에게도 축하받지 못한 채 조촐하게 진행된 창밍과 피윤의 결혼식에는 어린 동동만이 자리를 빛내고 있다. 처가에서는 돈 많은 의사 집 아들, 본가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그 처지를 한탄하던 외삼촌의 속내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주는 것도 동동이다. 한편 도망간 아들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며 노발대발하던 할아버지는 겉보기와는 달리 산모와 태어날 아이의 건강에 대해 집안 어른들과 논의하며, 강도 사건에 얽혀 감옥에 간 아들을 보석으로 꺼내주는 인물이다. 끝내 그가 독립한 아들을 찾아가기까지 그 옆에는 언제나 우리 동동이 있다. 매번 말썽을 피우는 외삼촌과 무엇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할아버지. 동동의 눈에는 둘 다 참으로 유별나다.

아무도 자기 자식을 영원히 돌볼 수는 없는 거야.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식들이 사회에 발을 딛기 전에

건전한 기초를 쌓게 해주는 것이 고작이지.

예의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본적인 품성을 길러주는 것이야.

병은 본디 환자 본인을 비롯해 주변인 모두를 고통스럽게 한다. 수술 직후 어머니가 깨어나지 못했다는 전화가 걸려 온 그날처럼 말이다. 타이베이로 향하는 기차표를 끊어두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팅팅과 있던 한즈의 추락 사고로 인해 발이 묶여 버렸다. 동생을 탓하던 동동은 어머니 소식이 오기 전까지 자지 않겠다며 버티고, 팅팅은 혼수상태가 된 한즈 옆에 계속해서 서성인다. 그런 고집불통 남매를 꾸짖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들의 완쾌를 빌고 있지만 예민해진 탓인지 아이며 어른이며 유달리 날이 서 있는 하루다. 물론 그날의 쓰라림도 어김없이 밝아온 아침처럼 흘러갈 뿐이지만.

보고 싶은 엄마 아빠께.

 

엄마 전화 기다리다 그만 잠들어 버렸어요. 전화벨 소리도 못 들었어요. 할머니께서 날 깨워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안 그러셨거든요. 정말 화가 나더군요. 하지만 엄마가 좋아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말 기뻐요. (…)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할아버지께서 삼촌 얘기를 하신다는 것은 알 수 있었어요. 시간이 흘러 여름도 거의 다해 가네요. 집이 그립습니다. 아빠께서는 언제 오셔서 저흴 데려가실 건가요? 한참 쓰다 보니 손이 아파서 이만 써야겠어요.

사랑하는 아들 동동이.

바래진 필름 위에 동동의 시선으로 본 80년대 대만의 모습이 그려진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어른의 행동을 본뜬 아이들의 순수하고 잔인한 모습, 은은하게 등장하는 당대 폭력의 형상까지. 급변하던 시대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한 가정의 불행한 나날도 결국은 지나간다. 어느새 중학교 신입생 환영회를 위해 타이베이로 돌아가는 우리의 귀여운 주인공처럼. 그렇게 동동의 여름방학이 끝나 간다.

*

당신의 여름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달달거리는 선풍기 앞에 입 벌리다 들었던 잔소리, 동생과 함께 했던 수박씨 뱉기 놀이, 밀린 방학 일기를 부랴부랴 짧은 독후감으로 채웠던 나날. 이 영화 덕분에 처음으로 낡은 일기장을 꺼내보았다.

… 어떤 이의 여름은 멀리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220706_한님 보냄.

“동동의 여름방학, 🐢 케케묵은 여름 일기 꺼내 읽기 🐢”의 1개의 댓글

  1. 신나면서도 어긋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동동의 여름방학. 그런 쨍하면서도 축축한 여름을 글로 읽으면서 다시금 영화의 그 분위기를 되새길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거기에 귀엽고 엉뚱한 한님님의 일기 덕분에 와하하 웃으면서 감상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자극받아 저 역시도 어릴 적 일기를 찾아보았답니다ㅎㅎ

    맞다 이랬었지, 이런 생각을 했었지, 한참을 추억 속에서 헤엄쳤네요.

    어릴 적에도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많았는데 지금은 일기를 읽지 않으면 일상에서 기억하지 못할 어렴풋한 추억으로 남았다는 게 참 아이러니해요. 동동에게도 그 여름이 그렇게 기억되고 추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영화 소개해 주시고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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