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헤이,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얼마 전 〈대도시의 사랑법〉의 노상현 배우가 신인상을 수상하며 “영화가 더 좋았던 이유는 좋은 메시지들이 많은 작품이어서 작업하는 것이 유의미했기 때문”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과연 보수적인 한국 대중문화계에 데이트 폭력, 학내 성희롱, 임신중절권, 성소수자 혐오, 아웃팅 등 다양한 메시지를 끌어올린 영화였다. 한국 동시대 퀴어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의 얼굴과 이름을 수많은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던 점은 고무적이었고, 여성과 성소수자가 사회적 약자로서 겪는 차별과 혐오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한 점은 새로웠다.
하지만 주인공이 게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마케팅 방식과 더불어, 다루고자 하는 의제에 비해 큰 저항적인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영화가 ‘대중이 용인할 수 있는’ 지점을 저울질하는 동안, 정작 퀴어 당사자들에게는 새로운 이야기로 다가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물론 네 편의 연작소설 중 「재희」만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나온 선택일 수 있겠으나, 그 선택마저도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관객을 겨냥하려는 영화의 입장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영화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가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아쉬워졌다. 대도시의 익명성 아래 더 자유로워지지만, 철저히 타자화되는 퀴어 존재를 탐구하는 이 영화가,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이 한국 사회에 전하던 메시지와 더욱 공명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애덤의 불안한 세계는, 지금껏 한국 사회가 외면하던 문제를 드러낸다. 질병 확진자의 동선에 게이 클럽이 있다는 이유로 혐오를 정당화하던 일이 불과 4년 전이다. 영화는 이런 차가운 도시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해받는 위로를 전한다.
혼자만의 방으로 돌아가는 게 무서웠다. 물론 방이 무슨 짓을 할 리는 없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런 건 알고 있었다.
야마다 타이치, 『이인들과의 여름』 중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는 야마다 타이치의 소설 『이인들과의 여름』(1987)을 원작으로 둔다. 사실 이 소설은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에 의해 한차례 동명의 영화(1988)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원작을 그대로 영상화하면서도 노부히코 감독의 장기인 기괴한 상상력을 살려 흥미로운 호러 코미디로 완성됐다.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지금, 왜 앤드류 헤이 감독은 이 이야기를 런던을 배경으로 한번 더 가져와야 했을까? 아내와 이혼한 뒤 고독하고 우울한 삶을 사는 극작가 하라다로부터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는 겪어보지 못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가족에게조차 이방인이 되어야 하는 퀴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80년대 에이즈 위기와 더불어 퀴어, 특히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던 시기에 퀴어 소년으로 자라야 했던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보다 정치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I always felt like a STRANGER in my own family anyway.
Coming out just puts a name to the difference that had always been there.
가족들이랑 있어도 항상 겉돌았거든요. 커밍아웃이 그 이질감에 쐐기를 박은 셈이죠.
퀴어에게 ‘집’이 없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정상성’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쉽게 폭력에 노출되고, 나를 정체화하는 말들은 모욕의 언어로 돌아오지만 가정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가족관계를 부정당하거나, 강제로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일도 흔했다. 질병과 퀴어를 곧장 연결해 커밍아웃을 곧 사형선고로 받아들이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거니와, 어찌저찌 커밍아웃에 성공해도 ‘정상가족’을 꾸리고 사는 다른 형제들에게 밀려 가장자리에 내몰린다.
그렇게 ‘집’을 잃은 퀴어들은 자신들을 이해하는 커뮤니티, 그들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문화에서 소속감을 찾게 된다. 애덤의 경우 방안에서 Pet Shop Boys, Frankie Goes to Hollywood와 같은 80년대 퀴어 밴드 음악을 들으며 자신을 이해했다. 특히 앤드류 헤이 감독이 어린 시절 반복해서 들었다는 ‘The Power of Love’는 영화의 시작과 끝, 해리와의 첫 만남 등 중요한 순간마다 언급되며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감정을 연결하는 축이 된다.
그래서 애덤은 유령으로 나타난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해야만 했다. 어쩌면 이는 부모님과 식사를 함께하거나 크리스마스 트리를 함께 장식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빼앗겨 버린 기회를 다시 한번 잡아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만 했다.
(게이라고 사람들이 못되게 구는 건) 다 옛날얘기예요. 아이 가질 수 있어요. 남자끼리 결혼할 수 있어요. 여자도요. (에이즈에 관해서도) 모든 게 달라졌어요. (어릴 적 친구들이) 무시하고, 따돌리고, 변기에 머리 집어넣고, 얼굴에 압정 던지고. 아빠였어도 저를 괴롭혔을 거라고 짐작했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당해도 혼자 견뎠죠. 다리를 꼬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혼내셨죠. 아직도 다리 꼬면 그 생각이 나요. 아빠, 저도 이해해요. 오래전 일이잖아요.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의 부모님에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비단 퀴어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부모님과의 대화를 통해, 애덤은 커밍아웃의 완성과 아버지의 사과라는 불가능한 바람을 실현한다. 아버지와의 포옹 후 돌아가는 애덤의 얼굴은 보다 홀가분해 보인다. 그는 어린 시절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과거와 완전하게 연결된다.
After this, I want to go out.
You and me together, into the world.
이제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어. 너랑 같이, 세상으로.
영화에서 가장 해방적이면서도 섹시하고, 우울한 장면이다. Blur의 ‘Death of a Party’를 배경으로, 애덤과 해리는 함께 클럽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키스하며 밤을 보낸다. 삶과 죽음,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애덤을 구하는 것은 사랑에 굶주린 연인이다. 결국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는 너와 내가 연결되고, 우리의 외로운 삶을 이해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잔인한 반전을 마주한 애덤이 “바로 여기 있잖아, 나랑 같이.”라고 말하는 마음에서 그 절박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I was so scared that night.
I just needed to not be alone.
그날 밤 너무 무서워서 혼자 있을 수가 없었어.
대도시에선 누구나 쉽게 외로워진다. 그곳이 아무도 살지 않는 아파트이건, 붐비는 대중교통이건, 시끄러운 게이 클럽이건 상관없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다. 이 마음을 드러내는 건 종종 비참하기에, 그를 이해하는 애덤은 주변부(edge)에 있던 해리를 우주의 중앙으로 끌어당긴다. 외로움을 수용하고 타인을 집안으로 초대할 때, 비로소 고독은 우리 모두를 연결하는 매개가 된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사람들, 그래서 더 깊게 이어질 수 있다.
241226_세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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