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소녀, ⚾️ 너와 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수인에게 ⚾️

⚾️ 너와 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수인에게 ⚾️

최윤태, 야구소녀

어릴 적, 그러니까 한 초등학교 2-3학년 무렵이다. 지금껏 살면서 그때 딱 한번 야구장에 가봤다. 경기장은 좌중을 압도할 만큼 큰 크기였고 몇 층 위에서 내려다보는 야구는 그야말로 신세계였음을 기억한다. 나는 버터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저 멀리 위 공간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는데, 조그맣고 하얀 공이 쉬지 않고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 공이 깡- 하고 배트에 맞기라도 하면 응원석은 난리가 났다. 저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일어나서는 자신이 응원하는 팀명과 응원가, 좋아하는 선수 이름을 외쳐댔다. 모두가 하나 되어 뿜어낸 공기가 그렇게 이 경기장 내부를 한 바퀴 휘감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 기운을 온 몸에 받고 그라운드를 밟는 한 무리의 야구선수들이 있었다.

 

나에게 야구란 늘 그런 것이었다. 일렁이는 열기와 약간의 광기가 공존하는, 누군가의 타이밍이 상시 예정된 현장. 경기를 보는 모든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취하는 높은 집중력. 단합심. 그러나 그 강렬하고도 익숙한 인상 너머에는, 이와는 또 다른 양상으로 야구와 엮인 어떤 사람들과 상황들이 있었다. 배제되거나 투쟁하는. 가려졌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 지점들.

 

영화 〈야구소녀〉는 바로 그 이야기 중 하나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한 사람이 공을 던진다. 최고 구속은 134km/h. 회전력이 높은 공으로 슬라이더와 커브를 구사한다. 고교 야구부의 유일한 여성 선수인 그의 꿈은 프로구단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프로선수로는 여성이 지목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여기까지 읽고 혹시 그의 미래를 재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 영화의 현실성을 논하고 있는가?

 

답을 어떻게 내렸든, 이 영화는 당신에게 또 다른 답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니 관중인 우리는 집중하면 된다. 일제히 조용해진 구장 한가운데에서. 앞으로 쭉 뻗어나가는 공에. 그것이 스트라이크가 될지, 볼이 될지, 파울이 될지, 혹은 점수를 낼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그렇게 함께할 때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 주수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인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야구 소녀’라고 불렸다. 구속 130km/h를 던진다는 그의 엄청난 역량은 공적으로도 꽤나 인정받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고등학교 야구선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원래 본인보다 실력이 뒤처지던 정훈이 이제는 당당히 프로구단에 합격해 수인의 기념 액자 자리를 대신할 그 무렵, 그의 운명과 남학생들의 앞길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분명 야구팀 전체가 ‘프로’가 되기를 똑같이 희망했으나 유독 수인에게만은 그 시작조차 쉽지가 않다.

 

학교 측은 수인이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회인 야구부에 참여하길 바란다. 마치 그것이 성인이 된 여성이 ‘여전히’ 야구를 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깔끔한 정답인 것처럼. 심지어 교장은 그나마 여성에게 운동으로 먹고살 만한 거리는 핸드볼이라며, 수인의 코치에게 그를 좀 설득해보라고 멋대로 주장한다. 애초에 프로구단 입성을 위한 트라이아웃 신청조차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수인의 어머니는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포기해.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라며 안정적인 밥벌이 정착을 강권하고, 무작정 자신이 다니는 공장에 수인을 소개한다.

 

한껏 다져놓은 자신의 꿈이 세상에선 불가능으로, 집에선 정신 차리고 접어야 할 짐으로 이해될 때, 느껴지는 무기력은 참 숨 막힐 것이다. 더군다나 수인은 이 야구계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동시에 그에 비견 갈 차가운 돌아섬을 당했다. 그래서 정호가 대단하다고 그를 치켜 올렸을 때, 도리어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그 ‘대단하다’는 한마디에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가 수없이 깔려 왔으니까.

이에 그는 차라리 손에 피가 맺히도록 공을 던진다. 구속 150km/h라는 프로 선수들의 평균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서. 세상의 기준에 손쉽게 재단당하느니 나조차도 모를 내 미래에 가능성을 걸고 그는 제대로 도전한다. 단기간에 성공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그 체력과 구속을 얻으려고 무자비한 땀을 흘린다. 악에 받치기도, 또 그만한 간절함이 묻어나기도 한 날들이었다. ‘여성’이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마땅히 인정하는 실력이라 주목받는 선수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코치도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수인에게 야구라는 게임의 본질을 상기시키며, 하나의 기술을 제안한다.

 

어차피 투수에게 중요한 건 손에서 떠난 공이 타자의 방망이를 스쳐 포수에게 안착하는 그 순간이다. 그러니 잘하는 것을 부각해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게 해보자. 높은 볼 회전율을 활용한 ‘너클볼’을 던져라. 평소엔 부상당한 선수들이 던지는 공이라 해도, 빠르기로만 승부를 보는 야구의 현주소와 너의 상태를 직시하되, 이에 맞설 진짜 실력을 키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몇십 번째, 몇백 번째 공이 다시 한번 수인의 글러브에 들어왔다.
과연 그는 마운드에 올라 스트라이크를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당당히 프로구단에 합격했을까?
이제 이 모든 것은 주수인 본인에게 달려있다.

“야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니까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에요.”

수인은 그저 선택을 했다. 지금껏 해오던 야구를 그만두지 않기 위해서. 프로구단 선수라는 자신의 목표에 어떻게든 다가가기 위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 풀 꺾어 타협하지 않고, 그냥 제 갈 길을 묵묵히 갔다. 자신만의 방식과 페이스를 따라 직구 혹은 변화구를 자유롭게 던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면서 말이다.

 

실제 〈야구소녀〉의 모티브가 된 현재 여성 야구 선수들도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지나왔고, 지나가고 있다. 현재 국내에 여성 프로/준프로 야구단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2004년 대한민국의 첫 여성 야구팀 ‘비밀리에’에 이어, 2007년이 되어서야 한국여자야구연맹이 본격 출범했다. 선수들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 앞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야만 비로소 언론에 소개되곤 한다.

 

안향미 선수는 경원중에서 1루수로 활약했었지만, 체육특기생의 자격을 얻기 위해 여러 번 탄원서를 제출하고서야 덕수고에 입학했고, 1997년 ‘최초’의 고등학교 야구선수가 되었다. 김라경 선수는 여성은 중1까지만 가능하던 리틀 야구단에서 ‘처음으로’ 중3 선수로 뛰어 이후 구단의 나이 규정을 바꿨다. 또한 그 해 ‘최연소’ 여자 야구 국가대표로 뽑혔으며, 2020년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가 여성으로서 ‘첫 번째’ 대학 야구 선수가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판타지물이나 단순 청춘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진행형으로 연장된 픽션에 가깝다. 단지 상상 속 가장된 인물이 아니라, 여태 뛰어온 선수들 모두 저마다 ‘주수인’이었다. 누군가가 1군과 2군을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필드를 뛰고 있을 때, 누군가는 그 구단의 고착된 편견을 넘기 위해 초입에서부터 자신을 입증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페이 조절 문제로 골치를 겪을 때, 누군가는 야구 선수로서의 생활 자체를 일찍이 마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해야 했다.

 

또 누군가는 ‘한국 야구’, ‘야구 국가대표팀’, 하다 못해 야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운동선수를 일컫는 ‘야구선수’라는 명사로 쉽게 쉽게 언급되며 온갖 스포트라이트와 후원에 휩싸이고 있을 때, 누군가는 콕 집어 ‘여성’ 야구 선수라 말해야만 간신히 자신을 보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본인들의 노력과 실력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은 채 말이다.

 

이 익숙하고도 기분 나쁜 문구에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많은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또 다른 성차별의 굴레가 되었든, 돈의 굴레가 되었든, 아니면 인맥의 굴레가 되었든 간에. 하지만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외로워하지 말라고 감히 얘기해주고 싶다.

 

세상에는 정호처럼 같은 길을 가며 응원하는 사람이 있고, 방글이처럼 전혀 다른 길이지만 지켜 봐주는 이도 있으며, 제이미처럼 일면식 하나 없는 사이어도 ‘화이팅’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슬퍼하지 말기를. 지금의 우리처럼 현생과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같이 살아낼 사람들은 우리 곁 또 어딘가에서 머무르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사회는 조금씩 바뀌고, 바뀔 것이다.

 

그러니 여기 무수한 ‘주수인’들에게 말해본다. 남들이 멋대로 지어놓은 유리벽을 보란 듯이 깨부수며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또 한 번의 공을 던질 그 모두에게. 우리는 숨죽이고 응원하며 지켜볼 테니, 자신 있게 그 공을 던져 달라고.

210916_예은 보냄.

다음 여담 읽기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