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네, 🤿 신화와 현실이 혼재된 습지의 땅 🤿

여기 또 다른 물의 정령이 있다. 21세기 베를린 한복판에서 이별 통보를 받은 운디네 비부다. 쓸데없는 시시비비를 따지며 논리도 무너뜨리고, 커피가 더 마시고 싶다며 발걸음도 더디게 만들어 보지만 요하네스의 마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나를 떠나면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살벌한 경고에도 그 사람은 한낱 치기 어린 말로 흘릴 뿐이다. 그럼에도 운디네는 창밖의 요하네스를 계속해서 붙잡아 본다. 탈의실 옆 건물 계단에서 한 번, 강의 중간 도시 모형을 바라보며 한 번, 일이 끝나자마자 다시 찾은 카페에서 한 번. 물론 이 운디네에게도 옛사랑의 목숨을 끊고 물로 돌아가야만 하는 숙명이 따른다.

축복일지 저주일지 모를 운디네의 생의 법칙에 한 남성이 꽂힌다. “운디네.” 요하네스의 배신으로 인해 영혼을 잃은 운디네에게 그를 죽이라는 부름이 들려 온다. 운디네의 겁먹은 표정이 찻장 위 수조를 통과해 카메라에 비친다. 기포 터지는 소리와 심연에 빠진 듯한 먹먹함이 영화를 메운다. 예상치 못한 남성이 그 사이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산업잠수사라고 본인을 소개한 그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펼치며 뒷걸음질 치다 그만 찻장과 부딪히고 만다. 그 순간 수조도, 물소리도, 이름 모를 누군가의 부름도 모두 부서진다. 깨진 유리 파편 두 개가 몸에 박힌 그때, 운디네는 운명이라서 운명殞命할 수도 있는 새로운 영혼을 얻었다.

참 다정한 사람이다. 운디네에게 크리스토프는 생을 끄집어내고 붙잡아 주는 사람이다. ‘빅 군터’에게 끌려가던 운디네를 물 밖으로 끄집어내 소생하는 것도, 〈Stayin’ Alive〉를 불러주는 것도 그다. 크리스토프에 의해 운디네는 다시금 두 다리를 딛고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다. 겉가죽이나 물질만으로 자신을 회유하던 요하네스와는 다르다. 흘러가는 기차 속 운디네의 형상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달려오는 것. “똑똑한 말을 멋지게 한다”며 운디네의 강연 해설에 푹 빠져드는 것. 그게 바로 크리스토프의 사랑 방식이다. 그래서 잠시 심장이 멈췄던 그 순간, 운디네는 죄의식을 느끼며 환상으로나마 크리스토프에게 사죄의 전화를 걸어본 것일지도 모른다. 운디네의 얕은 배반 때문인지 야속한 운명의 굴레 때문인지 결국 그는 뇌사에 빠졌지만 말이다. 소명召命을 받들라는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운디네.” 운명의 굴레를 바로 잡으려는 듯 운디네는 요하네스의 배신을 단죄하고, 끝내 물의 세계로 회귀한다.

“운디네!” 운디네가 요하네스를 죽이고 침잠한 순간 크리스토프는 되살아난다. 2년 뒤 그는 동료 모니카와 새로운 삶을 꾸린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의 배반을 대하는 운디네의 태도다. 신화에 따라 운디네를 배반한 남성은 죽음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즉, 약속을 저버린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에 의해 목숨을 잃어버릴 인간 남성의 위치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을 보면 우리는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맞닥뜨린다. 운디네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장면에서 그는 물속으로 찾아온 크리스토프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다. 운디네를 찾아 잠수하는 크리스토프, 잠수부 모형을 다시 그의 손에 쥐여 보내는 운디네. 뒤바뀐 운명은 돌아오는 듯하다 완전히 비틀려 버린다. 이미 짜여진 명이 아닌, 스스로가 결정한 결말이다. 나에게 〈Stayin’ Alive〉를 읊던 당신에게, 그 저주를 딛고 기꺼이 생을 살아가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