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가 잘 알려져 있지만, 저는 1990년대 제작된 팀 버튼의 모던 에이지 시리즈를 더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배트맨 리턴즈〉는 배트맨이 상대적으로 덜 빛나 보이게 할 정도로 서브 인물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덜 영웅적인 영웅과 사회의 계급 문제를 꼬집는 매력적인 악당들, 팀 버튼 특유의 으스스한 연출까지. 언제 봐도 좋은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싶어요.
🦇 “언제까지 배트맨만 기다릴 거야?” 🐈⬛
팀 버튼, 〈배트맨 리턴즈〉
SF 하면 무엇을 떠올리시나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두려움을 주는 슈퍼 컴퓨터와의 조우일 수도,
〈블레이드 러너〉처럼 먼 미래에 관한 공상과학적 상상일 수도,
혹은 〈E.T.〉처럼, 두렵지만 조심스럽게 낯선 존재에게 다가가 보는 호기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SF 영화의 범주는 너무도 넓기 때문에 무얼 다루어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고민이 많았답니다. 여태 여담을 해 오면서 영화 선정에 가장 고심한 주제인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여태 SF 영화를 아예 다루지 않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SF의 범주에 넣기엔 좀 모호한 구석이 있지만, 불현듯 떠오른 영화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배트맨 시리즈를 좋아하시나요? 고백하자면 저는 모두들 마블을 보며 자랄 때 배트맨을 보며 자란 어린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슈퍼히어로보다는 안티히어로를, 그리고 디스토피아와 아포칼립스물을 사랑하는 지금의 관객이 되었네요. 사실 비평적으로든 대중적으로든 가장 성공한 배트맨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일 거예요. 특히 〈다크 나이트〉(2008)는 영화의 배경을 세계금융위기 직후의 불안한 미국으로 옮겨와 단순한 영웅담 이상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고, 여기에 슈퍼히어로 무비로서는 처음으로 히스 레저가 오스카를 수상하며 슈퍼히어로 무비의 작품성이 인정받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죠.
그런데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보다 조금 앞선, 배트맨 모던 에이지 시리즈입니다. 1990년대 제작된 모던 에이지 시리즈는 〈웬즈데이〉 〈비틀쥬스〉 〈유령신부〉 등을 연출한 팀 버튼 감독이 처음 열었어요. 그래서인지 팀 버튼 특유의 기괴함이 연출 곳곳에 묻어나는데, 이것이 고담시의 음산함과도 아주 잘 어울립니다. 시간이 지나도 저는 여전히 이 시리즈가 가장 좋더라구요.
특히 〈배트맨 리턴즈〉는 배트맨이 상대적으로 덜 빛나 보이게 할 정도로 서브 인물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포스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영화에서 배트맨의 주된 적은 펭귄과 캣우먼입니다.
펭귄은 두 손가락이 붙은 채로 태어나 흉측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버려져 하수구 속에서 펭귄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지하에서만 살던 그는 혜성처럼 나타나 고담 시장의 아이를 구하고 사람들의 환심을 얻습니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추적해 ‘오스왈드 코블폿’이라는 본명도 알게 되고, 도시를 안전하게 만들겠다며 시장에까지 출마하죠. 그 모든 과정에 시민들은 동정하고 그에게 열광합니다. 그러나 브루스 웨인(배트맨)은 그를 영 탐탁지 않아 합니다.
펭귄이 등장하고 난 후 오히려 도시에는 흉흉한 일이 더 많아지는데, 설상가상으로 배트맨에 도전하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여성들을 위협하는 괴한을 물리치고 “언제까지 배트맨만 기다릴 거야?”라고 시니컬하게 묻는, 배트맨처럼 검은 수트를 입은 캣우먼이죠.
그런데 이 둘이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추적하다 보면 이 작품의 진정한 빌런이 등장하는데, 바로 고담 시의 재벌 맥스 슈렉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백화점을 경영하는 그는 발전소를 설치해 시민들의 집에서 전기를 훔쳐 와 비축하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시장의 반대로 실현에 어려움을 겪고 있죠. 갑작스럽게 펭귄이 시장에 출마하게 된 것도 모두 맥스의 감언이설 때문입니다. 위협적인 존재인 펭귄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원하는 바를 수월하게 이루겠다는 것이죠.
캣우먼의 등장도 맥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캣우먼의 정체는 맥스 슈렉의 비서였던 셀리나입니다. 서툴기는 해도 자신의 일에 늘 최선을 다 하고 일 욕심도 있죠. 그러나 셀리나가 나서려 할 때마다 비서의 ‘본분’을 운운하며 무시해 버리는 상사 때문에 셀리나는 위축되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셀리나는 맥스의 비밀스러운 계획에 대해 알게 되는데, 자신의 계획을 알게 된 그녀를 맥스는 가차없이 건물 아래로 밀어 떨어뜨립니다. 이전부터 자신을 무시해온 상사에게 배신까지 당하며 ‘흑화’한 셀리나는 캣우먼으로 환생해 심판자를 자처합니다.
셀리나가 캣우먼의 아홉 개 목숨 중 하나를 사용하여 직접 맥스 슈렉에게 전류로 죽음을 선사하는 마지막 장면은 몇 번을 봐도 통쾌합니다. 제가 이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다른 손쉬운 방법도 있었겠지만, 서민에게 돌아가야 할 자원을 이용해 간악한 계획을 꾸렸던 이에게 바로 그 자원을 이용해 응징하는 주체가 셀리나라는 점이 이 영화를 단순한 영웅담을 넘은 계급 서사로 만듭니다.
배트맨이 전통적인 영웅상과는 달리 ‘어둠을 대변하는’ 영웅인 만큼, 〈배트맨 리턴즈〉는 다양한 인물의 어두운 면들을 조명해 그들이 왜 악당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렇기에 악인들이라도 그 사정을 알게 되면 섣불리 선악을 단정하기 어려워지죠. 그만큼 악당들에게 매력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등장인물이 많지만 그들 모두를 섭섭지 않게 조명하는 팀 버튼의 연출을 만나 영웅보다 악당이 빛나는 시리즈가 탄생했습니다.
히어로 영화이지만 무엇보다 우리 주변의 가장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 그래서 그들과 ‘공‘존하는 세계를 ‘상‘상하게끔 한다는 것.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SF라고 감히 말해보고 싶습니다.
240718_성하 보냄.
영웅 서사에 관심 없어 배트맨 시리즈를 아예 안봤었는데 “언제까지 배트맨만 기다릴 거야?” 라는 제목에 이끌려 팀버튼의 배트맨까지 찾아 보게 되었네요. 배트맨 얘기가 하나도 없는 정말 여담 ㅋㅋ 인 레터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