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담 제23호 〈러브레터〉에서는
한 사람이 짧은 추천과 함께 사랑영화를 보내면,
이를 받은 다른 사람이 답신으로 비평을 작성합니다.
효진❤️🔥이 유안🍭에게 보내는 사랑영화 💌
유안에게.
‘별 볼 일 없는 사랑’이라서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들의 사랑이 보잘것없다는 게 아니라, 〈과거가 없는 남자〉는 로맨스라고 불리는 판타지로 거듭나지 않고도 사랑 영화가 되어서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사람들도 나도, 보기에 아름답고 화려하고 불편하지 않은 영화를 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돼. 하지만 너도 알지, 갑자기 어떤 부분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 깨닫는 순간 금세 영화에서 빠져나오게 돼. 그 후로는 똑같이 설렐 수 없지.
그래서 시간 여행도, 전용기와 드레스룸,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심지어는 과거 회상 없이도 귀엽고 재미있는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해. 마법 같은 인연이 아니라 친절한 마음이 모여서 사랑 영화가 되니까.
‘사랑이란 뭘까?’라는 이 거대한 질문에는 뾰족한 답을 내놓을 수 없지만, 해답으로 가는 길목에는 바로 그게 있다고 생각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상대방이 누가 됐든 아주 작은 친절과 호감이 켜켜이 쌓이는 것.
쓰고 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상투적인 말 같네…ㅎㅎㅎ 하지만 이 영화는 자기만의 (무뚝뚝한) 성격으로 그 질문에 대답해. 과거란, 도시란, 가난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도 그렇게 하는 것 같아. 유안이의 또렷한 글은 또 어떻게 대답할지가 궁금하다. 재미있게 봤기를…! 그리고 언제나,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글 쓰는 데에 너무 골머리 앓지 않기를.
우리 꼭 다음 주에 만나!!
효진
💞 이름이 없는 사랑 💞

어두운 밤, 한 남자가 강도들에게 두들겨 맞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병원, 조용해지는 심장 소리, 의사는 사망을 선고한다. 영안실로 보내. 나는 산부인과로 가야겠어. 의사의 말 뒤로 심장이 멈췄던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의미심장한 의사의 말처럼, 다시 찾은 남자의 삶은 환생에 가까워 보인다. 지나가던 아이들의 가족에게 거둬진 남자는 옛 생의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 나이, 직업, 성격,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까지 전부. 그래서 남자가 겪는 모든 일들은 그의 새로운 삶과 깊게 맞닿아 있다. 과거 같은 건 정말 없는 것처럼 새로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쌓고, 새롭게 사랑에 빠진다.

이를 보고 있자면 한 성인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부처는 이 세상에 독립적이고 고정된 ‘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나’라고 인식하는 존재는, 무수히 많은 객체들과의 관계를 거쳐 존재하는 비실체적인 연기緣起의 결과다. 남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를 구성하는 건 새롭게 쌓아 올린 주변과의 관계와,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과거가 맺어온 인연의 결과들이다.
자신을 거둬준 부부와 함께하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경찰을 통해 강아지를 만나고, 배를 채우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싹 틔우고, 그 사랑의 주위를 맴돌다 작은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남자의 새로운 삶이 전개되는 와중에,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게 해낸 용접으로 제안받은 일자리나, 여전히 기억하지 못함에도 나타난 전 부인의 존재처럼 이전 삶의 흔적도 남아있다.
한편, ‘이름’과 같이 사회가 한 사람을 규정하도록 도와주는 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자의 삶에 제동을 거는 장치가 된다. 신분이 없는 남자는 중앙시스템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사회에 규정되지 않았다는 점은 공권력이 남자를 의심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은행 강도 사건의 목격자이자 피해자였던 신분은 단숨에 거동 의심자로 전락했고, 그는 제대로 된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대신 남자를 도와주는 건 사람들의 자비慈悲다. 온갖 생명체를 사랑한다는 자慈와 모든 생명체를 불쌍히 여긴다는 비悲가 결합된 자비는, 지극한 사랑의 개념이다. 컨테이너에 살면서도 남자를 거두어 정성스레 돌보았던 가족, 하나님의 사랑을 나눈다는 일념으로 음식과 옷을 나누어주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구세군, 남은 음식을 나누어주는 레스토랑의 직원. 이렇게 자비를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
영화 속에는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추운 밤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나, 곧 일자리를 잃게 될 은행의 직원. 원래 남자의 컨테이너에 살았다는 얼어죽은 전 세입자나, 총소리 뒤로 소식을 알 수 없는 강도까지 모두 가슴 한켠에 남아있다. 이렇게 사회 시스템에서 배제되어 죽음과 끝없이 마주해야 하는 이들을 계속하여 조명하는 카메라에는 감독 카우리스마키의 자비가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즈음이 더욱 마음 속 깊이 남는다. 전생을 정리하고 돌아온 남자가 맞닥뜨린 건 영화 초반, 남자를 폭행했던 불한당들이다. 양손에 목발을 쥔 사람을 괴롭히던 이들은 남자를 알아보곤 그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남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가 맺은 인연과 그를 도우려는 이들이 함께 모여 폭력에 맞선다. 남자는 그들을 물리친 뒤 쓰러진 이를 부축해 일으킨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스쳐 지나가던 하층민들은 더 이상 관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남자와 같은 일을 수백 번도 더 겪었을 테다. 그러나 마침내 함께 모여 불의에 맞서고, 같은 처지의 이를 일으켜 세운다. 이런 과정은 남자뿐만 아니라 남자의 여정을 함께하며 사람들의 자비를 함께 체험한 영화 밖의 관객까지도 연대에 동참하게 만든다.
이 같은 영화적 체험과 연대의 경험은 영화가 ‘남자와 이루마의 만남-사랑-헤어짐-재회’라는 플롯으로 전개됨에도, 이를 단순히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로만 위치시키지 않는다. 그보다는 성애적 사랑’도’ 있는, 보편의 사랑 영화인 것이다. 남자를 돕고자 하는 이웃의 사랑, 이루마와의 사랑 모두 자비에 뿌리를 두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가지들이다.
인간은 언제나 사랑의 실체를 정의하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정체조차 불분명한 남자를 통해 인간의 사랑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왜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사랑을 베풀었을까. 자비란 무아無我가 바탕이 된다. 고정된 실체 따윈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동등하게 되고,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명제 아래 사랑을 나눈다. 말하자면 남자뿐만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는 존재들이다.
‘나’의 확장, 또 ‘나’가 없음의 깨달음, 나도 내가 아니고 너도 네가 아니라면, 또 내가 너로 이루어져 있고 너도 나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를 사랑하기에 어려운 것이 있겠는가. 내게도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확고하지 않기에, ‘나’와 ‘우리’의 영역을 한정 짓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이 내 자비의 범위를 계속해서 넓혀나가고자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