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사주, ⚓️ 가쁘지 않게 편히 내쉴 때까지 ⚓️

마리 크로이처, 〈코르사주〉

〈코르사주〉 속 엘리자베트는 이전 시시(SiSi)들과 다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로서 40살이 되던 해를 기점으로 상상과 실제가 흘러가는 방향은 하나다. 궁으로의 첫걸음이 어떻게 생존을 향한 첫걸음으로 변모했는지. 과연 그 끝에 참된 해방감이 도래할 수 있을지. 모든 장면이 그를, 그 정황을 포착한다.

⚓️ 가쁘지 않게 편히 내쉴 때까지 ⚓️

쓰러졌던 여성이 들어온다. 숨 막히는 상황에서 홀로 침묵 속에 짓던 공허한 눈빛을 지우고. 한 무리의 여성들을 이끌며 내딛는 한 발 한 발에는 힘이 실려 있다. 그렇게 한 층을 더 올라가기 전에, 그가 우리를 힐끗 쳐다본다. 경계하는 듯이 그렇지만 지켜보라는 듯이. 앞으로 펼쳐질 이 익숙하고 낯선 이야기를. 그로 인해 연신 입혀지고 벗겨질 당신의 코르사주를.

뮌헨에서 30km 떨어진 슈타른베르크 호수 근처 포젠호펜 성. 바이에른 왕국을 통치하던 가문 출신이지만, 그곳에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1837-1898)는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던 그가 1854년 4월 24일, 이종사촌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눈에 들어 언니 헬레네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후 자리에 오른다. 

 

겨우 16세의 나이로 이중제국을 유지하는 상징적 수단이 된 그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쏟아지는 관심 속 엄정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실 법도를 지키면서, 자식들조차 쉽사리 함께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곁에 둘 수 있었던 넷째 마리 발레리를 제외하곤 모두 대비였던 조피가 대신 맡아 키우는 가운데, 그마저도 첫째 조피와 셋째 루돌프는 각각 지병과 자살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

 

이후 스위스에서 어이없는 암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끊임없는 방황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그는 혹자들의 비난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샀다. 수많은 초상화로 남겨진 빼어난 외모나 그에 비견되게 소모됐다던 관리의 시간으로. 학문을 가까이하며, 언어에 능통하고, 운동까지 고루 즐겼다던 재능으로. 적어도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렇게 점철된 삶.  

 

오늘날까지도 그 삶은 여러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회자된다. 1992년 9월 3일부터 막을 올리고 있는 뮤지컬 〈엘리자벳〉은 자유를 갈망하다 서서히 토드(죽음)의 유혹에 빠져드는 모습을, 1950년대에 제작된 3부작 영화 〈시시〉는 천진난만하고 앙칼진 면모를, 넷플릭스 드라마 〈황후 엘리자베트〉(2022)와 독일의 미니시리즈 드라마 〈시시〉(2021-2022)는 시대극으로 재구성된 전기를, 〈엘리자벳과 나〉(2023)는 시녀 이르마의 관점에서 서술된 그와의 동행을 그린다. 

 

그리고 〈코르사주〉(2022) 1877 12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해 1878 10 이탈리아 안코나에 이르기까지사실과 허구로 엮은 1년여의 세월에 초점을 맞춘다.

만수무강하소서 황후시여. 천수를 누리소서. 

황후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천수를 빕니다. 

영원히 아름답길, 언제나 영원토록 아름답길 빕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았을까? ‘영원히’와 ‘아름다움’, 저 두 글자가 짓누르는 무게만큼 버거운 것도 없다는 걸. 아무리 노력해도 옆에서 앞에서 이어지는 말들: 체중 관리기사 소재분방한 기질달라진 얼굴빛본분을 대표하는 얼굴 그리고 황후그런 시선과 평가에 시달리면 차라리 나를 고립시키거나 아예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는 걸. 

 

가라앉았던 몸을 일으켜 물속에서 40초가 아닌 1분 11초나 버텼음을 듣자 문득 가여운 마음이 든 것도, 그런 버거움을 안았을 그 삶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끊길 듯 끊기지 않게 살아남아 “몸은 시들고 헐거워지며 구름처럼 음울해”진 나이, 자신과 같은 여성들의 평균 수명인 마흔에 이르렀으니까. 

 

그러나 숨을 참으며 자신을 녹여버릴지 모를 촛불들을 불어대듯, 모든 의무와 감시들을 소화하며 질긴 호흡을 이어가는 일. 그같은 팍팍한 삶 중에서도 일단 저지르고 보는 반항과 이탈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유는 비단 동정심 뿐만은 아니다. ‘시시(SiSi)’로서 환상과 같은 존재로 신화 속에 자리매김할 때보다 ‘엘리자베트’는 더한 공감과 쾌감을 선사한다. 

 

화장을 하네 마네옷이 작네 크네머리가 기네 짧네무엇을 말하네 마네무슨 표정을 짓네 마네어떤 행동을 하네 마네로 조여지는 여성의 ‘코르셋 대해 여전히 논쟁을 이어갈  있는 지금어떻게 미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낼  있는지 묻고 싶은 여성()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잡을 수 있는 게 없거든. 나 자신 말고는. 

때론 그조차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

그 노력이란 이런 것이다. 구불구불 늘어지는 가닥을 꼼꼼히 땋아 올려 완성한 1kg짜리 머리카락.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교차한 수많은 매듭으로 45cm까지 빈틈없이 죄어드는 코르셋. 주 3일은 얇게 썬 오렌지 조각, 저녁에는 맑은 쇠고기 수프. 문틀에 매달린 링, 방안 곳곳에 자리한 운동기구와 체중계의 존재감. 인형처럼 짓는 옅은 미소와 애써 진정시키는 숨. 

 

혹은 이런 것이다. 세르비아와의 관계, 보스니아 점령, 사라예보 사태 등에 가만히 있지 않고 정치적 소신 비추기. 정해진 궁 생활을 해 나가다가도 원할 때면 여행과 밤 산책을 마다하지 않기. 함께 말을 타는 사이로 혹은 그 이상의 호감으로 베이를 가까이하고 싶어 만남 즐기기. 애정하는 루트비히 앞에선 수행하던 위신을 벗어던지고, 입 안 가득 초콜릿과 죽음을 담아보기.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의 경고와 딸의 질책으로 이어진다 해도. 요제프의 허락과 원망에 다시 얽매인다 해도. 불륜이라는 소문이 거짓임을 증명하듯 마음만 확인하고 물러나거나, 결국은 자기 자리에 다시 돌아가게 되더라도. 엘리자베트는 나를 정의하는 것만큼 나를 채우는 것에 필사적이다. 역할과 욕구, 억제와 해소, 강박과 포기. 서로 다른 의미들이 그의 철저하고도 즉흥적인 면모를 일군다. 

 

이와 같은 모순의 향연에서 감춰지고 응축된 심리들은 아픔을 겪고 있는 자들이 대신 보여준다. 팔다리가 묶인 채 철창 안에 갇혀서 울부짖는 여성. 자식을 잃은 슬픔에 잠겨 울음을 내지 못하는 여성. 간통 때문에 몸을 덜덜 떠는 여성. 매독으로 넋이 나간 듯 굳어버린 남성. 고통 속에 잠깐의 환기를 원하는 남성. 모두들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리던 황후의 정서적 파편들을 대신한다.  

 

분열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시공간. 그것이 마흔 살 이후로는 그려지길 거부하고, 연신 검게 가리고 다녔다던 그가 원한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연기자로서 캐릭터가 가진 제약을 직면했고 또한 공감했기 때문에, 나는 종종 연기를 통해 엘리자베트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려고 했다. 촬영할 때 ‘그 시대에 못 했던 걸 다 할 수 있게 해주겠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 무엇보다도 내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 모두가 ‘척’하는 걸 그만두면 어떻게 될까?”였다.

그리고 그 소망은 한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팬텀 스레드〉(2018)의 알마로, 〈베르히만 아일랜드〉(2021)의 크리스로, 〈안녕, 소중한 사람〉(2023)의 엘렌으로, 〈잉게보르크 바흐만: 사막으로의 여행〉(2023)의 잉게보르크 바흐만으로 분했던 비키 크립스는 이번에도 한계에 부딪힌 여성이 취할 수 있는 대범함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똑같이 식탁을 치며 황제에게 성을 내고손님들에게 기꺼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거나건조한 의사에게 혀를 내밀어 조롱한다공화정이 떠오르고 왕조가 저물어가는데 어김없는 분위기의 공간이나또다시 ‘아름다운‘ 모델로  있어야 하는 갑갑한 상황일 때는 연보라색 담배를 피운다생일날은 헤로인에 취해 역할을 떠넘기고 나른하게 쉬어보더니기나긴 세월을 잘라내듯  손으로 머리카락을 뭉텅이  잡아 잘라버린다더는  참겠으니 그만 작별하고 싶으면 창문과 선미에서 속시원히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이에 발맞추어 고증 대신 ‘다시 쓰기’를 택한 〈코르사주〉는 연출에서도 수많은 이탈들을 감행하며, 또 다른 탈코르셋의 전형을 보여준다. 1970년에 발표된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는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바이올린 음에 악사의 목소리가 얹어져서, 1964년에 발표된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As Tears Go By’는 여름밤의 하프 연주로 등장한다. 

 

장면 곳곳에 걸리는 전구들과 전선, 콘센트와 스위치. 고스란히 노출된 진공청소기와 마차 앞 트랙터, 플라스틱 청소도구, 비상구 표지판 그리고 소화기. 영화 말미에 무심코 등장하는 대형 선박에 이르기까지 당대에 존재했을 리 없는 사물들은 포스트모던한 작품의 색을 알린다. 

 

마치 동시대 사람이지만 함께한 기록이 전무한, 최초의 활동사진 발명가 루이 르 프린스와 엘리자베트가 찍은 한 편의 무성 영화처럼. 카메라 너머 활보하며 웃는 얼굴로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껏 질러대듯, 세기에 없는 만남을 그리고 꿈꾸는 이 영화도 그러하다. 

 

51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어깨 위에 남겨져 있던 닻처럼마리 크로이처 감독이 엘리자베트를 서술하는데 필요했던 것은  상징성이다해방감은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유의미한 감각이니까 막힌 설명 대신 시공간을 어그러트려 우리에게 닿기를 택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것만이 전부일 수는 없다. 엘리자베트 대신 코르사주를 물려받은 마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자신의 마지막 청혼자였을지도 모르는 남성을 황후의 확신으로 저버리고 궁에 남아, 가끔은 구역질 하고 가끔은 부담감에 눈물을 흘리진 않을까. 엄마의 욕심과 넘치는 사랑이 때로는 벅차고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발레리는 요제프가 바라는 가족상 안에서 무사히 클 수 있었을까. 정부로서 자리했을 안나 나호브스키는 정말 낭만 중에 지낼 수 있게 손해가 되지 않는 부탁을 받은 걸까. 

 

엄연히 존재하던 신분제와 가부장제를 가정하고 넘어갈지  다른 여성들의 착취와 방임을 지적해야 할지책임감 없음을 탓해야 할지 마지막 순간마저 선택할  있게  기회로 봐야 할지지나친 죄책감일지 마땅한 비판일지자신보다 작아진 방을 버리고 밖으로 나간 순간 구속에서 벗어난  알았지만 어딘가에 갇힌 것만 같은 익숙함이 따라온다다시 질문해야 하는 때가  것이다과연 무엇이 우리를 참된 해방으로 이끄는지.

개별적 차이를 가지고 시시각각 다르게 구성되는 개인은 매 시간 주어진 역할과 상황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구현한다. 이런 젠더는 반복해서 패러디적 모방의 놀이를 하는 가면 같은 것이고,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극적 행위 속에 구성되며, 반복된 호명에 복종하면서도 완전히 복종하지 못하는 잉여물을 남기면서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이 된다. / 조현준(2014), 『젠더는 패러디다』, p.98.

 

이렇듯 취약성을 관계 속에서 이해할 때 알게 되듯, 우리는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우리 삶이 그런 조건들로부터 해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주디스 버틀러(2021), 『비폭력의 힘: 윤리학-정치학 잇기』, p.66.

여전히 성별 이분법에 근거한 관습적인 여성성을 수행하는 가운데, 존재할지 모를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에 절박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영화에 기대어 그 작은 숨구멍들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의 엘리자베트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약자로서의 각 ‘여성’들이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던 순간을 기억한다.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나를 위해 선택할 때. 정치적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낼 때. 반복되는 불안을 삼키지 않고 부딪히며 성장할 때. 그리고 혐오와 배제에도 사랑하는 법을 잊지 않을 때. 그 모든 초상들을 지켜보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동과 각성은 ‘여성’ 개인으로서 더이상 쉽게 수긍하거나 침묵하지 않겠다는 결심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동시에 이는 나뿐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도 행사되어야 함을우리들이 쥐어야  자유가 되어야 함을 생각한다구조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공통으로 취약하기 때문에복잡다단하게 얽혀 서로 의존해야 삶을 영위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자기를 정립하는 이야기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말고각기 다른 층위의 ‘여성들이 함께 질식하지 않을 방식을 모색해 나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계속해서 멈추지 말라고, 이 영화는 한번 더 그 첫걸음을 떼게 한다.

240201_예은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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