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담 제23호 〈러브레터〉에서는
한 사람이 짧은 추천과 함께 사랑영화를 보내면,
이를 받은 다른 사람이 답신으로 비평을 작성합니다.
상희🦥가 세림🍄에게 보내는 사랑영화 💌
세림에게.
175 이상, 청순한 소금상 (짝눈 오히려 좋음)
욕 안 하는 사람
웃긴 사람 ← 중요 (유머코드 맞아야 함)
웃긴데 여럿이서 있을 때 나대지 않는 사람
…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형 리스트, 다 하나씩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런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내 품으로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항상 상상해왔어.
그런 망상의 절망편이 캘빈의 경우 아닐까? 사랑과 통제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사랑을 어떻게든 구체적인 형상으로 빚어내려는 시도는 불가피할 테니까.
사랑을 구성하는 건 뭘까? 사랑해서 너의 면면을 마음에 들이는 건지, 리스트를 전부 충족하는 것이 사랑인지, 그 선후관계를 항상 헷갈려 왔어. 아니, 여전히 묻고 싶지. 갈 곳 잃은 질문에 대한 세림의 답이 궁금해져.
최근 리스트를 업데이트한 상희가.
ㄴ99. 캘빈같지 않은 사람 (new!)
🔏 나의 완벽한 연인 🔏

- 우선,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싫다.

‘캘빈’은 19세의 어린 나이에 출간한 첫 작품으로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이른바 “천재 작가”다. 하지만 그 폭발적인 유명세도 10년 전 이야기일 뿐, 가끔 쓰는 단편 몇 편을 제외하곤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져 있다.
내향적인 강아지 ‘스카티’ 산책시키기, 형과 함께 체육관에서 운동하다 “섹스 좀 하고 살아”라는 잔소리 듣기, 타자기에 꽂힌 빈 종이 노려보기, 정신과 의사에게 글이 안 써지는 원인을 토로하기. 그런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던 캘빈은 “뭐라도 대충 막 써보라”는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이고는, 자기 자신이 많이 투영된 ‘캘빈’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신비로운 소녀에 관해 쓰기 시작하는데, 그 캐릭터가 엄청난 영감이 되었는지 슬럼프도 잊고 밤낮으로 글쓰기에만 몰두한다. 이름은 ‘루비 스팍스’. 오하이오주 데이턴 출신, 고등학교 때 선생님과 자서 퇴학당했음. 마지막 남자친구는 49살, 그 전에는 알코올중독자. 조금 푼수지만 언제나 약자를 응원하고,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인물. 캘빈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와 어느새 사랑에 빠진다.


난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어. 나는 저 남자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 영원히 평생토록.
나한테 싫증 나면?
안 그럴게, 약속해.
그렇게 밤새 타자기를 두드리며 루비와의 시간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원고 속 글자로만 존재하던 루비가 캘빈의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도 밤새 글 쓰느라 고생한 자신을 위해 아침을 준비해 주는 여자친구로. 캘빈이 상상하고 써냈던 모습 그대로.
남성 작가가 쓴 소설 속 캐릭터가 그의 여자친구로 살아나는 이야기. 작가가 여자에 대해 쓰는 모든 문장이 사실이 된다는 설정까지.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러브 스토리라지만 확실히 설렘보다는 섬뜩함이 앞서는 내용이다. 루비는 캘빈의 사랑과 욕망, 외로움과 자기애가 뒤섞인 ‘문장 덩어리’로 태어난 존재다. 완벽히 설계된 여자친구와 행복한 연애를 하는 건 며칠뿐, 루비가 캘빈이 창조한 캐릭터로만 남아 있지 않고 자아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취미활동을 통해 새로운 커뮤니티에 속하고 자신만의 친구를 만들기 시작하는 루비에 다시 허전해진 캘빈은 숨겨 뒀던 원고와 타자기를 도로 꺼낸다.
찌질했던 몇몇 캐릭터들이 떠올랐는데, 먼저 〈어파이어〉의 레온. 여기도 글이 안 써지는 예민한 작가인데, 열등감에 싸여서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찌질함까지 겸비했다. 그리고 〈컴패니언〉의 조쉬. 섹스 로봇 여자친구 뒤통수치고, 성격이나 외형을 제 입맛에 맞게 조절하는 음침한 남자다. 캘빈은 뭐랄까. 그 두 캐릭터의 못남이 조화롭게 뒤섞인 것 같달까…. 폴 다노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인지, 아니면 조 카잔 옆에서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에 괜히 질투가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남자를 계속 보고 있는 게 힘들었다.

- 이 영화가 폭로하려고 했던 건
캘빈과 루비의 관계는 귀여운 연인 또는 예술가와 피조물이 아니라, 실제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적인 권력 구조의 은유이기도 하다. 한쪽이 상대의 감정과 일상 전부를 통제하려고 하고, 상대는 점점 주체성과 존엄을 잃어 가는 과정. 시작은 사랑이었을 수 있지만 불어난 통제 욕망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런 구조에 취약한 여성들은 종종 사랑이라는 감정 아래 무너진다.
그 관계가 자칫 낭만적으로 포장될 수 있는 애매한 입장을 경계해서인지, 영화 후반부는 말 그대로 ‘폭주’를 한다. 루비에게 ‘사실 넌 진짜가 아니고, 자신의 환상을 녹여 만들어냈다’는 최후의 고백을 하는 캘빈은 또 한번 타자기 앞에 앉는다. “루비가 손가락을 튕긴다”, “루비가 옷을 벗고 노래한다”, “루비가 무릎을 꿇고 개처럼 짖는다”, “루비가 바닥을 구르며 사랑한다고 소리친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그 장면을 보는 내 표정은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 아마도 통제와 조종의 과정을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그 환상이 얼마나 끔찍한 착각인지 드러내려 했던 것 같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는 영화 초반 캘빈이 루비를 프랑스어로 말하게 만들 때부터 불쾌했다.
〈루비 스팍스〉가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것이 이런 지점이다. 우울한 루비를 웃게 하고, 자신만을 사랑하게 만드는 캘빈의 폭력적인 욕망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아래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루비를 힘으로 제압하는 장면은 캘빈의 억울한 마음에 이입하도록 구성되었고, 루비가 자신을 찾아오도록 글을 쓴 뒤 이어진 장면에선 섹스 이후를 암시하며 ‘아무것도 모른 채 그에게 매달리는 루비’의 모습으로 캘빈의 회복된 자존감을 강조한다. 의도가 어떻든 코미디 톤으로 포장하면 문제는 흐려진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통제와 맞닿아 있다. 사소한 일상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 중요한 문제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 관계를 주도하고 싶은 마음, 부담을 떠맡기고 싶은 마음 모두 자연스럽다. 상대를 통제하거나 상대에게 통제받는 감각에서 오는 만족감이 사랑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서로의 욕망을 수용하자는 약속이 깨지기 시작하면 관계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루비 스팍스〉는 글을 쓰는 자와 아닌 자 사이의 권력 차에 빗대어 이를 이야기한다. ‘루비’ 역을 맡은 배우이자 영화의 각본가 조 카잔은 그 해로운 구조를 스스로 해체하는 글을 썼다.
배우라는 직업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 위에 서 있다. 오늘 외운 대사가 촬영장에서 갑자기 수정될 수 있고, 지금껏 연구한 캐릭터의 설정이 바뀔 수도 있다. 여성 배우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 특히 더 취약해지기 쉽다. 자신의 역할이 편집실에서 어떻게 조정될지, 대중에게 어떻게 소비될지 예측하기 어렵고, 이런 상황은 종종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오랫동안 남성 각본, 연출가들의 ‘여배우’였을 조 카잔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루비를 ‘꿈속의 신비로운 여자’로 불러내, 환상을 벗어낸 자유로운 캐릭터로 끝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