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소니 심, 〈라이스보이 슬립스〉
짐을 싸고, 또다시 짐을 쌌다. 나긋한 목소리는 소영의 인생을 읊는다. ‘집’ 없이 태어난 아이의 삶은 내레이션 속 짐을 싼 횟수처럼 이동의 연속이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수많은 이동 끝에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자리 잡은 두 명의 디아스포라, 소영과 동현 혹은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돌아오거나, 돌아가거나 🍚


김동현!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은 시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소영의 목소리가 관객을 깨운다. 책가방을 메고 열심히 달려가는 아이와 아이를 잡는 엄마. 엄마의 손을 잡고 간 곳에는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아이들뿐이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함께 캐나다로 건너온 엄마와 아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둘의 이야기는 각각 전개된다. 이주민으로 살아가며 겪어온 차별과 어려움이라는 주제는 같지만, 소영과 동현의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이름에 비해 섞이지 않는다. 이는 소영과 동현이 마주해온, 그리고 마주해야 할 환경이 다르기 때문일 테다.

소영의 주된 활동 공간은 일터다. 소영이 일하는 공장은 소영과 비슷한 이주노동자들이 주를 이룬다.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어려움을 겪거나, 성희롱에 맞서거나, 자식의 이름을 새로 지어야 하는 것은 소영을 비롯한 이주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공통된 어려움이다.
한편, 동현의 활동 공간은 학교와 또래 커뮤니티다. 동현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배척을 더욱 직접적으로 겪어왔다. 작은 ‘라이스보이’ 동현이 또래 집단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들과 비슷해져야 했다. 동현이 데이비드가 되고, 술과 대마초를 접하게 되고, 머리카락과 눈 색이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특히 소영과 동현이 구사하는 언어는 그들의 다원적이고 복잡한 정체성을 반영한다. 소영의 영어에는 한국인의 악센트가, 동현의 한국어에는 캐나다인의 악센트가 묻어있다. 이는 그들이 각각의 집에서 살아온 세월과 경험을 반영한다. 소영의 영어는 완벽한 발음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소영과 함께하는 두꺼운 사전도 소영의 언어다. 동현의 한국어는 소영 말고 사용할 곳이 없다. 소영의 연인인 한국계 캐나다인 사이먼도 한국어를 못하니, 그의 한국어는 오로지 소영과의 소통을 위해 사용된다.

이런 악센트는 소리뿐 아니라 화면에도 나타난다. 전형적인 캐나다의 가정집에 자리한 밥솥과 쇠젓가락, 동양인의 이목구비에 곁들여진 금발과 파란색 컬러렌즈가 그러하다. 이런 악센트는 자연스러움과 동시에 의도적이다. 집에서 맛있게 차려지는 한국식 밥상은 소영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그 흔적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다. 금발과 벽안은 동현이 주위에서 더 자주 접하는 자연스러운 특징이면서도, 그 사회에 속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렇게 각각의 악센트를 간직한 채 평행선을 달려오던 두 모자는 소영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서로를 맞닥뜨린다. 소영은 사이먼을 그저 자신의 연인으로만 둘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찬 동현을 더 이상 회피할 수도 없다. 동현도 애써 무시해 오던, 또 다른 한국인 여자아이를 ‘코리아’라고 부르며 괴롭히는 자신의 친구를 참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를 마주친 순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자 뒤에 곧이어 등장한 한국의 풍경은 갑작스럽지 않으면서도, 또 어딘가 낯설게 느껴진다. 줄곧 1.33:1의 비율을 유지하다 넓어진 화면 역시 관객에게 해방감을 제공하면서도, 여전히 낯설다.
분위기가 익숙해지는 것은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소영과 동현을 집안으로 들이면서부터다. 술을 한 잔 기울이고, 노란 머리에 농담을 나누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목욕탕에서 물장난을 치고, 등을 밀어주고. 동현을 웃음 짓게 만든 것은 단순히 아빠의 고향, 새로이 만난 가족이라는 점보다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고 받아들여 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의 집은 너무 많아서 안정을 느낄 수 없었고,
그 안정감을 어디서 느끼는지 생각해 봤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안정감이 있더라고요.”
– 앤소니 심
소영이 울음섞인 숨소리와 함께 “집에 가자”라는 말을 조용히 내뱉는다. 소영이 말하는 집은 어딜까. 소영과 동현은 캐나다로 돌아갈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간다. 그러나 소영과 동현에게는 또 다른 ‘집’이 생겼다. 남편의 죽음 이후 한국을 외면했던 소영도, 떠나온 시간이 더 길어져 버린 동현도 이제는 돌아갈 수 있는 곳이 하나 더 늘었다.
이렇게 새로, 또다시 마주한 집은 안정감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영이 안식처가 필요할 때, 또 동현이 마침내 홀로 서야 할 때 그가 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될 것이다. 하나의 집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자라고, 비슷한 이들이 주류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소영과 동현의 집을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을 테다. 그런 사람들의 역할은 집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이를 구분 짓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어디에 속하고 어디에서 배제된다. 이때 사람들은 우리의 공간에 철저히 속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적대심을 내비치곤 한다. 이는 한국에서 캐나다로 넘어간 데이비드뿐 아니라, 그 어딘가에서 한국으로 왔을 또 다른 동현도 겪고 있을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이란 그 말인즉슨 나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한국이 다시금 소영과 동현에게 집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으로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하며 우리의 공간을 넓혀간다면,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모두의 ‘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정말 너무 사랑하는 영화인데 여담에서 다뤄주니 오늘 아침 기분이 너무 좋아져 버렸습니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매번 영화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