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 추억이여, 안녕! 📺

스티븐 스필버그, 〈레디 플레이어 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 그곳엔 창시자인 할리데이가 그의 오아시스 소유권 및 막대한 유산을 숨겨둔 미션들 또한 존재한다. 오아시스를 사랑하는 소년 웨이드 와츠는 거대기업 IOI로부터 오아시스를 지키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미션을 수행한다. 미션이 진행될수록 웨이드와 관객들은 80년대 대중문화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 추억이여, 안녕! 📺

스티븐 스필버그, 〈레디 플레이어 원〉

순간을 곱씹으며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가령 소중한 추억, 사랑했던 상대의 눈빛, 혹은 깊은 절망의 기억 같은 것들. 어쩌면, 어릴 적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의 한 귀퉁이를 장식한 대중매체가 그런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삶에 은근히 뿌리내린 채 우리의 현재에 불쑥 솟아오르곤 한다. 여기, 스필버그의 손에서 재탄생한 〈레디 플레이어 원〉에도 그런 순간들을 간직하며 살다 간 이가 등장한다. 바로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의 창시자인 할리데이다. 영화는 할리데이의 지난 순간을 반추하며 그가 흩뿌린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간다.

 

할리데이가 제작한 오아시스는 단순한 인기 게임을 넘어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새로운 차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나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오아시스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웨이드 역시 오아시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할리데이를 동경하는 게이머 중 한 명이다. 웨이드의 목표는 할리데이가 죽기 전 오아시스에 숨겨둔 ‘이스터에그’를 찾는 것. 이를 위해선 세 개의 열쇠가 필요한데, 그 첫 열쇠는 게임의 특성을 완전히 부정할 때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다. 바로, 있는 힘껏 ‘거꾸로 가는 것’이다. 이 첫 번째 열쇠는 이후에 찾아야 할 열쇠들의 힌트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라갈 방법을 제시하는 지도이기도 하다.

 

이제 웨이드는 본격적으로 거꾸로, 다시 말해 할리데이의 과거를 향해 간다. 할리데이에겐 과거 카렌에게 키스할 용기가 부족했다는 후회가 있다. 그래서 그는 게임의 도전자들만큼은 용기를 내길 바란다. 두 번째 열쇠를 얻는 방법이 카렌을 찾아 춤 신청을 하는 것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늦은 사랑 고백에 스필버그는 스탠리 큐브릭의 공포영화인 〈샤이닝〉을 덧씌운다.

  “거꾸로 가보는 건 어때? 최대한 빠르게 거꾸로. 페달을 꾹 밟는 거지.
앞으로만 갈 필요는 없어.”

여기서 할리데이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본다. 중요한 건 “거꾸로”도 물론이지만, “최대한 빠르게”라는 표현이다. 그는 도전자들이 과거를 복기하고 재연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페달을 힘껏 밟아 과거마저도 초월하길 기대한 것은 아닐까? 역주행으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웨이드처럼. 그러고 보면 〈샤이닝〉의 주인공 대니가 미로를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거꾸로 걸은 다음, 그 흔적을 지운 덕분이었다. 더불어 카렌과 춤을 추는 좀비들은 이미 죽은 존재라는 사실도 생각해 보자. “과거를 벗어나라.” 죽음(과거)을 가로질러 살아있는 당신과 손을 잡아야 다음으로 향할 수 있다.

 

과거를 넘어서기 위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이 아이러니한 열쇠 찾기의 여정. 그렇게 맞닿은 가장 깊은 과거는 할리데이의 어릴 적이다. 화면 속 게임만을 응시하던 아이는 현실에서 반복한 실수를 게임에서라도 뒤늦게 바로잡아 보려는 어른아이로 자랐다. 할리데이는 그제야 깨닫는다.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는 화면 안에서 재생되는 승패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디딘 현실에서 실감하는 행복이란 것을.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면, 오아시스가 진정 귀중한 이유는 사막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할리데이가 알아채 주길 바란 진짜 이스터에그는 ‘게임 밖 현실의 소중함’이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만큼 과거 대중문화의 흔적이 다수 등장한다. 아틀란티스의 바이크는 〈아키라〉에 등장하는 모델이고, 〈쥬라기 공원〉의 티렉스, 〈킹콩〉의 킹콩 등, 그 시절 관객의 추억을 책임진 이들과의 재회가 퍽 반갑다. 그런데 우리는 동시에 또 목격한다. 거꾸로 달리기를 택한 웨이드의 눈에 보인 풍경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건 설계도를 따라 등장과 퇴장을 반복할 뿐인 티렉스와 킹콩이 아니었나? 결국 이 영화는 과거와의 상봉인 동시에, “페달을 꾹 밟”아 진짜 지금을 향해 질주하라는 고별인 셈이다. 그러나 작별이 마냥 매정하진 않다. 실은 헌사에 더 가깝다. “고맙구나. 내 게임을 해줘서.” 대중문화로부터 성장한 스필버그가 이제는 대중문화의 거장이 되어 우리에게 전하는 진심이 아닐지, 감히 짐작해 본다.

 

‘스필버그의 감상주의는 시네마를 파괴한다’라는 비판에 대해, 스필버그는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답했다. 대중문화를 집대성한 이 영화를 통해, 우리의 현재는 대중문화의 역사를 거쳐 당도했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대중문화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답임을 알기에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과연 스필버그의 영화는 진정으로 대중에게 닿아있는가?’라고 묻고 싶기도 한 것이다. 백인 남성에게서 백인 남성으로 전유되는 영화가 아니라, 여성을, 유색인을, 모두를 향하는 영화가 맞냐고 말이다.

 

물론 스필버그의 세계는 경이롭다. 냉혹한 쇠냄새를 풍기다가도, 인간의 한 줄기 의지에서 비롯된 은은한 희망의 내음을 포착할 때면 어김없이 벅차오른다. 다만 나는 이제 백인 남성만을 전면에 내세우며, 구조의 문제를 그저 개인으로 치환하는 플롯을 곧이곧대로 소화하기가 어쩐지 버겁다. 〈레디 플레이어 원〉 역시 마찬가지다. 백인 남성의 추억은 다시 젊은 백인 남성에게로 이어지고, 악의 축인 거대기업 IOI는 놀란 소렌토라는 개인과 동일시된다.

덧붙여, 할리데이에서 웨이드로 이어지는 남성 간 유대의 과정에서 사만다의 존재는 흐릿해진다. 사만다는 웨이드에게 필요한 조언과 도움을 주지만 서사의 결정적 순간에선 한 발짝 물러나 그의 성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또 아시아인인 쇼와 다이토가 오아시스 내에서 닌자와 사무라이로 등장한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성별, 국적, 심지어 종을 초월해 ‘뭐든 될 수 있는’ 익명의 가상공간임에도 아시아인 캐릭터들에게만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동양적 특성을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영화의 면면들이 남기는 씁쓸함을, 나는 자꾸만 곱씹게 된다.

 

그러니 이 글은 스필버그의 인사에 화답하는 내 나름의 인사다. 나 역시 반갑고 고마웠으며, 당신이 남긴 발자국을 기억하겠다고. 하지만 나는 나의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나와 같은 이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외쳐본다. 추억이여, 안녕!

240606_진유 보냄.

(객원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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