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해부도, 🧬 삶과 죽음 사이의 나 💀

루시엔 카스텡-테일러·베레나 파라벨, 〈인체해부도〉

하버드 대학교 감각민족지연구소(Sensory Enthnography Lab)에서 탄생한 다큐멘터리 영화 〈인체해부도〉는 의료용 카메라를 통해 몸 속으로 들어간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음에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뇌, 장, 척추, 눈 등은 우리에게 충격을 남긴다. 이렇게 서사 없이 나열된 수술과 병원의 모습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다가가는지 묻고 싶다.

🧬 삶과 죽음 사이의 나 💀

루시엔 카스텡-테일러·베레나 파라벨, 〈인체해부도〉

*주의! WARNING!

이 글은 사람 장기와 시체의 사진,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2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이 영화를 만났다.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상영작을 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중에 〈인체해부도〉는 따지자면 보고 싶지 않은 작품에 속했다. 이름처럼 고어하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영화제 마지막 관람작이 트라우마를 남길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후 오히려 일종의 심리 치료를 경험했다. 당시 난생 처음으로 가족의 병마와 죽음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슬픔과 두려움으로 자주 잠 못 이루곤 했다. 이런 나에게 영화를 통해 완전한 타인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는 경험은 슬픔을 잠시 접어두고 죽음의 본질에 접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물론 영화가 모든 고민을 해결해 줬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실험적이면서도 힘든 영화를 가져온 것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한편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들에게 투박한 위로를 건네기 위함이다.

인체해부도,
De Humani Corporis Fabrica,

해부학의 아버지 베살리우스가 펴낸 세기의 역작에서 따온 이름처럼 카메라는 인간의 신체를 해부한다.

화면에 가득 찬 눈동자와 이를 찌르는 날카로운 의료도구,

피를 내뿜는 성기,
피가 쏟아지는 어느 장기의 내벽,
배를 가르고 탄생하는 새 생명,
척추를 세게 두드리는 망치.

영화의 장면을 텍스트로 나열하고 있자면 일부 마니아만이 열광하는 고어 영화 같다. 하지만 이 모든 장면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실제 수술 현장이다.

세계 최초의 카메라는 눈으로만 볼 수 있던 세상을 우연히 박제했다. 그렇게 탄생한 카메라는 닿을 수 없던 저 멀리 하늘 너머를 담아내기도 하고, 아무리 눈의 초점을 모아도 볼 수 없던 미세한 것들까지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몸 ‘밖’의 관찰은 인간의 사고를 확장했다. 하지만 우리 몸 ‘속’의 관찰은 보다 금기시되어 오며 생물학자, 의료인, 해부학자 등 일부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인체해부도〉는 이런 상황에 물음표를 던지고 밖이 아닌 안으로 들어가는 영화다.

 

이 작품은 인류학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현재 루시엔 카스텡-테일러가 이끌고 있는 감각민족지연구소에는 논문, 발표, 학회와 같이 정형화된 연구에 회의와 한계를 느낀 인류학자들이 모여있다. 특히 〈인체해부도〉의 두 감독은 외부인으로 경험한 권위적인 학문에서 벗어나, 소리와 이미지만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2012년에 처음으로 협력하여 고프로 카메라 12대와 함께 어선에 올랐다. 그렇게 바다 위 우연한 순간과 그 전복을 병치한 다큐멘터리 영화 〈리바이어던〉을 만들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많은 다큐멘터리가 갖고 있는 의도된 연출과 내러티브를 최소화하여 세상을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코멘트와 인터뷰가 없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다. 이런 그들의 작품에는 거창한 내용보다 학구적인 주제 선정과 영화임을 잊지 않은 미장센이 있다.

 

〈인체해부도〉 역시 이런 기조 위에 만들어졌다. 베레나는 보스턴 지역의 일간지를 보다 흥미로운 기사를 접했다. 어느 의대생이 해부 실습을 하기 위해 시신을 들추는 순간 자신의 고모였음을 깨달았고,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의 일화였다. 베레나는 이 기사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몸을 완전히 과학에 맡겨 버리는 작금의 상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물음을 따라가던 베레나와 루시엔은 프랑스의 공공병원에서 마주한 신체의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렇게 의학적인 시선으로 신체를 그려낸 영화가 탄생했다.

감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내부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두려움이 다가오기도 한다.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의료용 카메라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클로즈업한다. 이렇게 클로즈업된 화면이 주는 압박감은 좁은 곳에 갇혀있으면서도 광활한 자연, 심해, 우주를 볼 때 압도당하는 것처럼 보고 있는 이들을 공포스럽고 무력하게 만든다. 이런 점이 이 영화가 공포 영화로도 비춰질 수 있는 요소이다. 인간이 대적하거나 거부할 수 없고, 또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것에서 공포를 느끼는 일종의 코즈믹 호러인 셈이다.

 

오로지 디제시스 내의 소리로만 이루어진 음향은 공포를 심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몸 속에 들어간 카메라는 맥박 소리와 함께 웅웅거리는 몸 밖 의료인의 소리만 잡아낼 수 있다. 의사 혹은 간호사 역시 그저 하나의 직업이기에 때로는 무심하게 들리기도 하는 희미한 목소리 뒤 다시 “우리가 우리의 몸을 완전히 과학에 맡겨 버리는 작금의 상황”이라는 감독의 문제의식이 떠오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을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보게 만들면서 공포가 사그라들기도 한다. 긴박한 수술의 순간, 솟구치는 피, 마침내 살려낸 사람. 혹은 잔인하게 파헤쳐진 시체, 서걱서걱 갈리는 몸, 적나라한 내장. 극적으로 과장된 미디어 속 인간의 신체와 달리 실제는 생각보다 무미건조하다.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화면은 신체가 낱낱이 해체되고 있음에도 그로테스크한 시선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 피도 내장도 죽음도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신체 속뿐이 아니다. 감독의 핸드헬드 카메라는 작은 립스틱 카메라가 신체의 구석구석을 탐구하는 것처럼 병원의 구석구석을 탐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병원을 빙빙 도는 노인을 마주하기도 하고, 불만을 표현하는 의료인의 대화를 포착하기도 하고, 어딘지 모를 병원의 통로를 탐색하기도 하고, 죽음과 대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몸의 ‘외부’는 ‘내부’와 끊임없이 병치된다.

 

이를 보고 있자면 현대인이 죽음과 유리되어 자란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인간은 죽음뿐 아니라 본인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을 통해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병듦, 늙음과도 모두 단절된 채 살아간다. 반면 병원은 그 모든 것이 모여있는 공간이다. 늙거나 병든 수많은 이들이 병원에 머무르고, 죽음 역시 병원에서만 선고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공간에서 생로병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카메라를 따라가는 경험은 어쩌면 고타마 싯다르타가 네 개의 문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을지 모른다.

 

싯다르타는 질병, 노화, 그리고 죽음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았다. 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 혹은 훌륭한 종교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 아래 아들이 위대한 왕이 되었으면 했던 정반왕은 싯다르타의 삶을 오로지 생생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그러나 이런 환경은 오히려 그가 목격한 늙은 자, 병든 자, 죽은 자가 보다 충격적으로 다가가게 만들었다. 〈인체해부도〉에서 이상한 말만 반복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노인, 병을 고치는 수술, 그리고 죽은 것인지 아닌지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이는 시체 등은 싯다르타가 목격한 것과 비슷한 광경이 된다.

 

그는 이후 출가하여 수행하며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를 직시하고 실체 없는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만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나름의 간접적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도 부처와 같은 것일까?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가 명확히 제시하는 메시지 같은 건 없다. 그렇기에 사유는 온전히 관객에게 남겨진 몫이 되고, 깨달음 역시 각자의 것으로 남는다.

병듦, 늙음, 죽음 뒤에는 고된 일상을 끝낸 직원들의 파티와 그들의 얼굴이 합성된 벽화가 길게 이어진다. 여기서 시끌벅적한 소리와 역동적인 동작으로 그려진 벽화, 번쩍이는 조명이 생동한다. 이런 죽음의 두려움 뒤 나타난 생동은 우리 모두가, 내가 죽음을 향해 매시간 달려가고 있는 존재란 걸 알면서도 다시 한번 삶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석가모니가 마지막 북문에서 수행자를 만나 출가를 결심한 것처럼 일종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태어남과 존재함의 이유를 찾으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어느 스님의 말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생로병사의 실체 없는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고통이 된다. 그보다 우리를 살아가게끔 하는 건 그리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작은 행복들의 연속일 테다.

 

이렇게 내가 〈인체해부도〉로 인간을 낱낱이 해부하면서 얻은 것은, 죽음 속에서 찾아낸 삶의 이유다.

240307_유안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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