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아의 딸 · 딸에 대하여, 🚦 하윤경의 무표정에 대하여 🚶‍♀️

김정은, 〈경아의 딸〉 · 이미랑, 〈딸에 대하여〉

“내가 널 잘못 키웠어.”

“우리 딸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나의 엄마에게, 그리고 여자 친구의 엄마에게 비난당하는 두 20대 여성. 다른 영화지만, 너무도 닮은 세상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연수와 퀴어 여성 레인이  움직인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연기하는 무표정한 하윤경이 보인다.

🚦 하윤경의 무표정에 대하여 🚶‍♀️

지금 생각해 보면 짧았던 2022년 여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하윤경을 처음 봤다. 그곳의 하윤경은 영우에게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실제로 빛나고 따스하다. 영우를 세심하게 대하는 조력자이자 한계에 기꺼이 부딪히는 사회 초년생 최수연은 잘 웃고, 잘 울고, 잘 짜증내고 할 말 다 하는 만큼 진실한 인물로 다가왔다. 

 

하지만 봄날의 햇살 최수연을 기대하며 〈경아의 딸〉 ‘연수’와 〈딸에 대하여〉 ‘레인’을 볼 수는 없다. 여성의 현실을 담아낸 두 영화에서 봄날의 햇살은 웃지 않는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연수는 울거나 울음을 참고 여자친구의 엄마와 동거하게 된 레즈비언 레인은 침묵하거나 곧게 응시한다. 최수연과는 다른 또 하나의 진실함을 목도하며, 여성이 표정을 짓지 못하도록 만드는 순간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걸 되새긴다.

 

경아의 딸, 연수

 

혼자 사는 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이렇게 불쑥 학교까지 찾아오”는 전 남자 친구가 바래다준다면, 그 귀갓길은 “너무 무서워”진다. 그래서 연수는 남자 친구가 듬직해서 좋겠다는 택시 기사에게 경아가 있는 인천으로 가달라고 말한다. 절반은 진심인 ‘엄마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인사 후의 모녀는 차가운 방만큼 오랜만에 만나는 듯하다. 이 모녀의 일상적인 대화는 우려하는 엄마의 명령과 질려버린 딸의 호소로 이루어진다.

 

“항상 몸조심해야 해. 그러다 정말 무슨 일 당할지 모른다니까.

밤에는 웬만하면 절대 혼자 다니지 마.”

“엄마 그만 좀 해. 그럼 뭐 집에만 있어?”

 

둘 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경아의 말은 실제 연수의 안전에 아무 효력도 영향도 끼칠 수 없다. 밤에 혼자 돌아다니게 될 일은 다 큰 어른에게 부지기수이고 연수가 전 남자친구에게 입은 피해는 그가 ‘몸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아도 잘 알기에 말을 그치지만, 관성이 된 잔소리와 책망이 딸의 뒤통수를 대고 튀어 나간다.

 

“그 영상은 서로 합의하에 찍으신 건가요?”

“도대체 이런 건 왜 찍냐고! 너 돌았니?”

“너도 다 알고 찍은 거라며.”

“난 그런 영상 찍는 애들 이해가 안 돼.”

 

수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필요한 질문과 나를 질책하는 비명들. 가해 행위는 지워지고 몰이해는 피해자에게 비수를 꽂는다. 영화는 연수와 피해자들이 감당하는 무책임한 비난의 언어를 들려준다. 생소하거나 참신하지는 않다. 어디선가 흘려들었던 말들을 영화가 재차 들려주는 이유는, 연수가 “그때 왜 그랬을까요.”라며 후회한 당시의 심정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자책과 후회는 가해자에게 떨어져야 마땅하지만, 그에게 떨어진 건 고작 징역 1년 6개월이다. 

 

이별했다는 이유로 범죄를 저지른 ‘상현’의 명백한 악의가 실현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부적절한 처벌의 역사와 그 사회적 부당성에 있다. 연수를 ‘걸레’라고 호명하는 사회가 비난하고 교육하고 명령해야 할 대상은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상현이다. 부당성을 내면화한 남성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1년 6개월의 의미를 학습한다.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의 기저에 내 인생보다 네 인생이 더 망가질 거라는 믿음과 장담이 깔려 있다.

불법 사이트의 댓글 창을 보던 경아가 빛이 쏟아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내내 드리워졌던 어둠을 벗는다. “엄마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은 해?” 이제야 딸을 제대로 본 경아는 힘겹게 외출과 방문을 반복했을 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연수의 외로움과 고립을 느낀다. 이후 서로가 병원 침대에서 재회하는 장면에서 연수는 ‘의지’와 ‘이해’라는 작은 애원을 담아 누구의 탓도 아님을 전한다. 그에 응답하듯, 인천을 떠난 경아가 못내 다하지 못한 마음들, 미안하고 그리운 감정들, 현재의 선택을 담아 목소리를 남긴다.

“나중에 네 마음 괜찮아지면 엄마 집에 한번 와줄래”

‘네 마음 괜찮아지면’이라는 가정과 집에 한 번 오라는 기약이 서로를 괜찮게 만들 것이다. 경아와 연수는 완전히 괜찮아질 수도, 예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도 없겠지만, 이라고 적다가 놀라서 지운다. 연수의 도약을 기억하며 다시 쓴다. 연수는 괜찮아지고 경아에게 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부 진심으로 ‘엄마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다.

 


 

 

딸에 대하여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를 읽고 종이 끄트머리에 메모를 남겼다. “부정당하는 사람, 부정하는 사람 모두 아프다.” 소설 속에서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연결되지 못해서 고통을 겪는다. 연수와 경아의 연결이 피해 이후에 불안해졌다면, 〈딸에 대하여〉의 화자인 ‘주희’와 하윤경의 ‘레인‘은 세대와 편견 때문에 처음부터 연결되지 못한 채로 등장한다. 배우들의 연기가 이들을 가로막는 부정이 어디서 탄생하는지 섬세하게 짚어낸다.

 

 

“자식이 재산이고 보험이야.”

 

주희는 여자를 좋아하는 딸이 그럴싸한 남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부모에게 재산과 보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하는 대학에서 동성애자 혐오로 부당해고를 당한 동료를 위해 학내 시위를 나가는 딸은 주거난을 겪다 여자 친구 레인과 함께 본가로 들어온다. 아무도 기껍지 않은 대치 속에서 레인은 조심스레 여자 친구의 엄마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주희는 딸의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면서도 타인의 말에 순진하게 동의하며 상처받은 딸을 냉소로 대한다. “나는 몰라.” 정확히 그는 모르기도 하지만, 모르고 싶어 하기도 하다. 그런 주희에게 방문 너머의 불청객 레인은 가장 부정하고 싶은 딸의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침입자다. 그러나 내게 아침을 권유하고 나의 불편을 헤아리는 유일한 동거인, 불완전한 가족이기도 하다.

“나는 종일 젠의 곁에 머문다. 그 덕분에 가끔씩은 딸애에 대한 걱정을 잊고, 그 애에 대한 불만을 잊고, 내 처지에 대한 슬픔도 잊는다. (…) 그래서 날 돕는 건 언제나 딸애가 아니고 그 애다. 젠을 두고 외출할 때도, 젠의 식사를 준비할 때도, 젠을 목욕을 시킬 때도, 나는 그 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젖은 기저귀가 가득 담긴 무거운 쓰레기봉투를 내놓는 것도 그 애다.”

_ 김혜진, 『딸에 대하여』 182쪽

주희는 요양원에서 일하면서 제희라는 할머니를 오랫동안 보살핀 것 같다. 하지만 제희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재단이 후원금과 발길을 끊자, 병원은 경제적 잠재력을 상실한 제희를 치매 노인들을 한 곳에 몰아둔 4층으로 내몬다. “우리가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거야.”에서 알 수 있듯이, 주희는 가족이 없는 그를 보며 자신과 딸의 미래를 자연스럽게 투영한다. 그리고 항의하다 결국 직장을 잃는다. 요양원을 대표하는 ‘권 과장’의 합리성이 약자를 대하는 또 다른 약자의 권태와 환멸에서 시작된다면, 주희의 돌봄은 약자를 나의 일부로 인식하는 확장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제가 누구예요?”

사람.”

 

그래서 제희가 답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피부와 머리카락, 옷자락같이 인간을 덮는 피상적 허울 뒤에 진짜 ‘사람’을 발견하는 이 장면은, 사람을 형성하는 사회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 주희의 지난한 돌봄과 사적 상상에서 시작한 다정함이 그를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리고 타인에게 사람으로 인식되게 한다면 제희의 답을 이해할 수 있다. 

 

주희에게도 사람으로 보이는 또 한 사람이 생긴다. 영화는 레인이 등장하며 시작하고 엄마의 변화 또한 그때부터 진동한다.

“같이 있는 거.
그거 하나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요.”

 

딸의 동성 연인을 인정할 수 없는 주희 앞에서 레인은 닿지 않는 입장을 묵묵히 전한다. 결국 그 시간이 마지막 미소로 화답 받기까지 레인은 무표정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레인을 연기하는 하윤경의 얼굴에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던 연수가 겹쳐 보이는데, 연수가 괜찮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인 사람이었다면, 레인은 괜찮아지려고 하다 보니 정말로 괜찮아진 사람 같다.

 

이미랑 감독은 레인을 ‘배려심’과 ‘섬세함’, ‘헤아림’으로 설명하지만, 마지막으로 ‘이타심’에 대해선 부정한다. 제희의 발인까지 손수 나서지만, 그 근원이 이타심으로 허락된 인물은 아니다. 구체적인 내막이나 감정적 연기가 소거된 레인은,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절제된 주장을 완성한다.

 

레인이 동성 연인과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할 때, 그린이 교묘한 편 가르기에 매도되지 않기 위해 ‘권리 보호’를 힘주어 말할 때 본심과 감정은 최대한 숨겨야 하는 것이 된다. 억압 속에서 여성들이 무력하게 마비될 때가 많다. 그럼에도 입을 열고 목소리를 단단하게 내는 무표정한 여성들과 그 연기들을 주목하고 싶다. 하윤경의 그러한 연기가 도리어 올곧게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하윤경의 연수와 레인처럼 여성은 삼켜내거나 울거나 한에 맺힌 절규로써 자신의 고통을 표출한다. 그들의 입술에 자리한 침묵을 보았기에 연수와 레인이 어떻게 연기되는지 말하고 싶었다. 〈경아의 딸〉과 〈딸에 대하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혐오 표현이 거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연수와 레인을 닮은 수많은 여성이 현실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미 너무 많이 참아서 분노를 잃었다. 웃고 우는 일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분노하는 일도 분명 좋은 일이다. 여성의 분노가 다른 여성, 다음 여성이 분노할 수 있게 할 희망에서 탄생하길 원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끝까지 해보려고요.”라고 답했던 연수처럼, 함께라는 유일함을 보여준 레인처럼 여성들은 희망할 능력이 있다. 희망은 이미 무표정한 수많은 여성 안에 들어 있다.

241010_수연 보냄.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