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카 다미안, 〈환상의 마로나〉
‘개들이 곧 나의 선생님’이었다고 말한 안카 다미안 감독의 〈환상의 마로나〉는 아홉, 아나, 사라, 마로나라는 네 개의 이름으로 불렸던 개의 삶을 담아낸다. 인간을 처음 사랑하게 된 유년기와 희망을 버리는 법을 알게 된 청소년기를 거쳐 어느덧 삶의 가치까지 발견하게 된 노년기까지. 애니메이션의 강점을 극대화하며 마로나의 눈에 비치는 세상을 아름답고 자유롭게 그린 영화다.
🐶 세 시부터 벌써 행복해지는 법 🦊
인간은 우리 말을 알 필요 없지만 우리는 인간을 이해해야 해
자신을 지키려면 인간의 말을 배워라
개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공생 관계를 이뤘던 전적이 있지만, 현재 인간중심주의로 자전하는 지구에서 생존을 위해 개가 필요한 인간은 없다. 이제 개들은 동료와 애완견의 역사를 지나 ‘반려동물’로 불린다. 진보적으로 보이는 이 단어가 개와 인간의 관계를 자칫 낭만적으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한다. 물론 과거에 비해 풍족하고 안전하게 지내는 반려동물의 수는 증가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개들을 소유하고 있다.
개는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히 의존해 생존한다. 안전한 울타리인 집과 주인이 사라지면 개는 차도와 야생동물, 굶주림과 추위 등 목숨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노출되고 생존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반려동물은 자신을 위하는 인간의 존재가 사라질 때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남겨진다.
의존 정도에 차이가 발생할 때 권력관계가 탄생한다. 내가 너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네가 내게 의존하는 것이 더 클 때, 우리 사이에 권력이 만들어지고 그 권력의 행위자는 내가 된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나의 개를 좋아하고 정을 주기에 어느 정도 그에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다.
죽을 만큼은 아닌 정, 인간은 개에게 그 정다운 마음을 주었다. 그래서 없으면 안 되고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다가 결국 존재의 필요를 깨닫는다. 하지만 개는 마음이 필요보다 선행하지 않는다. 마음은 그의 자의로, 필요는 세상에 의해 동시에 일어난다. 아무래도 인간과 개는 그런 사이, 그런 처지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 장면이 다소 갑작스럽다고 느껴질지라도 진실하고 솔직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영화가 ‘그런 처지’를 은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진 말이지만 개는 온전히 개로 존재할 수 없으니까. 우리의 시선은 항상 ‘인간의 개’였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개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마로나가 “영점의 영점”에서 들려주는 ‘개의 인간’ 이야기를.
다들 괜찮다면 내 인생의 영화를 돌려보려고 한다
죽을 때는 그렇다고 들었다
인생이 영화처럼 스쳐 간다고
나는 엄마 뱃속에서 아홉 번째로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집으로 보내졌다. 덜덜 떨며 도착한 그 집에서 나를 보고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12분짜리 아빠 개를 만났고 며칠 후 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그 주변에는 음험함이 흘렀고 초록색과 빨간색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입에서 구름을 내뿜었다. 누군가에게 주워진 나는 술병을 베개 삼아 자고 있던 인간에게 팔렸는데, 그 주정뱅이가 나의 첫 번째 인간이다. 그에게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아나의 마놀
벽과 딱딱한 마루가 있고 괜찮아 보이는 매트리스와 화분 속 식물이 있는 작은 집. 팽팽하지만 흐물거리기도 하는 고무줄 남자가 바구니에 쿠션을 깔고 “포근한 네 잠자리”라고 말하자 그 집은 내 두 번째 보금자리가 되었다. 자신을 곡예사라고 소개한 고무줄 남자의 이름은 마놀. 그가 내게 마놀의 ‘아나’라는 이름을 주었다. 한순간에 나만의 보금자리와 나만의 이름, 나만의 마놀까지 갖게 되었다. 갑자기 날아든 세 개의 큰 행복에 겁도 먹었지만 난 “마놀과 함께라면 최고로 행복했다.”
인간들은 그대로인 것보다 새로운 것을 원했는데 그것을 ‘꿈’이라고 불렀다. 행복을 몰라서 하는 소리지만 그날 나는 마놀의 행복을 위해 떠났다. ‘달의 서커스’가 마놀만 원하고 아나를 원하지 않아서. 마놀은 거절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말했지만, 그에게서 불행의 냄새가 나서 떠났다. “그날 밤 배운 게 있다. 매일 마지막인 것처럼 내 인간의 얼굴을 핥을 것. 언젠가 정말 마지막이 될 것이므로.”
사라의 이스트반
사랑하는 것들에게서 도망쳤던 그날, 나는 우리의 작은 집과 엄마와 형제들이 자꾸 생각나 계속 잠 속에만 머물렀다. 다시 일어났을 때 소시지 냄새가 나는 인간이 찾아왔는데 그가 나의 두 번째 인간인 이스트반이다. 그는 나를 ‘사라’라고 불렀다. 나는 그 최고로 아름다운 남자와 심장을 옥죄는 이 밤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드디어 함께하게 된 순간에 난 이스트반에게서 “방치할 조짐”을 맡았다.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에게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가 떠난 밤에 심하게 당했다. 접시가 날아왔고 피를 흘렸고 너무나 아팠다.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고 했지만 나는 바구니에서 벽장으로 내쫓겼고 그러다 계단으로. 마지막은 마당이었다. 결국엔 이스트반이 그토록 좋아하던 ‘공놀이 시간’에도 이별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면 마지막의 냄새가 난다. 그건 녹슨 냄새, 썩은 낙엽 냄새다.”
마로나의 솔랑주
나쁜 인간들에게서 도망쳐 스러져 있었을 때, 나의 작은 인간 솔랑주가 찾아왔다. 그때 나는 조금 회의적이었던 탓에 “행복은 고통으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아이를 만나고 삶에서 가치 있는 순간을 발견했다. 그 집에 살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달의 서커스’를 보았고 울고 싶었다. 요상한 고양이와 동거했고 날 내다 버리겠다는 할아버지를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려냈다.
그 후 나의 작은 인간이 조금 커버렸을 때, 산책하다가 나무에 목줄을 걸고 가버렸을 때 나는 따라갔다. 무척이나 달렸고 내 인간들을 생각했고 솔랑주가 “마로나!”라며 소리쳤다. 나를 쳤던 차는 잠깐 주춤했지만 이내 다시 달려갔다. 아스팔트 위의 얼룩이 된 나를 솔랑주가 마지막으로 쓰다듬었다. “모든 분야가 가능하다. 쓰다듬는 손길만 있으면.”
그가 공 던지기를 좋아해 공놀이를 했다
공 쫓는 건 안 좋아해서 내가 했다
인간의 행복한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행복해하는 인간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공놀이를 한다는 마로나의 이야기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마놀의 ‘아나’가 아닌 ‘나만의 마놀’을 통해서 우리는 견고하게 자리하던 정의들에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반려동물이 주인이 아닌 “내 인간의 냄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지. 개들이 각자의 마놀을 사랑하고, 사랑해서 길들여진 상태와 비록 ‘그런 처지’에 머물러 있지만 그런 마로나를 사랑하고, 사랑해서 길들여진 인간의 상태. 그런 바보 같고 애틋한 상태가 있을 것이다.
“길들여진다는 게 무슨 뜻이니?”
“그건 너무나 잊히고 있는 일이지. 그건 ‘관계를 만들어 간다’라는 뜻이야.”
어린 왕자의 질문에 여우는 덧붙여 이렇게 설명한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벌써 난 행복해지는 거야”라고. 장미보다 짙고 떠오르는 행성들보다 반짝거리는 그런 상태를, 그런 행복을 잊지 않길 바라면서 썼다.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떤 개에게 세 시라는 사실을.
230427_수연 보냄.
_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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