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 힘껏 욕망하고 사랑한 뒤에 🍅

🍅 힘껏 욕망하고 사랑한 뒤에 🍅

페드로 알모도바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올해의 마지막 여담의 주제가 적赤으로 결정되고 나서, 영화를 고르는 3주 내내 머릿속에 갖가지 빨간 이미지들이 둥둥 떠다녔던 것 같다. 뜨거운 불씨, 붉은 커튼, 새빨간 핏방울,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오죽하면 〈닥터 후〉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를 가져와 전화박스 타고 지구 구하는 외계인 이야기를 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라스트 제다이〉, 〈화양연화〉, 〈블랙 위도우〉 등 수많은 붉은 영화들을 지나 결국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꺼내들게 되었다. 적赤을 주제로 다루며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강렬하고 빨간 색채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아쉬움과, 그 말도 안 되는 요란법석을 다시 한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섞인 결정이었을 것이다.

 

사랑, 상실, 생명, 모성, 복수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뤄 온 부지런한 감독 알모도바르의 중심엔 언제나 터무니없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가득하다. 이는 독특하지만 한편으로는 강박적으로도 느껴지는 화면 구성을 통해 전개되는데, 그는 관객의 미묘한 심리를 자극하는 방식이 아닌 생생한 원색의 빛, 특히 과감한 적색의 사용으로 눈길을 붙잡는다. 그리고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황당한 사건의 무질서한 배열을 통해 알모도바르가 지금껏 다뤄 왔거나, 앞으로 다룰 주제들을 잔뜩 썰어 넣는다.

페파의 사랑은 중단되었다. 자동 응답기에 녹음된 전 애인의 이별 통보로 페파와 이반의 사랑은 끝이 났다. 사실 모든 사랑은 끊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도,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이끌리는 상태도 지금 끓고 있는 감정에서 비롯된 아주 동적인 마음이니 종국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끝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페파의 사랑은 그가 직접 끝맺은 것이 아니라, 이반에 의해 제멋대로 중단되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이 사랑을 이렇게 끝낼 마음은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당황한 페파는 완성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고, 그 욕망은 다양한 이미지로 쪼개져서 나타난다. 집착, 충동, 분노 등 아주 단순하고 극적인 감정을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한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어긋난 사랑, 홀로 남은 자의 비극, 차가운 복수, 눈물겨운 재회 등의 사랑 이야기를 전부 지나쳐 ‘말도 안 되게 소란스러운 성장담’에 도달한다.

직접 만나 말로 전해야 할 중요한 소식이 있건만, 자꾸 대화를 피하는 이반의 비겁함 때문에 페파는 점점 이반의 행적에 집착하게 된다. 그가 직장에 남긴 전화번호를 보고 전 부인 루시아에게 전화하거나, 루시아의 집에 찾아가 해줄 말이 있다는 쪽지를 남기거나, 택시를 타고 루시아를 쫓아가는 등 이반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 페파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시선을 보내는 곳은 바로 자동 응답기인데, 깜빡이는 빨간 불에 부리나케 달려가 재생 버튼을 누르는 모습에서 사랑의 대상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온 신경을 이반에게만 쏟다 보니 친구 칸델라가 남긴 녹음은 신경에 거슬릴 뿐이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페파와 이반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페파가 이반에게 대꾸하는 방법은 이반이 녹음하고 간 영화 더빙에 상대 역 대사를 얹어 보거나, 자동 응답기에 녹음된 목소리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영화는 전화기와 자동 응답기를 두 인물이 지속적으로 어긋나고 빗나가게 만드는 장치로 사용하는데, 이를 통해 순간적인 오해와 분노, 절망, 슬픔 등이 점층적으로 쌓인다. 페파는 빨간 전화기를 꼭 붙들고 있지만 수화기 너머 이반과 대화할 수는 없다. 이반을 향한 페파의 집착을 대변하는 이 전화기는 몇 번이고 깨지며 고장 난다.

 

페파의 욕망은 이반과의 시차를 좁히고, 그와 함께하고 싶은 바람인 것일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사랑에 정신을 잃고 그건 페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이반과 연락할 수 없어 좌절한 페파는 날카로운 충동과 돌발적인 분노에 휩싸인다. 토마토를 썰어 만든 가스파초에 많은 양의 수면제를 넣어버리고, 이반의 옷을 정리하다가 무심코 피운 담배로 침대에 불을 붙여버린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하자 전화기를 유리창에 던져버리거나, 이반의 캐리어를 내팽개치고 오는 길엔 화를 참다못해 재생되던 LP를 창밖으로 날려 버린다.

 

충동과 분노가 섞인 행동을 마주할수록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이반을 원하는 것으로는 미결된 사랑과 결핍된 마음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불붙은 침대를 바라보다가 캐리어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 페파는 이제 없다. 페파는 더 이상 이반을 기다리거나 갈구하지 않는다.

 

페파의 욕망은 토마토를 썰어내듯 제 손으로 이반을 끊어내고 싶은 의지인 것일까?

이반과의 일로 복잡한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칸델라는 자신이 테러리스트에게 이용당한 것 같다며 페파의 집에 방문하고, 카를로스와 마리스는 부동산의 소개를 받아 페파의 집을 보러 온다. 페파를 만나러 온 루시아의 뒤에는 테러리스트를 조사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경찰들이 서 있다. 이렇게 엉망으로 치닫는 상황을 엮어 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우연들이다. 하필이면 페파가 들어가 있던 공중전화 부스에 가방이 떨어지고, 하필이면 내가 전화할 때 당신은 전화기 근처에 없으며, 하필이면 창밖으로 던진 LP가 모랄레스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우연에 의지한 예상할 수 없는 전개는 ‘개연성 없음’이라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위태롭고 유쾌한 특징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런 우연들이 모여 계속해서 속삭이는 말은 바로 이 이야기가 영화라는 이름의 허상이라는 것이다.

 

삐걱거리며 연결되는 줄거리와 어색한 마드리드 풍경, 세트장임이 분명한 페파의 테라스, 모형 아파트로 시작되는 첫 장면 등 끊임없이 상기되는 영화의 작위성은 우리를 계속해서 이야기 밖으로 끄집어내며 그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어떻게든 작동되는 영화라는 장치를 의식하게 한다. 여러 인물들이 페파의 집에 모여 각자 하고 싶은 말들만 하는 장면은 자연스럽기보단 아주 연극적이다. 집안의 모든 사람이 수면제 가스파초를 먹고 쓰러져 있는 모습 역시 기괴한 풍경이지만 이 영화의 이상하고 인위적인 특징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게 된다.

 

영화는 가득 찬 거짓과 허상을 알아채도록 설계되어 있다. 명백히 인위적인 특징을 숨길 생각이 없는 영화의 의지는 관객뿐만 아니라 페파에게도 그가 찾는 사랑의 실체를 일깨운다. 흑백 화면 속 마이크를 들고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이반의 모습은 페파의 꿈속 환영이었으며, 페파가 헤드폰으로 듣던 이반의 사랑한다는 목소리나 자동 응답기에 대고 나눈 대화도 거짓이었다. 이반에 종속되어 그에게만 집착했던 대상으로서의 사랑은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프레임 밖에서 날아 들어와 공중전화 부스에 쿵 떨어진 가방은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사랑에 쓰러진 페파의 잠을 깨우는 자명종인 것이다.

이반과의 진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마지막 공항에서뿐이다. 어쩌면 페파가 욕망했던 건 이반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대화였을지도 모른다. 그 대화를 통해서 페파는 자신만의 이별을 실천하며 마침내 사랑을 완성한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구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당신과 말하고 싶을 뿐이었어. 이틀이나 기다렸지.

당신을 기다리며 메시지를 남겼어.

오늘 밤 얘기하면 되지.

스톡홀름은 나중에 가면 되고.

아니, 너무 늦었어.

원한 품지 마. 비행기 편을 바꿀게.

한잔할 수도 있잖아.

어제, 오늘 아침, 심지어 정오까지 시간이 있었지.

하지만 너무 늦었어.

그럼 여기 왜 온 건데?

루시아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래서 그 일을 못 하게 막으러 온 거야.

하지만 이제 안전하니 이만 갈게.

사랑은 우습게도 이별로써 완성된다. 공항에서의 소동 이후, 페파는 기꺼이 사랑의 주체가 되어 어느 때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다. 이반을 죽게 두었다면 복수극이나 비극이, 이반과의 재회를 약속했다면 낭만적인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마리사와 나란히 앉아 마드리드 전망 보기를 택했다. 페파는 이반과 헤어진 뒤 이사를 가려고 했으나 이젠 이곳의 전망이 마음에 드므로 세를 놓지 않을 것이다. 마리사는 약혼자 카를로스가 칸델라를 끌어안고 있는 걸 발견했지만 귀여운 정비공을 만나면 될 테다. 사랑은 언젠가 끊어질 수밖에 없지만, 허상에서 해방된 페파는 오늘 밤 수면제 없이 잠들 수 있을 것이다.

221208_세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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