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 여전히 괜찮아지고 싶은 우리에게 🌌

레이첼 램버트,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필기체의 제목, 여성 주인공, 세밀한 감정 묘사, 우연, 그리고 사랑. 얼핏 보면 고전 멜로드라마 같다. 그러나 〈백설공주〉의 OST, ‘With a Smile and a Song’으로 마무리 되기까지, 우리의 프랜은 백마 탄 왕자를 그저 기다리지 않는다. 불안이 회피가 되고 방어가 공격이 되는 그가 알려줄 것이다. ‘죽음’을 딛고 몸과 마음을 움직여 용기를 내는 마법같은 순간들을. 

💭 여전히 괜찮아지고 싶은 우리에게 🌌

영화 노 베어스 포스터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불행하고,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두려움에는 늘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감정들을 따로 떼어 놓고 볼 수는 없는 법이다.”

마르탱 파주 『완벽한 하루』 중에서 

 

 

영화의 제목에 대해 고민하다 위 글귀를 만나게 됐다. 2018년에 출판된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에세이 첫 장의 머리말이다. 당시 그 유명세에 따라 제목이 다양하게 활용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원제가 〈Sometimes I Think About Dying〉인 본 작품이 ‘가끔 죽음에 관해 생각해’ 같은 직역이 아닌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로 의역된 맥락이 궁금했다. 

 

익숙함에 편승해 너무 쉽게 결정한 제목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왜 또 사랑인데, 조금 진부하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고. 다만, 책에서의 글쓴이가 기분부전장애, 곧 경도의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으며 자신의 안팎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상담을 통해 고유한 취약성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나갔다는 점에서 느슨한 연결고리가 보였다. 

 

영화 속 주인공인 프랜 역시, 아주 매혹적인 죽음들을 가까이하며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기피 속, 권태롭게 살아온 여성이었으니까.  

차분하게 움직이는 배와 자동차, 여기저기 피어난 들꽃, 고요한 호수, 서서히 밀려오고 나가는 바다. 한 컷 한 컷 사진처럼 비치는 풍경에서 한적한 항구 마을의 평온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곁에 무미건조하게 선 프랜이 있다. 두 발은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지만 표정은 영 낯설어 보여서, 연이은 풍경에 섞이지 못하고 이질감을 준다. 외지인은 아니지만 외부인처럼 행동하는 그의 현재 상태이기도 하다. 

 

(아마도) 매일 엇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익숙한 차림을 하고, 익숙한 길을 건너, 익숙한 건물에 들어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다시 비슷한 시간에 귀가하는 게 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주변인들의 대화는 백색소음처럼 존재한다. 화면에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스스로를 손쉽게 배제하는 프랜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캐롤이 퇴사하면서 모두가 그리움과 애정을 넘치게 담을 때, 그는 ‘퇴임 축하해요’라는 한 마디로 자기 몫을 대신한다. 다 함께 케이크와 샴페인을 나눌 때도 조용히 자기 것을 챙겨 자리를 피한다. 신입을 위한 어색한 친목 도모용 자기소개도 바쁜 직장인을 위한 가공식품으로 때웠다. 그렇다고 ‘가족 같은 회사’ 속 외톨이는 아니다. 가족인 척하는 집단 속 아웃사이더일 뿐.

그런 프랜이 신경을 기울이는 건, 오직 죽음뿐이다. 그는 시시때때로 죽음을 그려본다. 커다란 선박 위로 얕게 휘날리며 천천히 올라가는 노란 올가미에 두둥실 몸을 띄워본다. 이끼와 습기로 둘러싸인 숲의 폭신한 풀밭 위에 지난 상처와 함께 파묻혀 있다. 유유히 치는 파도 소리를 뒤로 하고 아늑하게 쌓인 장작 속 작게 일렁이는 불꽃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깊은 내면 속 한 마리의 뱀이 여유롭게 휘적거리며 다가오는 것처럼, 프랜의 죽음은 퍽 아름답고 이상하리만큼 위화감이 적다. 그러니까 어떤 불안감도 아쉬움도 없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관계 속에서 본인을 자각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가족마저도 생활에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 그는 실존에 대한 풀이를 고독하게 이어간다. 죽음은 이 불편함을 끝낼 하나의 이상적인 도피처다.

 

그런 습관적인 삶을 새로운 사원으로 들어온 로버트가 동요시킨다. 덩그러니 놓인 몸뚱어리에 작은 벌레들이 하나둘 올라와 간지럽히듯 소소하게 프랜을 자극하는 것이다. 덕분에 평소와는 다르게 자꾸 귀가 열리고, 그쪽을 기웃거리고,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 한 번의 머뭇거림, 한 번의 웃음, 한 번의 영화, 한 번의 식사, 그리고 한 번의 용기가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끈다. 

물론 결과가 첫 키스처럼 달콤하지만은 않다. 현실과 이상, 그 경계에 있던 프랜이 핸들을 틀자, 자신만의 세계는 펑 터지고 요동친다. 사실상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도 같은 만남에 곧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아무리 로버트가 사교적이고 개방적이고 상호작용에 능했든 간에 말이다. 

 

두 번 이혼했다는 사정 때문인지, 대뜸 사랑에 빠져 본 적 있냐고 물어서인지, 프랜의 표정은 굳어간다. 당신을 좋아하니까 알아가고 싶어 던진 질문이 취조 같았는지, 오히려 더 단단히 철벽을 치고 멋대로 상처를 준다. 상대에게 설렜고, 조바심이 났고, 궁금했지만 보이는 것 이상의 자신을 내보일 준비는 미처 못한 것이다. “재미없는 얘기예요.” 마치 소라게처럼, 프랜은 단단한 껍질 안으로 숨어버린다. 

 

이윽고 의도치 않게 툭 튀어나온 방어적인 언행에 죄책감을 느끼듯, 서럽게 흐느끼고 깊은 잠 속에 가라앉는 프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신발마저 벗어버린 채, 그대로 허물어져 길게 늘어진 프랜. 깊은 잠에 영원히 빠져들 것만 같던 그가 다시 눈을 뜨게 된 건, 전에 없던 결심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이 프랜을 변화시켰는가. 전날의 어색함에도 기꺼이 파티에 나갔을 때부터. 나름 괜찮았던 첫 데이트 이후 채팅을 읽어주지 않자 먼저 다가갔을 때부터. 영화에 대한 혹평을 상대가 오답이 아닌 의견으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어쩌면 시답지 않은 농담을 무심코 건넸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로버트를 통해 비록 매끈하지 않을지라도 괜찮은 상호작용일 수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좋은 시간을 보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곳은 죽음에 대한 묘사를 하나의 재치이자 놀이로 향유하는 공간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습관처럼 하던 상상을 이곳에선 부담 없이 표출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민낯도 살짝 공개됐다. 직장 동료였던 개럿은 (사우디 사람이라 그런지) 알고 보니 채식주의자인 척을 하고 있었고, 스프레드시트 정리가 아닌 일에 실력을 발휘한 프랜은 외로웠겠다는 고향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마저 내비친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순간이 남들 앞에서 주어지고, 그것이 온전히 내 일부로 이해될 수 있음을 경험했으니,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바뀌었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믿음과 가능성, 공동체에 열린 마음은 이렇게 우연히 싹튼다. 프랜은 그 미약한 우연을 붙잡고, 보다 강력한 자기로의 회귀를 잠시 멈춘 채 밖으로 나가, 함께 나눠 먹을 도넛을 사러 갔다. 

“있지, 난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바깥을 바라봐. 커피를 내리고 자리에 앉아서 생각해. ‘괜찮아, 괜찮아. 지금 이게 내 인생이야.’ 얼마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든 머릿속으로 뭘 상상하든 지금 내가 처한 이 현실보다 현실적일 수 없거든. 정말 힘들어, 그렇지? 인간으로 사는 거.”

 

마음 같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고 살아 내보자는 캐롤의 위로에 울컥하는 프랜의 심경이 스크린 너머로까지 전해진다. 이후 이어지는 그의 솔직한 고백에 눈시울이 붉어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다르지만 그렇게 다르지 않은, 평범하게 우울하고 그럼에도 행복했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직도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반복되는 불안이거나 지나가는 망상이거나 습관적인 직감이다. 꿈과 현실을 가리지 않고 비집고 들어오니 진절머리가 나다가도 포기한 지 오래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은 역시 참 좁다. 어느 날 이 얘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고, 그보다 조금 더 지난 오늘날에는 우연히 괜찮은 영화를 만나 또 다른 이에게 그 심정을 돌아보며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기분 좋은 상상이 있다. 한 마리의 사슴이 두 마리의 사슴이 될 때까지. 엄마와 딸들의 삶을 무심코 바라보던 눈이 노력하고 싶은 상대에게 향하고, 빈자리를 매만져보던 손이 포옹해 주는 품을 껴안을 때까지. 한 편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설득력을 못 이긴 채, 이 영화를 가지고 왔어야만 했던 한 관객의 말이다. 

 

 

영화를 왜 그렇게 좋아하죠? 

좋아하니까요.

왜요?
일단 영화를 보고 뭔가를 깨닫게 되고 또 이해하는 과정이 있죠.

그런 걸 좋아해요?

아주 많이요.

241205_예은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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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 여전히 괜찮아지고 싶은 우리에게 🌌”의 2개의 댓글

  1. “타인에 대한 믿음과 가능성, 공동체에 열린 마음은 이렇게 우연히 싹튼다. 프랜은 그 미약한 우연을 붙잡고, 보다 강력한 자기로의 회귀를 잠시 멈춘 채 밖으로 나가, 함께 나눠 먹을 도넛을 사러 갔다.” 문장이 콕 박히네요… 여담이 내 우연이고 공동체고 믿음이고 떡볶이고 사랑이에요…

  2. 살다가 종종 찾아오는 고난이나 역경과 맞닥트릴 때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부딪치곤 해요. 언젠간 제 꿈속에 다가가길 바라면서요. 꿈이 현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인간이어서 힘들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기쁜 일도 곧 많아지겠죠. 앞으로도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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