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밋빛 혁명의 열차 🔥
제임스 맥티그, 브이 포 벤데타
모진 고문 후 돌아온 그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숨겨둔 편지를 꺼내는 것이다. 깎여버린 머리, 수척한 얼굴과 몸, 힘겹게 기어가는 몸짓. 그래도 편지를 꺼내 볼 때만큼은 그 동작에 힘이 느껴진다.
이 몸짓의 주인공은 가면을 쓴 남자 브이(V)와 우연한 사건으로 엮이게 된 이비. 그는 브이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계획에 동참하는 척 도망쳤다가 납치되어 돌아온다. 브이는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명목으로 가짜 수용시설에 이비를 가두고, 다른 사람인 척 정보를 요구하며 고문을 가한다. 그 폭력에도 이비가 꿈쩍도 않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편지 덕분이었다.
편지를 쓴 발레리는 과거 브이가 수용소로 끌려갔을 때 옆 방에 있던 여성으로, ‘다르다는 것은 위험을 의미’했던 시기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끌려가 실험에 이용되다 죽었다. 그곳에서 그가 쓴 편지는 작은 틈으로 브이에게, 그리고 이비에게 전해진다. 발레리는 ‘진실함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우리가 가진 전부’이기에 솔직하고 자유롭게 살았다. “3년간 나는 장미를 가졌고,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편지를 읽을 누군가에게 그 ‘작고 연약하지만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진실함을 지킬 것을 당부한다.
“그 진실이란 이 나라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잔학함, 부정, 편협함, 탄압이 만연하고, 한땐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 의사 표현이 가능했지만 이젠 온갖 감시 속에 침묵을 강요당하죠. 어쩌다 이렇게 됐죠? 누구 잘못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게 있고 그들도 대가를 치르겠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건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두려웠던 거죠.”
연설의 내용대로 권력자의 통치 수단은 두려움이다. ‘전쟁, 테러, 질병, 수많은 문제가 연쇄작용을 일으켜 국민의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킨 사회에서, 서틀러의 보수당은 ‘국가 안보 프로젝트’를 핑계로 성소수자와 이방인, 환자 등 타자화된 이들이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처리’하며 지지를 받는다. 20세기 유럽의 비극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자신들만이 해결 가능한 혼란을 퍼뜨리고 그 원인으로 특정 집단을 지목해 두려움과 혐오의 감정을 부추긴다. 그들을 잘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중의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브이는 정권의 실체를 밝혀 대중을 결집하고자 한다. 대중은 진실과 거짓을 판단할 능력을 상실했고, 관료제의 일원으로 주어진 일들을 수행하며 독재정권의 동력인 평범(banal)한 악**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진실을 알고 각성하는 것은 권력에의 예속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브이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법부의 상징인 형사재판소 건물을 폭파하고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통제의 폭력이 없는 사회로 향하는 횃불을 밝혔다. 그가 1년 후로 예고한 입법부 테러가 가까워질수록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커지고, 거리에 나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늘어간다.
* 제목에서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지시하고 있는 이 곡은 1789년 대혁명 당시 불렸던 노래에서 비롯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로 끝을 맺는다. (본문의 곡 제목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이동)
**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기록하며 악은 유별나게 나쁜 개인이 아니라 주어진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그저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됨을 발견한다.
브이가 꿈꾸는 사회 전복은 ‘벤데타’, 즉 피의 복수를 통해 완성된다. 자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했던 라크힐 수용소에 얽힌 폭력의 주체들을 피로 심판하고, 기성 권력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토대를 세우려는 것이다. V라는 이름의 의미를 일찌감치 밝혀 두는 제목은 영화가 단순히 악한에 맞서 싸운 ‘영웅’의 이야기가 아님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브이의 무용武勇이 아니라 그가 표방하는 가치다.
그런데 카메라는 그 가치에 모순 없이 다가가고 있는가?
이를테면 지하철역 결투 장면에서의 슬로 모션을 떠올려보자. 이때 브이는 당수 크리디의 부하들에게 그 많은 총알을 맞고도 다시 일어서 칼만으로 그들 모두를 쓰러뜨린다. 1분 30초간 이어지는 이 신은 브이가 칼을 돌리는 모양은 물론 한 명 한 명 신체가 손상되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관객은 허둥대는 부하들을 무참하게 베어 버리는 그의 잔인무도함을 온전히 목격해야 한다.
이어 브이는 예고한 바와 같이 크리디의 목을 비틀어 죽인다. 이비와 브이, 발레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지게 했던 권력자들의 심판이 완수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목이 졸리고 있는 크리디의 겁먹은 표정과 이를 지켜보는 브이를 번갈아 보여주며, 목이 비틀리는 결정적 순간 역시 놓치지 않는다.
🔫 왜 안 죽지?
⚔️ 이 가면 뒤엔 살점만 있는 게 아냐. 이 가면 뒤엔 신념이 있지. 그리고 신념은 총알로는 뚫을 수 없네.
크리디의 목을 조르기 직전에 브이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이 대사를 던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앞서 우리는 브이가 이유 없이 초인超人이 된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 즉, 그 많은 총알을 맞고도 브이가 열댓 명을 쓰러뜨릴 초인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가면 뒤에 자리한 것이 한 개인을 넘어 억압받는 모든 민중의 자유에 대한 염원이기 때문이다.
크리디의 심복들이 브이에게 겨눈 총은 같은 순간 광장의 시민들에게 겨누어지고 있는 군의 총과 다르지 않다. 상부의 지시가 있으면 쏘아야 하고, 지시 없이는 쏠 수 없다. 그래서 크리디와 서틀러 모두 사망하자 시민들을 향한 총은 힘을 잃는다. 그러니 라크힐 관련자들에게도 이뤄지지 않았던 ‘피의 복수’를 연출한 이 시퀀스는 그 ‘심판’의 대상을 잘못 설정하고 있다. 스펙터클화된 폭력을 통해 브이의 비범함을 강조할 때, 그가 그 폭력을 행사해야만 하는 이유는 흐려진다.
누군지도 모르고, 앞으로 만나거나 함께 울고, 웃고, 키스하진 못하겠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계속되는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는 이비를 보며 브이는 발레리의 장미가 갖는 고결함이 사랑에서 비롯됨을 발견한다. 발레리에게 가장 강력한 저항은 있는 그대로 자신에게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던 이비는 동료시민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한 침묵으로 끝까지 진실을 지키고 브이를 보호했다. 발레리도, 이비도, 브이도, 거리의 수많은 ‘브이’들도, 모두가 그 사랑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브이와 이비가 애정 관계로 발전하는 각색은 아쉬움을 남긴다. 의회를 폭파할 열차를 이비에게 선물하면서 브이는 자신이 완수해야 할 임무를 위해 떠나는데, 이때 이비는 ‘함께 떠나자’며 브이에게 키스한다. 크리디 일당과의 결투에서 돌아온 브이 또한 이비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연대에 대해 말하던 영화는 여기서 성애적 사랑으로 회귀한다. 민중의 소리의 담지자 브이를 통해 누구든 전복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던 정치 영화가 가면 뒤 개인의 인격을 궁금해하는 영웅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각색은 이비가 가진 힘 또한 축소해버린다.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 이비는 브이를 통해 알게 된 자유의 가치를 내재화해 그의 죽음 이후 직접 가면을 쓰고 브이가 된다. 반면 영화 속 이비는 혁명이 목전이어도 사랑을 위해 대의를 포기할 수도 있다. 결국 이 영화에서 로맨스는 이비를 스스로 깨달은 자유를 실천하는 혁명가보다는 브이의 뜻을 이루는 주변 인물 정도로 남게 만든다.
그러나 진실을 지켜주는 것은 증오에 찬 보복이 아니라 사랑임을 브이에게 일깨워준 이는 다름 아닌 이비다. 그래서 브이는 자기 손에 묻힌 피가 마지막이길 바라며 이비가 깔아준 장미 틈에 몸을 싣는다. 〈브이 포 벤데타〉는, 오히려 장미에 대한 영화이다. ‘벤데타’는 죽었지만, 브이는 죽지 않았다.
“내가 틀렸었다는 걸 자네 덕에 깨달았지. 이 레버를 당길 사람은 내가 아니야. 내가 속했고 내가 만든 세상은 오늘 밤으로 끝나. 내일은 새로운 세상이지.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가야 할 세상, 이건 그들의 몫이야.”
브이는 권력 체계처럼 촘촘하게 쌓인 도미노를 튕겼고, 하나가 쓰러지자 단 한 개의 피스만을 남기고 전체가 붕괴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한 피스를 쓰러뜨릴 사람은 그가 아니다. 그것은 레버를 당길 이비의 몫이고, 그런 이비를 제지하지 않을 경감 핀치의 몫이며, 광장에서 가면을 벗고 터지는 불꽃을 바라볼 ‘브이’들의 몫이다.
「1812년 서곡」의 대포 소리에 맞추어 폭발하는 건물을 바라보는 이비의 눈이 불꽃의 반짝임을 담아낼 때, 거리를 가득 채운 가이 포크스 가면 속에서 저마다 다른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한 피스는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것이 된다. 분명 여러 아쉬움을 안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힘 있게 우리를 두드린다. 그리고 알려준다. 여전히 누군가는 11월 5일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장미를 가꿀 것임을.
221215_ 성하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