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양, 🍃 기억, 가장 사적인 몽타주 🍃

코고나다, 〈애프터 양〉

어떤 순간이든 ‘처음’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새로움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것이 삶이고, 서툰 처음은 때로 쓴맛을 남기고, 우리는 종종 후회를 안은 채 살아간다.

중국계 딸을 입양한 부부는 처음 맡는 부모 역할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을 대신해 줄 안드로이드를 들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로봇이 고장 나버렸다.

🍃 기억, 가장 사적인 몽타주 🍃

8살, 내리막길에서 무작정 발을 떼고 넘어져 가며 두발자전거 타는 법을 터득한 순간.
13살, 노을이 내려앉은 하원 버스 안에서 좋아하는 친구와 나란히 앉아 맞춘 화음.
20살, 분주히 걷는 사람들의 웅웅거림 속에서 모든 게 낯설었던 캠퍼스의 첫인상.
혹은, 소심하게 호작질을 해대던 내 손을 덥석 잡은 연인과의 간질간질한 첫 데이트.

중국계 딸을 입양한 부부는 처음 맡는 부모 역할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을 대신해 줄 안드로이드를 들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로봇이 고장 나버렸다.

제이크와 키라는 양이 단순한 지식 제공 로봇을 넘어 자신들은 모르는 딸 미카의 뿌리를 일깨워주기를 기대하며 그를 구매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하지 못한 경험 지식을 제공할 ‘기계’는 새것이길 바랐다. 어쨌든 그들은 양이 고장 난 후에야 그가 신품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양의 흔적을 따라가다 기억 저장장치의 존재를 알게 된 제이크와 키라는 양의 기록을 재생하며 그에 관한 기억을 재구성한다.

양의 기록을 재생할 때, 제이크와 키라의 머릿속에는 그들 각자가 기억하는 그 순간이 함께 재생된다. 저장장치에 남겨진 선명한 양의 기록은 1.85:1로, 인간의 기억은 2.35:1로 영사되는데, 드문드문 부정확하고 반복되는 회상은 자의적으로 편집되는 기억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순간 키라는 양이 울었다고 생각했지만, 양의 기억에서 그는 덤덤하게 “무가 없으면 유도 없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어느 밤 무엇을 보냐고 묻는 딸에게 제이크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고 답한다. 아마도 오차 없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말일 테지만, 사실 그가 보고 있는 양의 파편 역시 양의 의지에 따라 짧게 편집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억은 함께한 사람에 따라 알파, 베타, 감마로 분류되어 있다. 슬픈 과거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흐릿해지듯 알파와 베타 저장소 역시 압축되어 있다. 그 위를 덮는 것은 마치 처음인 것처럼 선명하게 기록된 미카와의 순간들이다.

미카 가족을 향한 양의 시선은 뒤에서, 옆에서, 그리고 아래로부터 천천히 이어진다. 일상에서 쉽게 잊혀지곤 하는 사소한 순간들의 짧은 몽타주는 요나스 메카스의 홈 비디오와 같은 반짝임을 간직하고 있다. 롱테이크나 딥 포커스로 기록할 수 있어도 몽타주를 통해 기어이 기억의 예술로 거듭나는 영화들처럼, 짧은 파편만 남긴 양의 기록은 가장 사적인 몽타주로서 기억으로 남는다.

양에게 과거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기억 저장소 속 세 가족을 향한 사랑 어린 시선도 없었을 것이다. 기억을 들여다보고서야 이를 알게 된 제이크와 키라는 비로소 양을 단순한 상품이 아닌 ‘기억하는 존재’로 재정의한다. 양과 그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이미지의) 언어화를 통해 천천히 작별을 준비한다.

나의 무거운 마음은 표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 있다:

나의 언술이 ‘견딜 수 없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즉각적으로 무거운 마음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_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185쪽.

반면 양과 있을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카는 한참이나 자신의 슬픔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그를 그리워한다. 무엇이든 새로워 감정도 두 배로 느끼는 미카는 양과 가장 닮았다. ‘양과 함께 있고 싶다’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미카는 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인간인 자신과 다른 존재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를 자신의 오빠로 생각함에는 변함이 없다. 오빠가 되는 것 이상의 어떤 역할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서로 다른 나무에서 온 가지들이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양의 가르침처럼, 어떤 것에든 본질을 상정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시선은 둘의 관계를 생동하게 한다.

차를 왜 좋아하세요?
차의 맛을 묻는 거야?
그럴지도요. 맛 때문에 좋은 거예요?
(…)
차의 맛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관심이 생긴 건 아니야.
처음 차에 끌린 건 차의 인상(the idea of tea) 때문이었어.

제이크는 관념으로서의 차에 이끌려 차를 생업으로 삼았다. 가루차는 취급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직업적 신념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매혹한 차의 신비한 성질을 본인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한 잔에 세상이 담겨 있다는 말을 확인하고자 같이 마셔 본 차의 맛을 묻자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답하고, 양이 차에 흥미를 보여도 심드렁해 보인다. 키라에게 양을 수리하는 상황을 충분히 공유하지 않거나 미카의 일부인 아시아인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양에게 떠넘겨버릴 땐, 그가 삶이 줄 수 있는 풍부한 맛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관계에도 작용하는 제이크의 본질주의는 큰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복제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양이 인간이 되고 싶어 했냐고 질문할 땐 무례한 인간중심주의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로 다 정의하지 못하는 두 비(非)인간 양과 에이다의 관계가 훨씬 ‘살아있는’ 것은 자명하다. 제이크가 양에게 속 편히 넘겨버린 정체성의 문제는 사실 제이크 자신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재정의해야 하는 것이다.

제이크의 예상과 달리 양이 겪는 가장 큰 정체성의 문제는 ‘아시아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어디까지나 중국계로 설정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카가 양과 함께한 모든 ‘처음’의 순간들은 양에게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양은 차를 관찰하며 그에 관한 “진짜” 기억을 갖길 원한다. 자신이 가진 수많은 문자화된 지식이 아닌,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들을 미카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양이 미카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제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면 좋겠어요. (…) 저도 차에 관해 더 깊이 느껴 보고 싶어요.

차에 관한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장소에 관해, 시간에 관해서요. 그러면…

그렇게 자신을 사랑한 존재를 잃은 것은 미카에게는 한 세계의 붕괴였을 것이다. 그러나 차의 맛처럼 슬픔도 표현할 언어가 없어 영화에서 미카의 회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후회가 없으면 과거를 들춰볼 이유도 없기에, 후회 없이 양을 사랑한 미카는 기억 장치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미카는 기억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슬픔으로 언어화하는 대신 둘의 언어로 양에게 말을 건다. 슬픔은 그렇게 시간을 따라 미카와 함께 현재를 살아간다.

오빠, 정말 고마웠어. 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좋은 오빠야.
그리고 미안해. 오빠 밉다고 한 건 진심이 아니었어.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

〈애프터 양〉은 계속해서 과거를 건드리지만 결국 영화가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현재다. 양의 기억에 매달리는 제이크와 키라에게도 ‘양 이후’를 상상하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 제이크가 기억 장치를 통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지나온 순간을 그토록 돌이켜 생각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기억의 편린들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음이 모여 하나를 이루듯 흘러가는 시간에 유기적으로 조화되는 존재 방식. 지난 모든 순간이 찻잎처럼 소용돌이치며 구성되는 현재. 영화가 도착하는 지점은 결국 그곳이다.

240125_성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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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

2024년 01월 25일 / 9:17 오후

개봉했을 때 여건이 안 돼 영화관에서 보지 못하고 얼마 전에서야 이 영화를 봤는데, 여담에서 다뤄 줘서 반가웠어요! ‘미카가 양과 함께한 모든 ‘처음’의 순간들은 양에게도 처음이었’고, ‘그래서 양은 차를 관찰하며 그에 관한 “진짜” 기억을 갖길 원한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책『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생각나기도 했고요.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진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 초중반까지도 양을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미카의 정체성 문제를 양이 해결해 주길 바라는 미카의 부모와 비교해서 양이 덜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양은 ‘자신이 가진 수많은 문자화된 지식이 아닌,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들을 미카에게 나눠주고’자 하는데, 이것이 인간다운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인간다운 것일까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다움을 느낀 장면은 양이 미카에서 접목에 비유해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미카를 위로하는 장면과, 미카가 양의 빈 침대에 가족 내 둘만의 언어(중국어)로 오빠가 보고 싶다고 속삭이는 장면이었거든요. 오히려 미카의 부모가 복제인간 아냐?싶을 정도로 기계적이었고요. 보고 나면 많은 생각이 들게 하면서도, 양과 미카의 애정 가득한 눈빛이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 따뜻한 영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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