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아 한센-러브, 〈다가오는 것들〉
“영화 속 질문은 내가 항상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미아 한센-러브는 말한다. 베르히만 감독의 안식처에서 머무는 크리스, 현실적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산드라, 낯설어진 일상을 경유하는 나탈리. 이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서로 다른 ‘집’을 찾아가 본다.
📚 미지의 세상 속 충만함을 찾아서 📚

우리가 앞으로 백 년 정도 살게 되고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그때에 그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치게 될 것입니다._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울프가 여성의 창작 활동을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함을 선언한지 100년이 다 되어 간다. 아직 그 주장은 유효할까? 확실한 건, 부족한 경제적 여건이나 돌봄 노동의 의무에 대한 편견, 전문가의 성별에 거는 기울어진 기대와 불평등한 발언권의 분배는 여성 (예술가)에게 여전히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장애물을 통과한 채 탁월한 작품을 써낼 수 있는지, 또 그 기회를 능히 잡을 경우가 몇이나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런 관점에서 미아 한센-러브는 어쩌면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을 가진, 운이 좋은 경우일 거다. 그는 그 필요성과 가치를 인지하고 있다. 가족, 일, 사랑 그리고 예술. 그동안 이들 간의 조화를 고민하고 탐구하며 비슷한 듯 다른 집을 조망해 왔다.
그 집을 통해 양육과 보살핌, 불안과 인내에 익숙한 삶을 이해한다. 사생활과 사회생활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 어떤지도 상상해 본다. 그로 인해 사랑을 갈망하고 떠나간 것을 그리워한다는 것도, 그러한 개별적 주체들이 사실은 표현하고 표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도 알아간다.
그렇게 세워진 감독의 ‘집’들. 〈다가오는 것들〉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그곳들을 들러보자.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포뢰섬에서는 자신을 투영해 한 여성이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과정을 담았다.

〈베르히만 아일랜드〉 속 크리스의 ‘집’: 영화
작가로서 오랜 연인의 마지막 장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인 크리스의 하루에는 많은 것이 개입한다. 한 켠에는 영화는 사랑하지만 납득하기 쉽지 않은 베르히만 감독의 사생활과 서사적 선택이 있다. 다른 한 켠에는 딸 준에 대한 마음과 자신과는 달리 척척 써내려 가는 것만 같은 토니의 시나리오에 대한 묘한 질투(혹은 압박감)가 있다.
크리스는 자식 아홉을 택하는 대신 작품 50편을 택한 거장의 얘기를 들으며, 업무와 가정에서 모두 일관되게 충실할 순 없는지를 묻는다. 베르히만의 집, 작업실, 개인 상영관 등에 머물면서도 그의 영화 속 어둠을 경계하는 모습에서 “어떻게든 나의 영화는 빛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슬픔과 재탄생, 상실과 새로운 사랑은 동시에 경험될 수 있다.”는 미아 한센-러브 감독 자신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이미 한 얘기를 반복하기 싫다며, “인물, 대화, 상황까지 모든 게 들어맞는데도 뭔가 발목을 잡아서 자꾸 불안”하다는 심경은 창작자로서 느끼는 신경증적 고충이다. 그런 크리스에게 토니가 건네는 위로와 조언은 왠지 여성이라서, 아내이자 엄마라서 하는 간단한 말 같아 튕겨 나간다. 글쓰기는 분명 철저히 피 말리는 짓이고, 그 순간에 갑작스레 나는 눈물은 누구를 향한 부담감과 원망인지 그 경위가 불분명하니까.
그래서 낯선 대학원생과 즉흥적으로 떠난 비공식 베르히만 투어를 즐기고 돌아왔던 것처럼, 크리스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지 않고 충분히 헤매다 감독의 본분으로 돌아오곤 한다. 공과 사의 철저한 구분이 사라진 가운데 느껴온 답답함, 박탈감, 우울함, 해방감, 간절함, 설렘 등은 그의 시나리오에 녹아든다.
액자식 구성으로 크리스가 자신이 쓰는 작품 속 조지프와 에이미를 마주하듯, 미아 한센-러브 감독 역시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통해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과의 사실혼 관계와 그동안의 생활을 일면 돌아봤을 것이다. 그렇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자신의 ‘집'(사정)은 영감을 쥐여주는 ‘집’을 거쳐 또 다른 그의 ‘집'(영화), 곧 ‘삶’이 된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로, 서로의 ‘리버스 숏’인 〈어느 멋진 아침〉과 〈다가오는 것들〉로 이어진다.

〈어느 멋진 아침〉 속 산드라의 ‘집’: 책임감 혹은 사랑
산드라는 늘 파리에 위치한 그의 작은 집을 나서고 돌아온다. 하루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곳.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거나 그 여운을 즐길 수 있는 곳. 그렇지만 기다리고 무너지며 애써 몸을 기대거나 누이기도 하는 곳. 이곳은 어느 평범한 30대 여성이 머무는 곳이다.
그는 벤튼 증후군으로 시력과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눈과 손이다. 일을 하는 순간에도 남의 말과 글을 번역해 대신 전달한다. 남은 하루의 시간은 린을 보살피며 보낸다. 그러는 사이 “잠들었던” 몸을 깨우는 건 우연히 마주친 클레망과의 지속적인 만남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동안 희미해진 존재감이 때늦은 욕망의 실현으로 조금씩 되살아난다.
물론 그 과정은 어차피 되돌아갈 일상에서 잠시 일어난 조용한 탈선 같기도 하다. 하필 둘 다 가장이다. 더더욱이 산드라는 ‘정부’, ‘엄마’, ‘딸’로서 책임져야 할 명분이 많다. 남의 시선도 신경 써야 하고, 딸의 성장통도 지켜봐야 하며, 아버지를 대신해 집을 처분하고 또 마련해야 한다.
나를 지속 가능하게 해주던 책임감으로부터, 나를 충족시키는 사랑으로 이제 막 나아가며 생기는 과도기. 그 속에서 불현듯 일어나는 분리는 산드라의 공허함을 증폭시킨다. 손수 고른 책, 들었던 음악, 쓰려 했던 글들이 가득해서 어쩔 땐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던 공간을 떠나보내야 할 때. 연락을 기다리는 입장으로써 애인의 다가옴을 기대할 수밖에 없을 때. 어디까지가 의무이고 의지인지 모를 때. 그가 돌아갈 ‘집’은 불분명해진다.
“너희 집은 어디일까?”
“몰라요.”
‘어느 멋진 아침’에 내던져진 질문은 산드라에게서 답을 얻지 못한 채 공중을 맴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을 넘긴 시점이 되면 조금은 달라질지 모른다. 〈다가오는 것들〉은 이미 그걸 말하고 있다.

〈다가오는 것들〉 속 나탈리의 ‘집’: 철학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엄마의 분리 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진다. 퇴직 연금의 개정안을 반대하는 학생들은 학교 폐쇄를 감행하며 작금의 수업 시도를 비판한다. “덜 근엄하고 더 매력적”이어야 판매되는 철학은 시장의 기대와 독자의 이해에 부응할 때 살아남을 수 있다. 여기에 남편이 마침표를 찍는다. 함께 산 세월이 몇 년인데 갑작스레 다른 사람이 생겼단다.
덕분에 안정적인 상태에서 밀려나야 했다. 평생 몸담은 일터인 학교, 쉼과 추억으로 가득한 별장, 화려함은 지나가고 미련과 그리움이 자리하는 엄마의 거처, 이제 막 본인들이 추구하는 삶을 일궈가는 아지트, 익숙함이 자리하는 보금자리까지 나탈리는 방황한다.
하지만 질퍽한 뻘 한 가운데에서 영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한 발짝을 내디딘다. 현실을 외면한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습관적으로 일상을 살아가려는 그이와는 다르게. 집을 나간 적 없던 판도라가 본능에 따라 야생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그는 한 권의 책들을 손에 붙들고 낯설어진 삶에 적응해 나간다.
알랭의 『행복론』, 파스칼의 『팡세』, 루소의 민주주의에 대한 한마디와 『신 엘로이즈』로 현실을 마주하기. 연이은 상실감에 어찌할지 모를 때 “모든 걸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연에 기대어 그저 “진정한 선”을 따르길 바라보고, “지적으로 충만”한 삶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상쇄”하기를 노력했다. “애들은 품을 떠났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나서 되찾은 온전한 자유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한다.

물론 아끼는 제자의 지적처럼, 그저 흔들림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싶었던 ‘부르주아’의 때늦은 위선일지 모른다. 한때 솔제니친의 책을 읽고 공산주의를 좇아 러시아에 방문하기도 했지만 끝내 혁명을 바라진 않았고, 지난 20년간 지긋지긋하게 듣던 브람스와 슈만 보다 우디 거스리의 포크(Folk)가 좋다는 걸 이제 깨달았으니까.
불행과 정치적 타협으로부터 대항하는 대안적인 삶을 위해 밤샘 토론과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에 비하면, 예전에 이미 다 해봤다며 급진성을 논하기엔 너무 늙었다는 한 정상 가족의 ‘참여 지식인’은 전형적인 기성세대 같다. 그러나 영화 초반, 모두에게 숙제로 제시된 명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60대에 이르기까지 “생각과 행동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려 한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다.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기를 놓지 않는 것. 삶을 끊임없이 정리해야 하는 상황 중에도 돌봄을 잃지 않는 것. 무조건의 수용은 아니지만 변화를 배제하지 않고 대화에 나서려는 것. 명백한 진리의 증명 대신 끊임없이 사유하는 철학의 토대를 지켜오는 것. 이 모든 것이 나탈리의 ‘집’이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속 “나는 연인을 잃었다네”로 시작하는 자장가와 현관 입구 근처에 쌓아둔 책들은 그 ‘집’의 넓은 품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다가오는 것’을 지나가게 두며 언젠가의 행복을 기대하듯, 또 다른 희망을 놓지 않은 따듯한 풍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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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마다, 계속해서 운을 시험해 보는 기분이 든다. 문장은 가끔 배설과 같아서 정치적 올바름과 현실적 검열 앞에 길을 잃는다. 그럴 때마다 낯부끄럽지 않으려고 우걱우걱 씹어 먹어버린 것들을 돌아본다. 예술, 철학, 종교, 문장들, 장면들, 신념들. 그래도 어떤 가르침들은 온전히 소화하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집’을 만들고 싶다. 우리가 친히 오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