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마이너리티 리포트〉
2054년 미국은 “살인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범죄예방 시스템 ‘프리크라임’의 전국화를 앞두고 있다. 프리크라임은 세 명의 예지자가 내리는 예언을 통해 살인 사건 전에 범죄자를 먼저 체포하는 방법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치안 시스템이다. 이렇게 완전해 보이는 시스템은 범죄예방국 경찰 팀장인 앤더턴이 사흘 후 살인을 저지른다는 예언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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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 〈마이너리티 리포트〉
“반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방 연합정부 범죄예방국은, 범죄예방 시스템을 통해 살인 혐의를 받고 자유와 특권을 박탈당한 존 앤더턴 전 국장을 추적하여 체포하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_필립 K. 딕, 『마이너리티 리포트』, p. 96
유괴 사건으로 아들과 평화를 모두 잃은 앤더턴은 낮에는 프리크라임 특수경찰팀 팀장이고, 밤에는 마약에 취해 실종된 아들 영상을 반복 재생하는 중독자다. 영화 초반, 프리크라임을 신봉하는 그의 앞에 ‘근본적 역설’을 운운하는 위트워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시스템의 첫 번째 딜레마가 제시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범행을 막은 이상 범죄는 일어나지 않고, 법을 어기지 않은 사람을 체포해서는 안 되기에 처벌은 타당하지 않다. 즉, 프리크라임은 “법적 오류”를 겪고 있다. 위트워의 근본적 역설 이야기는 이후 영화의 마지막, 두 번째 딜레마로 이어진다.
앤더턴은 위트워의 의견을 무시했지만, 세 명의 예지자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아가사가 보여준 익사 살인 사건 때문에 시스템 속 오류를 확인하게 된다. 예지자는 총 세 명이므로 같은 내용의 예언 영상이 세 개여야 하지만, 오직 두 개의 영상만 저장된 사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오류의 의미를 고심할 여유도 없이 앤더턴은 예비 살인자의 공에 이름이 새겨지며 인생의 경로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도망친 그는 프리크라임을 발명한 ‘아이리스 히네먼’을 찾아가고 시스템의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폐기돼요.시스템이 완벽하다고 알려져야 하니까요. 오류의 여지를 인정하면 시스템의 효율성에 문제가 생기죠. 일부 용의자의 미래는 예언과 달랐을 수도 있어요.”
앤더턴은 예언자 셋의 예언이 엇갈릴 수 있다는 점과 가끔 한 명이 다르게 보기도 한다는 점을 알아낸다. 이에 더해 한 명이 다르게 본 “소수 의견의 리포트”는 예비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가능성의 증거이기 때문에 폐기된다. 이제 그는 도망쳤던 프리크라임 내부로, 족쇄에 묶인 채 미래만을 봐야 하는 예언자들의 “사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아가사의 몸속에 내장된,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가능성을 찾기 위해.
앤더턴은 아가사의 예언 덕분에 추적을 따돌리고 레오 크로우가 머무는 호텔의 위치도 찾아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가사의 예언(“당신은 미래를 봤으니 바꿀 수 있어요.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요”)이 들려오고 앤더턴은 미래를 바꾼다. 예정됐던 살인 시각은 지났고, 자발적 살인은 아닌 쪽으로. 그리고 앤더턴은 모든 사건 뒤에서 음모를 꾸민 배후가 있음을 눈치챈다.
“완벽하다고요? 결함은 인간에게 있죠. 항상이요.”
영화 초반에 위트워가 지나가듯 말한 이 메시지는(스필버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비 범죄자가 범죄를 그만둘 가능성, 즉 ‘자유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예언 하나가 다르게 나오는 미래를 알게 된 인간의 자유의지가 바로 시스템의 두 번째 딜레마다. 그래서 사건의 배후였던 국장 버지스의 총구가 앤더턴을 겨냥하며 근본적 역설은 재고된다. “당신은 딜레마에 빠졌어. 나를 안 죽이면 범죄 예방 시스템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고 나를 죽이면 당신은 체포되지만, 시스템이 옳다는 게 입증되겠지. 자, 이제 어쩔 거지?” 이때 버지스는 예언대로 앤더턴을 쏘는 대신 자신의 배를 쏘며 프리크라임의 실패를 입증한다.
결정론적 입장인 프리크라임은 인간을 정해진 미래를 수행하기 위한 행위자로 인식한다. 하지만 오히려 미래를 알고 있는 앤더턴과 버지스같은 독특한 경우에는 예견된 미래가 현재의 행위를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정론적 세계관 안에서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은 변수 자체이거나 변수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X가 L의 예측을 알게 된 순간, 예측은 결정론적 힘을 잃게 되고 새로운 상황을 기반으로 새로운 결정론적 예측을 시작해야 하는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 “모든 것을 아는 관찰자, 라플라스의 악마 L은 행위자 X의 뇌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과 과정을 꿰뚫고 있다. L은 빈틈없는 연역을 통해서 X가 미래에 내릴 결정과 행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L은 이 사실을 X에게 알려줄 수 있지만, X가 이를 알게 되는 순간, 예측은 결정론적 힘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L이 X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X가 알게 되면 이 사실은 X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결과 결정론적 예측의 출발점이 바뀌고 이로써 결정론적 예측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L은 이 새로운 상황을 기반으로 새롭게 예측을 시작해야 한다.”
_권수현. (2008). 자유의지와 윤리적 책임. 사회와 철학,(15), 20.
영화를 필름 누아르적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스필버그는 블리치 바이패스 과정을 통해 얼굴을 훨씬 창백하게 만들어 어둡고 거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앤더턴이 안구 이식 수술을 받은 직후에 특수경찰팀이 들이닥치며 긴장감이 조성되는데, 이 장면에서 스필버그의 그러한 열망이 돋보인다. 로봇 ‘스파이더’의 빠른 움직임을 천장에서 포착한 듯한 연출과 이식 수술의 조악함, 굴러가는 눈알을 잡으려는 톰 크루즈의 모습, 아가사의 고통스러운 비명 등은 그가 추구했던 필름 누아르의 특별한 톤이 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스필버그가 그러한 톤 위에 그려낸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휘두르면 눈앞의 스크린 정도는 쉽게 조작 가능하고, 자동차가 수직 이동까지 하는 최첨단 세계이다. 하지만 신원 확인을 위해 망막을 포함한 개인정보를 내어줘야 하고, 길을 걸을 뿐인데도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광고들의 소음을 견뎌야 한다. 그가 창조해 낸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세상은 현재 미국의 ‘외양’에 비해 더 통제적이고 암울하다.
스필버그는 상상력을 시각화하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쏟았으나, SF 장르가 시도하는 기술적 진보에 대한 경고를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투자하지 않았다. 총알 한 방, 악인 한 명의 최후라는 결말로 세계관의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시스템은 무너졌고, 수감자들은 풀려났고, 주인공은 가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예지자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스필버그가 말한 대로 인간은 자유롭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워야 하는가? 전자는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자유의지)지만, 후자는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 즉 인간의 자율성 범위의 문제다. 좋은 목적을 위해, 그리고 그럴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프리크라임 같은 거대 시스템을 만들어도 되는가? 영화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속 앤더턴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시스템의 유지를 선택한다. 그곳에는 여전히 프리크라임이 존재하고 살인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성이 묵살된 채 감금된 예비 범죄자 혹은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나는 시스템의 딜레마를 지적했던, 시스템의 우두머리인 버지스에게 살해됐던 위트워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중 누구도 유죄가 아니다. 운명은 행위자들이 미래를 새롭게 알게 됨으로써 개척될 수 있었다. 프리크라임은 자유의지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공리주의적이다. 살인 행위를 막고 그럼으로써 사회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공권력에 의한 강제 구금은 당연하다. 구조는 늘 개인을 구조의 존속을 위한 구성요소로 전락시킨다(정정한다. 구조의 존속을 위한 구성요소로 전락한 개인은 구조와 구분될 수 없다. 이 글은 영화 속 앤더턴을 프리크라임에 국한한 ‘구조’에서 튕겨져 나온 개인으로 간주한다). 눈을 바꿔 낀 앤더턴은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고 말한 소설 속 앤더턴의 말처럼, “눈을 항상 크게 뜨고 있어야” 한다.
240516_수연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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