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셔먼, 록키 호러 픽쳐 쇼
예술을 접할 때면 잠시 속세의 걱정을 잊고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상상력이 만든 허구적인 세상이기에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도 때로는 환상에 취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연극과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을 즐긴다. 영화와 연극, 뮤지컬은 닮았지만 다르다. 기록된 필름으로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영화와는 달리 연극과 뮤지컬은 매 회차마다 배우와 관객의 호흡에 따라 생동감 있게 변화하기에 찰나의 순간으로 존재한다. 나는 무대의 이러한 ‘살아있음’을 좋아한다. 그러나 세 예술 모두 창작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여러 규칙에 따라 빈틈없이 짜여있으며, 실재하지 않기에 관객의 앞에는 경계선이 존재한다.
영화와 뮤지컬, 두 장르를 좋아하고 그들의 교류에도 관심이 많기에 여담에서 뮤지컬 영화를 한 번쯤 다루고 싶었다. 이번 호의 주제가 ‘환상’인 만큼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꿈꾸게 해 준 작품을 떠올렸다. 그렇게 〈록키호러쇼〉를 보았던 2019년 여름으로 돌아갔다. 팬텀에게 물을 맞고 프랭크가 호응을 이끄는 가운데 ‘타임 워프’ 춤을 따라 추었던 여름의 한 자락으로
Let’s do the Time Warp again
Let’s do the Time Warp again
〈록키 호러 픽쳐 쇼〉는 뮤지컬 〈록키호러쇼〉를 원작으로 한다. 두 작품은 서사적으로 다르지 않다. 영화는 원작처럼 사회적인 가치에 도전하고 젠더적인 관습을 깨는 도발적인 작품이다. 기괴하고 섬뜩하면서도 선정적이지만, 한여름 밤의 꿈처럼 환상적이면서도 달콤씁쓸하다. 연출적으로도 비슷한데, 무대 연출과 영상화라는 장르적 특징에 따른 차이를 보인다.
Wo-oh-oh-oh-oh-oh
At the late night, double feature, picture show
심야에 펼쳐지는 동시 상영 영화 쇼
I wanna go, oh-oh-oh-oh
난 보러 갈테야
To the late night, double feature, picture show
심야에 펼쳐지는 동시 상영 영화 쇼
살다 보면 우연히 치는 폭풍우로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약혼한 커플 브래드와 자넷은 친구의 결혼식이 끝나고 은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갑작스레 폭우를 만난다. 비를 피할 장소를 찾다가 성을 발견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욕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성의 주인은 영화의 주인공인 프랭크 N. 퍼터이다. 뮤지컬에서는 긴 계단을 내려오며 등장하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등장한다. 계단을 이용한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프랭크의 등장을 더욱 ‘쇼’처럼 받아들이게 해서, 영화 이상으로 그의 세상에 빠지게 한다. 반면에 엘리베이터를 활용한 등장은 프랭크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영화는 시각적 이미지에 집중하여 비주류를 중심부로 이동시킨다. 짙은 화장을 하고 코르셋을 착용한 프랭크는 리프래프와 마젠타라는 외계인 조수를 두었다. 콜롬비아도 그들과 함께한다. 콜롬비아는 프랭크의 팬으로 에디를 사랑하면서 프랭크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들의 비주얼은 시선을 장악한다. 성에는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외계인들이 있고, 그들은 노래에 맞추어 ‘타임 워프’ 춤을 춘다.
외계인과 사람은 비교된다. 외계인들은 사회가 보편적으로 정한 젠더 관념을 벗어난다. 프랭크는 여장 남성이며, 콜롬비아의 경우 영화에서는 여성 배우가 연기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남성 배우가 연기하기도 한다. 프랭크와 콜롬비아의 젠더에 대한 자유로운 설정은 영화가 젠더적 구분을 추구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프랭크 퍼터의 성에서 ‘평범’하지 않은 존재는 오히려 브래드와 자넷이다. 영화의 초반 그들은 과거 작품들이 전형적으로 묘사했던 젠더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 인물은 성에 들어와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에 브래드는 용기 있는 척 자넷에게 성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지만, 자넷은 두려워하며 성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브래드는 용기 있고 대담하며 강한 남성이고, 자넷은 여리고 약하며 연인을 따르는 여성이다.
영화는 사회적 통념으로부터도 벗어난다. 리프래프와 마젠타는 남매이지만 근친 관계이다. 프랭크도 살인과 같은 악행을 저지른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강조하지도, 문제 제기 하지도 않고 컬트적 분위기와 함께 녹여낸다. 이러한 요소들을 흡수한 전개는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들지만, 비도덕적인 행동을 가볍게 다루어도 되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프랭크는 도덕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마치 자신의 세상에 입장하려면 거쳐야 하는 의례처럼 성에 들어온 브래드와 자넷을 붙잡아서 옷을 벗긴다. 그리고 프랭크는 이들 각각에게 연인의 모습을 하고 찾아가서 관계를 갖는다. 콜롬비아가 사랑한 에디를 죽이고, 에디의 뇌를 이용하여 이상적인 인간인 록키를 만들기도 한다.
살인과 강제적인 행동으로 인물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관계를 시도한 만큼, 프랭크는 도덕적으로 비판할 요소가 많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질타할 수만은 없다. 인물들이 ‘나’를 알아가도록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젠더 관념을 따르던 자넷과 브래드는 각기 다르게 변화한다. 자넷은 영화의 초반에는 순종적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솔직해진다. 프랭크와의 잠자리 이후 브래드는 자넷을 그리워하지만, 자넷은 욕망에 눈을 뜬다. 특히 자넷이 록키를 찾아가서 ‘Touch-A-Touch-A-Touch-A-Touch Me’를 부르는 장면은 자넷의 욕정을 표현한다.
Toucha, toucha, toucha, touch me,
날 만져줘
I wanna be dirty
더럽혀지고 싶어
Thrill me chill me fulfill me
황홀하고 짜릿하게 날 채워줘
Creature of the night
밤의 창조물
이 장면은 연출적으로도 흥미롭다. 누워있는 자넷을 위에서 비추다가, 자넷의 시선 위 록키를 비추고, 차례로 다른 인물들을 보여준다. 인물들이 모두 프랭크 퍼터의 성에서 욕망과 쾌락을 만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래드의 경우 프랭크와의 오히려 약하고 찌질한 모습이 강조된다. 자넷의 외도에 놀라지만 용납하고 인물들이 각자의 욕망을 외치는 엔딩에서도 그는 행동하지 않는다. 남성성을 표출하고 싶어 했던 브래드는 프랭크와 엮이면서 존재감을 잃는다. 두 인물의 입체적인 성격의 변화는 이 영화가 젠더 관념을 깨는 것을 보여준다.
프랭크가 만든 록키는 창조 과정도 비도덕적이었고, 자아가 확실하지 않은 수동적인 인물이다. 프랭크는 갈망하던 록키의 이상적인 모습에 만족하고 그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그를 ‘진정한 남성’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록키가 스스로 행동하고자 하면 눈치를 주고 제한한다. 록키는 젠더 관념이 부여된 프랭크의 남성적 취향을 보여주는데, 이는 영화가 오히려 젠더 관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결과를 약화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록키도 변화하면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자넷의 성적 호기심을 받아들인다. 근육을 감상하는 등 자신의 ‘남성적인’ 면모를 즐기기도 한다. 리프래프와 마젠타가 자신을 괴롭히니 성 바깥으로 도망치는데, 이는 주체성을 찾고 싶어 하는 록키의 마음이 잘 표출된 장면이다. 프랭크와 다른 무리들의 억압은 록키를 자극하며, 그가 자아를 찾아가도록 했다.
영화의 엔딩에서 콜롬비아, 록키, 자넷과 브래드는 프랭크를 따라서 가터벨트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다. 프랭크가 메두사 장치를 이용해 인물들을 석상으로 만들었고 이 상태에서 벗어나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프랭크의 묘수에 넘어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프랭크 덕분에 그들은 자신을 옥죄던 것에서 벗어나 마음껏 쾌락을 맛보았다.
프랭크는 사람들의 의심과 저항을 받아왔지만, 이는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와 끝까지 대립한 스캇 박사도 마찬가지이다. 브래드와 자넷을 이어준 은사이며 에디의 삼촌인 스캇은 자신의 과학적인 견해를 들어 프랭크의 계책을 비판한다. 콜롬비아, 록키, 자넷, 브래드가 모두 가터벨트가 입혀졌을 때조차도 프랭크를 거부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다리에 신겨진 가터벨트를 발견한다.
그러나 리프래프와 마젠타에 의해서 프랭크는 죽고, 프랭크의 성은 그들과 함께 트랜실베니아 행성으로 떠난다. 그의 죽음은 인과응보의 결말이다. 외계인들이 등장하고, 프랭크에게 종속되고, 싸우다가 무찌른 후 그들의 세계로 떠나는 서사는 사람과 외계의 대립으로도, 오프닝 넘버처럼 영화의 고전적인 SF영화에 대한 찬미로도 이해된다. 하지만 프랭크의 영향을 받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잠시라도 자신을 잊고, 자신의 쾌락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느꼈을 것이다.
배드 엔딩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욕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굴곡 없는 미래를 위해 무감각하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갑갑한 삶을 살다가 현실을 잊고 환상의 세계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래서 〈록키호러쇼〉를 좋아했다. 프랭크의 행위가 불쾌할 때도 있었지만, 주인공들의 도전적인 모습에 용기를 얻기도 했다. 프랭크의 성도 환상적이었지만, 작품 자체의 화려함이 좋았다.
〈록키 호러 픽쳐 쇼〉를 보고 나서는 〈록키호러쇼〉를 보았던 때만큼 여운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카메라가 보여주는 세상에는 무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무대처럼 관객이 직접 참여하거나 전반적인 광경을 보기는 어렵지만, 클로즈업과 같은 영화적 기술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이 잘 전달되어서 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공연에서는 내레이터와 말로 소통했지만, 영화에서는 장면 전환으로 전달되는 점이 새롭기도 했다. 뮤지컬에서는 리프래프와 마젠타가 트랜실베니아 성으로 떠나면 공연장을 나와 현실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기에 무력감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변치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에,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 언제라도 찾아가고 싶다.
220811_정민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