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파이어, 💔 잿빛 기억의 회고록 🖋️

크리스티안 페촐트, 〈어파이어〉

마감을 앞둔 예민한 작가, 포트폴리오를 준비 중인 살가운 친구, 홀연히 등장한 다정한 이방인, 해변을 지키고 있던 넉살 좋은 방문자까지. 산불이 가까워지는 동안 욕망이 엄습하는 숲속 별장에서 사교의 장과 신경전이 벌어진다. 심상치 않은 이 불길이 지나가고 나면 건조했던 여름날은 어떻게 기억될까.

💔 잿빛 기억의 회고록 🖋️

🎼 Wallners – in my mind

이것은 경계를 짓고 무너뜨리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안과 밖, 집과 바다, 불과 물. 구획된 구간들은 그 경계를 가시적으로 나타낸다. 데비트, 펠릭스, 나디아, 레온은 거기서 한데 뒤섞이고 또 분리되는 개체들이다. 가장 물렁하고도 가장 견고한 얇은 벽 하나를 넘나드는 일. 나의 감정, 생각, 몸, 피부에서 너의 피부, 몸, 생각, 감정으로 이어지거나 끊어지는 일.

나른한 여름날의 헝클어짐 속 꼿꼿이 자신을 숨기고 경계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주고받는 것에 인색한 그 덕분에 우리는 오점이 묻은 것만 같은 사랑 이야기를 불편하게 또는 불안하게 따라간다.

매일 저녁 무렵 술탄의 공주가
하얀 물이 솟는 분수대 옆을 거닐었다.
매일 저녁 무렵 젊은 노예가
하얀 물이 솟는 분수대 옆에 서 있었다.
매일 그의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자신이 타고 있던 차가 퍼져 굉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기 전까지도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닥쳐오기 직전까지 뇌리에 없던 산불처럼,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영 알아채지 못한다. 레온에겐 오직 망할 놈의 원고와 나디아를 향한 망할 놈의 자기중심적인 마음뿐. 멍청이, 이런 멍청이가 따로 없다.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옆 방이나 벌레 소리에는 잠 못 이룰 정도로 예민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 상할 때까지 자기가 뱉어놓은 말에는 영 둔한 기색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우연히 본 것만으로 그 사람의 애인을 예상하며, 만난 지 오래된 친구의 포트폴리오 계획은 듣는 둥 마는 둥 일단 부정하고 본다. 우베 존슨인지 욘존인지가 남을 비웃는 지표가 되는 그는 무례하기 짝이 없다.

‘클럽 샌드위치’와 지적 허영심, 그 알량한 자존심이 대체 뭐라고. 시종일관 훔쳐보면서도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무신경함은 첨삭된 원고를 몰래 들춰보며 내가 어떻게 평가되는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레온은 자기 글을 비판하면 그저 ‘청소 아줌마’의 ‘부적절한’ 코멘트로, ‘이해할 리가 없는 재수 없는 아이스크림 판매원’이 내민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불러낸 나디아에게 일부러 그런 거냐며 ‘날’ 보러왔는데 내 시간을 펠릭스가 뺏고 있다 말할 때. 헬무트가 받은 말기 암 진단은 꿈도 못 꾸고 자기를 밀어낸 ‘문학박사’와 남몰래 협업할까 분노하며 비아냥을 폭발할 때. 그 삐뚤어진 시선들과 어림짐작하는 모양새들은 그래서 하나같이 전부 최악이다.

이기적인 그의 속은 알 길이 없다. 정말로 헬무트의 칭찬이 자신을 우롱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서 그랬는지, 데비트가 서독보다 ‘가난한’ 동독 출신인 점을 굳이 꼬집고 싶었는지, 직업적으로 차별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나디아와 밤을 같이 보내고 지금 이 대화의 중심마저 차지한 그가 꼴 보기 싫었는지. 분명한 건 여기의 모두가 인명구조원을 안전요원이라 하는 레온의 첫마디부터 적대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어떤 감정과 생각의 진폭은 생각하는 것보다 커서 내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난다. 작디작은 알갱이로 나의 가면을 뚫고 나가 이곳의 공기를 좌우하는 흐름과 거슬림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알 듯 말 듯 하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어파이어〉를 관통하는 건 레온의 방어기제다.

불이 붙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겠다는 마음. 그것이 내 경계 이상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를 흐트러뜨리고 무너트리며, 마침내 소멸할 때까지 좀처럼 가만두지 않을 이 낯선 기운으로부터. 그것이 사랑이든 죽음이든. 나디아를 향한 마음이든 데비트를 향한 시기든. 아니면 펠릭스를 향한 부러움이든.

그러니 항상 창틀과 데크 너머로 한 명씩 혹은 둘과 모두를 거리 두고 마주하던 레온이 먼저 다가가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간 장면들은 귀하다. 마치 저 여자와 사랑을 나누면 모든 걸 망칠 듯 그와의 시간을 자꾸 놓치다가도, 동시에 내비치는 아쉬움이 미세한 지각변동을 예상케 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건, 나디아의 무심함과 이에 비견되게 빛을 발하는 다정함이다.

하루는 공주가 갑자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 이름을 알고 싶어. 고향과 부족이 무엇인지도.’

노예는 말했다.

‘제 이름은 모하멧, 예멘에서 왔습니다.

제 부족은 사랑하면 죽는 아스라입니다.’

친함의 동기부여가 될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펠릭스는 완전히 물 같은 사람이다. 항상 먼저 다가와 스며들 줄 안다. 본인만의 세계에 있다가 빠져나오기 급한 레온과 달리 그는 지켜보고 있다가 장난을 걸기도 하며, 오자마자 일만 하겠다는 이에게 바다를 가자고 청하거나, 시큰둥하게 앉아서 책만 읽다 갈 것 같아 수영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말하는 것에 능숙하다.

이는 처음 보는 사람의 시리얼을 기억해 주고 첫 대화 역시 막힘없이 이어가며, 사진을 찍어주거나 주고받는 공놀이를 즐기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낯선 이에게 악수를 건넬 줄 알고, 농담 따먹기를 하며 즉흥적으로 마음을 표할 줄 아는 데비트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조금씩 새고 있는 지붕 보수 공사와 언제 타버릴지 모르는 차를 구하려는 책임감까지 지녔다.

다만 레온의 발화점이 나디아였을 뿐. ‘In my mind.’ 나디아를 처음 훔쳐볼 때 끓어오르는 물소리. 편할 대로 풀어져서 그의 자취를 관찰하는 동안 내내 울리던 노랫소리가 그 전조를 알린다. 아주 지독한 연기(演技)로 발원지마저 알 수 없게 하던 품속의 작은 불씨(욕망)들이 나디아로 인해 차츰 훤해지리라는 것을.

일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수영도 아이스크림도 내빼는 레온을 두고 “안타깝네요.”라고 일축할 수 있는 여유. 생체 발광으로 뒤덮인 바다를 보러 가자 툭 내뱉을 수 있는 용기. ‘왜’ 그랬는지 궁금하거나 불안하면 직접 물어보는 성격. 필요하면 타이름과 지적도 마다하지 않는 솔직함. 한창 빛나는 상호작용 너머로 어둠 속 레온의 시선을 느낄 만큼 기민한 감각.

나디아는 이제 막 만난 이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찰나에 바뀐 분위기와 이들의 상태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어보지 않은 것에 굳이 말을 얹지 않는 미덕과 다른 사람들을 궁금해하는 호기심까지 갖췄다. 그러다가도 원하면 휙 사라진다. 그러니 애정과 인정을 갈구하는 한편 결핍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던 레온이 어색한 자기 고백을 시도할 수밖에.

결국 육풍으로 저지되는 듯했던 불길은 이내 이 산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다. 요란할 뿐 보이지 않던 헬리콥터는 저 멀리 불길을 향해 날아간다. 어느새 공중에는 재가 눈처럼 흩날리고, 불길하던 멧돼지의 울부짖음은 불에 탄 흔적이 선연한 새끼와 그 무리들이 도망 중 내는 소리로 이어진다.

격렬한 소방차의 사이렌만큼이나 스멀스멀 퍼지던 사랑도 그 정체를 드러낸다. 손을 꼭 잡고 끝끝내 함께 타 죽은 두 사람과 이를 마주하며 눈물조차 공유하지 못한 두 사람. 눈치챔과 눈치 보기, 이기심과 이타심, 다가감과 밀어냄, 질투와 어긋남, 침범과 방어를 오가던 욕망들의 말로는 둘 중 하나다. 남김없이 불태워지거나 오랫동안 잔재할 그을림이 되거나.

불타버린 여름은 홀로 남은 한 사람만을 남겨두었다. 바다를 바라볼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더는 알 수도 없게. 처음 본 순간부터 허우적대던 레온을 어떻게 지켜봤었는지, 그건 이제 나디아만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