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 무無의 세상 속으로 📽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아티스트〉

〈아티스트〉는 영화가 첫마디를 내뱉은 이래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들 속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꾀했다. 그렇게 반 세기 후 재탄생한, 고요한 흑백의 세상은 할리우드의 배우 조지 발렌타인과 패피 밀러의 사랑과 우정 이야기를 통해 1920년대 변화의 시기를 조명한다.

📽 무無의 세상 속으로 📽

경쾌한 클래식 배경 음악,
4:3의 화면 비율과 레트로한 크레딧,
자막으로 대신하는 목소리,
배우들의 풍부한 몸짓과 표정,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화면,

바랜듯한 빛 표현과 까슬한 필름의 질감까지.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 같은 이 영화는 21세기에 재탄생한 무성영화다. 1927년 워너브라더스의 세계 최초 발성영화(Talkie) 〈재즈 싱어〉가 세상에 첫마디를 내뱉은 이래 무성영화의 전성기는 저물고, 유성영화가 보편화되어 왔다. 〈아티스트〉는 그런 영화계 격동의 시기를 그려낸 영화다.

이 시기를 그린 영화가 이 영화 뿐인 것은 아니다. 최고의 뮤지컬 영화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사랑은 비를 타고〉나 할리우드의 빛과 어둠을 그린 〈바빌론〉 역시 기술적 문제, 무성영화 스타들의 몰락 등 새로운 영화 기술이 가지고 온 변화를 조명했다. 다만 앞선 영화들과 달리 〈아티스트〉는 흑백무성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감독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는 당시의 형식을 어떻게 재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을 제시하기보다는 이전에 존재하던 것을 그대로 불러오고자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선명한 컬러와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소리에 익숙해진 제작 환경 속 연출진, 배우, 그리고 관객에게는 회귀가 도전이 됐다.

너무 정교해져버린 흑백 필름 대신 사용한 ASA 500 칼라 필름, 새롭게 제작된 광학 렌즈. 정숙이 요구되는 오늘날의 촬영장보다는 음악으로 감정을 이끌어내는 현장. 무언의 감정에 도달하는 경험과 과장된 연기를 통한 해방감. 인터뷰에서 나온 개인의 이야기는 ‘처음’이라는 단어 투성이였다. 과거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옛날의 그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은 새로운 경험이 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아티스트〉는 옛것으로 여겨지는 형식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낯선 즐거움을 제공한다. 영화 사운드나 컬러 영화의 발명과 같은 기술의 발전은 더 사실적이고 다채로운 세상으로 관객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고요한 흑백 세상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상상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영화는 다시금 그런 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예를 들어, 소리가 없던 시대에 간자막(Intertitle)은 관객의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해왔다. 발성영화에서 등장 인물의 발화와 관객의 이해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무성영화의 간자막은 필연적인 지연을 낳는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동안 관객은 상상력을 동원한다. 자막이 먼저 등장한다면 관객은 배우의 표정을 상상할 것이고, 나중에 등장한다면 눈으로 본 배우의 대사가 무엇이었는지 상상할 것이다.

영화는 그런 지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기본적으로 〈아티스트〉는 영상이 먼저 나오고, 자막이 나타난다. 하지만 스토리의 클라이맥스에서 그 순서가 역전된다. 조지가 총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이를 막으러 패피가 달려가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간자막 ‘Bang!’이 나타난다. 이때 관객은 찰나의 순간에 패피가 조지의 자살을 막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패피와 나무를 들이받은 그의 자동차는 관객의 믿음을 배신하고, 조지가 살아있음을 방증함으로써 조지와 패피의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만든다. 이는 총소리와 차가 나무를 들이박는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청각이 아니라 ‘Bang’이라는 문자로 표현된 중의적이고 시각적인 언어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다.

한편 〈아티스트〉는 형식뿐 아니라 스토리나 등장 인물을 통해서도 시대를 조명한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무성영화의 인기 속 유성영화가 등장한 시기 두 배우 조지 발렌타인과 패피 밀러의 사랑과 우정이다. 여기서 조지와 패피는 로맨스뿐 아니라 각각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를 표방하는 인물이다.

조지는 명실상부 할리우드 최고 인기 무성영화 배우다. 그가 나오는 영화는 성공이 보장되고, 사람들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목한다. 패피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다재다능하고 통통 튀는 매력의 신인이다. 각각의 배경과 매력을 가진 이들은 헤프닝으로 만나 영화로 가까워졌지만, 발성영화의 등장으로 갈림길에 선다.

무성영화 스타인 조지는 ‘저 따위 미래에는 관심이 없다’며 유성영화를 비웃고 무성영화를 고집한다. 한편 패피는 유성영화를 통해 스타가 된 인물이다. 조지와 함께 작업하며 꿈을 키웠지만, 인기를 얻은 후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배우들은 한물갔다’며 무성영화를 무시한다. 식당에서 기둥을 사이에 두고 등을 돌린 채 묵묵히 밥을 먹는 조지와 마이크 앞에서 인터뷰를 하는 패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만 같다.

이런 조지와 패피가 다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과정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가 대립항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조지의 영화를 본 패피는 다시금 그의 영화가 주는 감동에 자신의 말을 후회하고, 무성영화의 쇠퇴를 경험하고 유성영화의 인기를 목도한 조지는 오만했던 자신을 후회한다. 무성영화가 없었다면 유성영화도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변화를 거부하기만 할 수는 없다.

더이상 입모양을 읽지 못하는 조지의 모습은 무성영화가 저물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말이 그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필름을 태우고 목숨을 끊음으로써 무성영화의 종언을 선고하려던 조지를 구해내는 패피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무성영화의 의미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렇게 패피와 함께 복귀한 조지는 탭댄스를 통해 몸짓의 표현을 극대화한 무성의 방식을 남겨둔 채 유성의 방식을 조화시킨다.

영화의 엔딩에서도 비슷한 태도가 나타난다. 엄밀히 말하면 〈아티스트〉는 부분 유성영화다. 조지의 꿈에 나온 유리잔 소리, 강아지의 짖는 소리, 지나가는 여성의 웃음 소리, 영화 속 패피의 유성영화 〈뷰티 스폿〉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가사 있는 노래, 조지와 패피의 탭댄스 소리, 그리고 마침내 발화된 말소리까지. 무성영화라고 하기에는 다양한 소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무언의 영화이기도 하다. 조지와 패피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조지가 유성영화에 참여하게 되었음에도 발화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영화의 첫마디가 나타나는 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컷’ 소리와 함께이다. 이렇게 등장한 첫 말소리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다. 영화의 배경이 할리우드고, 조지와 패피는 미국 배우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어로 나누었던 대화의 주인공은 조지 발렌타인과 패피 밀러가 아니라, 장 뒤자르댕과 베레니스 베조였는지 모른다. 조지와 패피는 그렇게 또 다른 무언의 영화로 남고, 컷 소리 이후는 〈아티스트〉의 백스테이지인 것이다. 조지는 결국 유성영화의 흐름에 합류했지만, 끝까지 무언으로 남은 그의 영화는 무성영화에 대한 존중이자 그 미美를 끝까지 지키려는 태도가 된다.

–

미셸 하자나비시우스는 흑백무성영화가 사람들에게 낡았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이 아니라 말한다. 많은 흑백무성영화들이 문자 그대로 오래됐을 뿐, 형식 자체는 그저 형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손에 다시 나타난 형식은 선명한 화면과 소리에 익숙해진 걸 넘어, 아이맥스, 돌비와 같이 과잉에 열광하는 현대인에게 무無의 미학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낯선 무성영화에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며 관객이 환불을 요구한 해프닝도 있었다. 이런 관객의 반응은 리뮈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보고 놀라 달아났던 영화 초기의 관객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초기의 관객이 지금껏 본 적 없는 것에 놀랐다면, 현대의 관객은 이미 존재해왔던 것을 낯설게 느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모두 흑백무성영화로 돌아가야 한다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수많은 색 없고 소리 없는 영화들에 보내는 헌사이자, 그들이 주는 즐거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시도다.

240208_유안 보냄.

〈

이전 여담 읽기

⚓️ 가쁘지 않게 편히 내쉴 때까지 ⚓️

다음 여담 읽기

🧬 삶과 죽음 사이의 나 💀

〉

댓글 달기 댓글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