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 얼굴에 펀치 날리기 대신 꽃다발 집어 들기 🥊

여담 제23호 러브레터 포스터

여담 제23호 〈러브레터〉에서는
한 사람이 짧은 추천과 함께 사랑영화를 보내면,
이를 받은 다른 사람이 답신으로 비평을 작성합니다.

세림🍄이 수연🦄에게 보내는 사랑영화 💌

수연에게.

 

“아무래도 저…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국민 영웅이 된 복싱 선수가, 기자회견 직후 코치에게만 비밀스럽게 털어놓는 말이 사랑에 빠졌다는 자백이라니. 너무 귀여워서 너털웃음이 났어.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눈동자나, 연인 생각에 훈련에는 집중을 못 하는 모습, 이 모든 걸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코치까지. 웃기고 귀여운 영화지.

 

나에게 사랑이란 언제나 그런 거였거든. 나도 모르게 부풀던 마음을 자각하게 되면,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게 되고, 상대의 마음을 궁금해하느라 하루의 절반을 쓰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아서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같이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자꾸 살이 찌는…

 

그래서인지 이런 솔직하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만나면 두고두고 꺼내보게 돼. 종종 수연이 여담의 ‘망한 사랑’을 맡고 있다는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런 너에겐 두 사람의 일상이 어떻게 다가갔을지 궁금해지네. 그 사랑스러움이 전해졌길!

 

세림 보냄.

🥊 얼굴에 펀치 날리기 대신 꽃다발 집어 들기 🥊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 얼굴에 펀치 날리기 대신 꽃다발 집어 들기 🥊

사실 러브레터는 이런 거 아니야? 평소에 전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진심을, 용기 내서 하지 못한 고백을, 작은 종이 몇 장에 꾹꾹 눌러 담아서 지난날의 미적지근했던 순간들에 변명을 보태는 거지. 너의 얼굴 앞에서는 쑥스러워서 굳어버렸지만, 사실 진심이 아니었어. 이게 나의 진짜 마음이야… 이런 거. 그래서 러브레터라는 낯선 단어를 들을 때, 클래식 멜로 영화의 이상적인 배경 곡에 더해 어떤 느끼함과 작위성이 함께 느껴지는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해. 그런데 1960년대 핀란드의 올리라는 남자는 이런 러브레터가 필요 없었을 거야.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속사정을 다 알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사랑을 발설하는 모습이라니.

“몇 킬로야?”
“조금 넘네요. 60을요.”
“젠장 뭐라고?”

결혼식에 가기 전 구두에 신문지를 깔아야 할 만큼 작은 남자, 올리 마키는 세계 챔피언 권투 선수가 되기 위해 기존 몸무게였던 60킬로에서 추가로 페더급 몸무게인 57킬로까지 감량해야 해. 그의 오랜 친구였던 라이야는 “사랑은 심각한 건가 봐.” 라고 말하는 과감하고 사랑스러운 선생님이지. 그 사이에서 코치인 엘리스는 올리를 미국 복서 데이비 무어와의 경기에서 이기게 하려고, “지금은 사랑에 빠지기엔 최악의 상황”이라며 관계에 압력을 가하기도 해.

 

운동하고 땀 흘리고 펀치의 강한 타격 소리로 채워질 줄 알았지만, 오히려 영화는 올리가 코치의 부름에 따라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포즈를 취하는 장면들로 채워져. 그리고 그 뒤편에서 몰래 사랑하는 라이야와 눈을 마주치는, 어색하지만 행복한 순간들도 기억해. 제목이 알려주듯이 권투 영화가 아니라 그의 행복과 사랑에 대해 다루기 때문일 거야. 아니, 사실은 그가 ‘가장 행복한 날’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도 포함되어 있어서 늘 찬란하지만은 않아. 올리는 고름과 피로 점철된 발의 고통도, 공산주의자냐며 떨떠름해하는 늙은 돼지들도, 순식간에 지나간 패배도 감내해야 하지.

영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스틸
영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스틸

사랑 이야기엔 빌런이 등장하기 마련이야. 뒤에서 몰래 괴롭히는 악녀나 시어머니 같은 설정들은 진부하지만 파국으로 치닫는 삼각관계는 더 흥분되지. 하지만 연애 당사자들한테서 비롯되는 문제들이 현실 속의 장애물들에 더 가깝지 않아? 언니도 사랑 때문에 점점 살이 붙었다고 했지. 올리도 마찬가지로 호언장담했던 감량이 쉽지만은 않아. 당연하지. 사랑이 가벼울 리 없잖아.

 

코치의 심심찮은 방해 공작 때문인지 부담을 느꼈던 라이야는 올리와 채 인사하지도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황급히 몸을 실어. 그가 떠나간 후 올리는 훈련에 매진했어. 그리움에 조금씩 웃음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낮에는 연습과 감량을, 밤에는 후원자들과 유명 인사들을 만나며 국민의 기대를 받는 권투 선수의 몫을 다하지. 그러다 라이야와 함께 가곤 하던 서커스의 여자가 뒤에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고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연민과 쓴 깨달음을 맛보는 거야. 이때가 올리를 일탈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해.

영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스틸

사랑을 정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도 감응하게 되는 영화 속 대사들이 많아. 내게 가장 없는 고백, 거짓 없는 진심은 이런 거야. 훈련장에서 빠져나온 올리가 결국 라이야를 찾아와 “Mä karkasin”라고 말하던 장면. 이 핀란드어 대사를 번역한다면 “도망쳤어”가 더 옳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도망 왔어”라고 이름 붙여주고 싶어. 그의 마음을 좀 더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너에게로) 도망 왔어”를 더 닮아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야. 도망쳤다는 건 일탈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도망 왔다는 건 ‘너’ 혹은 ‘이곳’에 도착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되잖아. 이처럼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전할 수 있으니.

“만약 지면? 네가 실망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실망해?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안 바라는데.

만약에 누가 실망하게 되면, 그건 네 못난 환상 때문이야.

넌 아무한테도 책임 없어.”

“결혼해 줄래?”

영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스틸

라이야의 승낙을 마음에 품은 채 올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하지만 이미 알다시피 관중의 힘찬 함성과 함께 56.98 킬로라는 무게로 올라간 링 중앙에서 결국 지고 말지. 중압감에 오랫동안 힘들어하던 그의 걱정과 다르게 승부는 너무도 쉽게 결판났어. 넘어지고 일어서고 또 넘어지다 사람들의 야유 소리가 거세질 때쯤 심판은 이제 의미를 잃어버린 그의 가드에 구두점을 찍어버려.

 

그런데도 올리가 이날을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라이야와의 약혼 때문이야. ‘라이야와 올리, 1972년 8월 17일’이라고 새긴 반지가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비탄에 빠지지 않고, 그날의 경기를 마무리하는 시끄러운 연회장을 빠져나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거야. 이리 오라는 코치의 부름에 “잘 있어요!”라고 경쾌히 손 흔들어주는 라이야의 뒤를 따르던 올리의 홀가분한 표정이 기억나네.

영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스틸

한 가지 더, 사랑은 핑크빛이라던데 이 영화는 왜 흑백을 선택했지? 나는 그림을 시작하면서 흑백은 세상을 선명하게 보는 방법이라고 배웠어. 햇빛을 산란하고 반사해 눈부신 윤슬을 만드는 물이 있는 반면에, 사물들의 무수한 우연의 일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완전한 그늘도 있다고. 그럼 나는 알맞은 지점에 지우개와 흑연을 바꿔가며 적절히 묻히면 되었어. 어디가 빛이고 어디가 그늘인지 뚜렷이 안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비슷해. 알게 됨으로써 어디로 향할지 선택하게 만드니까.

 

마치 영화 끝에 자연스럽게 라이야 옆에 서게 된 올리처럼, 내가 있을 자리가 어딘지쯤은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건가 봐. 곁을 지나가는 노부부를 보며 “우리도 저렇게 될까? 행복하게?”라고 물어오는 이에게 “당연하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야.

250703_이번만큼은 망한 사랑이 아니라 좋은 수연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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