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은, 〈고양이를 부탁해〉
인천의 겨울바람만큼이나 매서운 첫길을 뗀 다섯 청년이 있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지영, 취업에 성공한 혜주, 자유를 꿈꾸는 태희,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비류와 온조까지. 같은 상고를 졸업했지만 각기 다른 스무 살에 진입한 이들을 통해 정재은 감독은 2000년대를 넘어 세대를 아우르는 청년상을 그려낸다.
🐈 첫길을 내디딘 다섯 고양이들을 부탁해 🐈⬛
[첫-길]
처음으로 가 보는 길. 또는 막 나서는 길.
‘첫길’을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하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어떻게 첫길에 모든 것이 익숙해지겠느냐?” 그렇다. 난생처음이라 어색하기만 한데 도통 정답마저 보이지 않는 초행길. 들이받을 용기가 없는 이상 전진하기 어려운 생로. 모든 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데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꾸준한 노력과 조금의 운이 따른다면 언젠가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시간이며 감정이며 쏟아부은 결과가 초라한 말로일까 싶어 나는, 우리는 섣불리 겁부터 먹는 게다.
물론 의지와 상관없이 마땅히 걸어야만 하는 길도 있는 법이다. 스무 살이 그렇고, 이십 대가 그렇고, 청춘이 그렇다. 고작 앞자리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제 제 쓸모를 몸소 증명해야만 한다. 아픔마저 낭만으로 포장하지만 어리숙함은 쉽사리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 알아서 눈치껏 적응해야만 한다. 남부끄럽지 않은 행복의 물성을 경험하기 위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각개전투한다. 과정조차 결괏값이 있어야 들여다볼 정도로 경쟁이며 자극이며 포화한 사회. 그곳에서 결혼은 무슨 연애도 포기한 채 밥벌이를 찾아 아등바등 첫길을 걸어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20년 전 대한민국의 청년들 역시 비슷한 첫길을 맞닥뜨렸나 보다. 같은 교복을 입고 함께 사진을 찍던 다섯 친구는 이제 일상을 공유하기 힘든 스무 살이 되었다. 빽으로 들어간 증권 회사의 경리 자리에서 제 나름의 전문성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혜주. 지붕은 무너져 내리는 데 고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지영. 액세서리를 팔아 돈을 버는 쌍둥이 화교 비류와 온조. 그리고 뇌성마비 시인의 집에서도 아버지가 운영하는 찜질방에서도 열심히 주변 사람들을 돕는 태희. 영원할 줄만 알았는데 현실은 영 다르다. 교복을 벗으니 확연히 드러나는 경제적 차이며, 굳이 서로에게 언급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한 트럭이다. 서로의 삶을 신경 쓰기에는 눈앞에 놓인 불안정성이 더 크게 다가오는 시기다.
“아까 그 거지 말이야. 나 솔직히 그렇게 될까 좀 무섭다.”
“글쎄 난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봤고, 가끔 그런 사람들 보면 궁금해서 따라가 보고 싶긴 하다.
매일 뭐하면서 지내는지, 아무런 미련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닐까.”
“그걸 자유라고 그러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렇게 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해.”
무너지기 직전의 판잣집, 그중에서도 천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지영은 작은 네모난 칸의 빗금을 그어내는 취미가 있다. 그는 텍스타일을 좋아한다. 나중에 유학을 가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되고 싶을 정도로 꽤 큰 애정을 쏟는다. 고양이도 좋아한다. 본디 (그 시절에나 가능했을 법한) 혜주의 생일 선물이었지만, 키울 처지가 안 된다며 돌아온 작은 고등어 태비에게 ‘티티’라는 이름도 붙여준다. 제가 만든 텍스타일에 티티의 발자국을 찍는 시간은 지영이의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몇 안 되는 장면 중 하나다.
지영이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읜 그는 총각무도 씹지 못하는 할머니, 늘 집 한 반경에 머무르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생계부양자의 역할은 일찍부터 지영이에게 내정되어 있었다. 고작 스무 살의 어린 여성에게 가난이라는 그림자는 꿈이니 반려묘니 그마저도 다 사치라며 죄다 앗아갈 뿐이다. 집주인은 아쉬우면 이사나 가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어렵게 잡은 면접에서는 신원보증을 해줄 직계가족이 필요하다는 불가능한 조건들만 내놓는다. 당장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자존심이고 뭐고 친구들에게 갚지도 못할 빚을 져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까지. 그 모든 게 어리숙한 제 탓인가 싶어 셀프 탈색도 감행해 보지만, 얼룩덜룩한 머리카락처럼 여전히 스무 살의 티는 잘 벗겨지지 않는다.
무심하게도 지영이의 생존 토대 자체를 붕괴시켜 버리는 일까지 발생한다. 분명 재난의 징조는 곳곳에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몇 번이고 보았던 지붕의 내려앉음. 매번 입씨름하던 집주인과의 통화. 그러나 예견된 재앙은 제 몸뚱이만 남겨둔 채 가족이며 집이며 다 앗아가 버렸다. 경찰마저 ‘귀찮은 노인네들 죽었으니 속 시원하지 않냐‘는 막말을 늘어놓으며 지영이의 자아까지 무너뜨린다. 아무도 어린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무감각한 사회. 그곳에서 지영이는 끝내 입을 다문다. 어차피 아무도 제대로 듣지 않을 테니. 제멋대로 듣고 판단할 테니.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보자. -지영-
“다른 여직원들은 다 야간 대학 다니는데 혜주 씨는 안 가?”
“일하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팀장님한테 배우죠, 뭐.
팀장님은 제가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느낌이 들게 해주셔서 언제든 돕고 싶어요.”
“음, 그렇지만 학위도 필요하지. 평상 잔심부름만 하는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 수는 없잖아.”
“평생 잔심부름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혜주는 참 똑 부러진다. 부모님의 이혼에도 ‘별거 아니네’라며 꿋꿋하게 살 수 있는 강인함을 지녔다. 잔심부름만 하는 제 위치에서 더 발전하고 싶은 마음에 지하철에서 틈틈이 영어 공부도 하고,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말단 경리에 불과하지만 증권 회사의 벌이는 그에게 서울의 작은 집이며, 옷이며, 밝은 눈과 긴 손톱이라는 자유까지 주었다. 물리적/경제적 독립을 차근차근 이뤄가는 그에게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찬용이며,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언니, 심심할 때마다 전화할 수 있는 태희까지 있으니 제법 나쁘지 않은 인생이다. 아니, 여전히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그래서 직장 내 힘든 일도 제 입맛에 맞게 바꾸어 말하는 허영 정도야 혜주 본인에게는 당연히 용납될 수 있다.
기민한 현실 감각 때문인지 어린 나이에도 제 살길을 도모한 혜주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도통 그 감각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다던 지영이와의 사이가 계속해서 어긋나는 것도 특유의 가르치는 듯한 혜주의 언행 때문이다.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진심에 굳이 ‘유학은 아무나 가냐’는 둥 ‘넌 아직까지 삐졌냐’는 둥 가시 돋친 말을 덧붙이고 있으니, 지영이의 입장에서는 열불이 날 수밖에 없는 게다. 게다가 서울과 인천의 물리적 거리며, 직장인과 비직장인이라는 삶의 형태도 달라진 이들이니 둘의 갈등은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혜주의 말을 둥글게 받아들이기에는 지영이의 삶은 너무나도 혹독했고, 지영이의 삶까지 돌봐주기에는 회사 일이 너무나 소모적이었으니.
그럼에도 지영이의 미묘한 순간들을 알아채는 게 바로 혜주인지라 둘의 관계를 마냥 앙숙으로만 정의할 수는 없다. 매번 일찍 자리를 뜨는 지영이를 알아채는 것도, 먼저 돈을 빌려주고 일자리를 알아봐 주려는 것도 혜주다. 텍스타일과 고양이로 상징되는 지영이의 애정을 처음 받은 것도 다름 아닌 그다. 늘 일정한 애정을 유지할 수 없는 게 인간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 있는 게 관계라지만. 특히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공유하던 추억마저 옅어지면 작아지는 게 마음인지라 둘의 미래를 마냥 이상적으로 그릴 수는 없지만. 영화 곳곳에 묻어나는 시큰한 우정을 보고 있으면 둘의 연이 계속해서 이어졌기를 바라게 된다.
같이 못 가서 미안 잘다녀와 ^-^ 지영이한테 안부 전해줘. 혜주
“너도 이제 떠날 거지?”
“너는 꼭 사람들을 널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으로 나누더라.”
“그럼 너 나 좋아해?”
“누군가가 널 떠난다고 해서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아냐.”
태희는 참 이타적인 사람이다.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낀 구박받는 딸이지만, 한복을 입고 싶지 않다는 것만 빼면 열심히 아버지의 찜질방 운영을 돕는다. 제 살길 바쁜 친구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저마다의 사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태희다. 지영이의 삶을 제 나름대로 판단하고 그에 대해 함부로 조언하기보다는, 할머니가 주신 만두나 맛있게 먹으며 지영이의 안부를 들여다보는 적정한 거리감과 진실한 다정함을 지녔다.
태희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뇌성마비 시인인 주상을 좋아하며, 그가 읊는 시를 타자기에 옮겨주는 일을 한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노숙자를 보며 자유로움을 떠올리고, 월미도 근처에서 자연스레 미얀마 노동자들과 놀자며 친구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포용이라는 말로 그를 표현하기에는 그 말에 담긴 묘한 위계조차 그에게 용납되지 않을 테다.
물론 태희에게도 못마땅한 게 있긴 하다. 제 식사 취향조차 존중해 주지 않는 집안의 구속과 제 한 몸을 바쳐 자유를 찾지 못하는 상황, 이 두 가지를 죽도록 견디기 힘겨워 한다. 단순히 ‘엄마 아빠가 싫다고 집을 나가고 싶은 10대 때의 시시한 결심’과는 다르다. ‘한 곳에 머물러 사는 답답함’에서 벗어나 제 나름의 삶의 이유를 찾으려 한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일들을 경험하는 것. 항구며 공항이며 수많은 이들이 오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보다, 나룻배라도 좋으니 직접 표류해보는 것. 그 유동의 도시에서 살아온 태희는 그런 자유의 형상을 꿈꾸었고, 스무 살을 기점으로 더 동적인 자극을 위해 길을 나선다.
가족사진에서 제 얼굴을 도려내고 집을 떠나는 태희의 대담함과 실행력을 보면 웃음이 난다. 교도소 앞에서 추위나 어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영이를 기다리는 장면도 참으로 애틋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의 몽상가적 기질을 멋대로 재단한 게 떠올라 조금 미안해진다. 훔친 돈 몇 푼도 다 떨어진 채 녹록한 미래가 오면 어떡하지 싶다가도,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한다는 게 더 허황된 것 같아서. 그 걱정마저 나이 좀 먹은 사람의 오지랖처럼 느껴지는 게다. 불안정한 청춘과 대한민국 사회에 필요한 건 태희와 같은 청춘의 상일지도 모르겠다.
지영아! 어떻게 지내니? 연락 좀 해라 응? =^..^=
동물구조관리협회 보호 중이던 방울이가 다른 들고양이들에게 뜯어먹힌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들고양이의 야생성은 이제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야, 근데 솔직히 배고프면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냐?”
“맞아. 야, 너도 배고프면 나 잡아먹어.”
“아아!!”
“야! 잡아먹으라며.”
들고양이의 야생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M이 Z로, Z가 α로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명명할 때마다 ‘야생성’과 같은 프레임이 가타부타된다. 원인도 배경도 지워진 채 결과만이 부풀어지는 세상. 배고픈 걸 떠나 들고양이는 사체를 뜯어 먹은 무서운 동물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마다 비류와 온조의 대화가 떠오른다. 배고프면 저럴 수도 있지 않냐며, 너도 배고프면 나를 잡아먹으라고.
영화도 그런 다섯 고양이들을 그려낸다. 불안정한 삶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스무 살의 어린 여성들을. 부둣가에 응집된 판자촌과 개항장 근처에 터를 잡은 외국인들로 뒤섞인 인천, 그 유동의 도시에서 자라난 청년들을. 이제 새로운 세기로 나아갈 시린 청춘을. 사람마다 시기마다 애정의 척도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결국 모두 안아주고 싶게 만드는 이들이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 숨 쉰다.
허영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똑 부러진 삶을 살고 있는 혜주에게 기특하다고. 가난이 가난을 낳으며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지던 지영이가 어렵게 내디딘 새출발을 응원한다고. 티티와 함께 오순도순 살아갈 귀여운 비류와 온조에게 츄르 한 다발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그 모든 친구의 곁을 맴돌며 다정함을 건네던 태희에게 대견하다고 전하고 싶다.
첫길을 밟을 때마다 생각나는 다섯 고양이들아. 잘 살아줘서 고마워!
240104_한님 보냄.
아끼던 영화인데 여담을 통해 또 한 번 볼 수 있어 좋았어요. 예전에 볼 땐 마냥 얄미웠던 혜주도 새롭게 와닿네요.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소모적인 삶에서 우정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불안정성에 방황하는 우리들 모두 힘냈으면 좋겠어요. 다정한 글 잘 보고 가요~ 우리 일촌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