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작은 마을의 소년을 만난다. 막대한 운명을 짊어진 고독한 아이들이 태생과 운명을 깨닫고 실현해 나갈수록 흐느끼던 울음은 또박또박한 외침으로 변한다. “라퓨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 시야가 가려진다. 이제 시타와 파즈는 대지의 지평선을 넘어서 끝없는 하늘의 변화를 지켜본다.
🛩️ 어느 공상가가 당신은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
미야자키 하야오, 〈천공의 성 라퓨타〉
최근 몇 번 해외로 나가면서 비행기와 친해질 시간을 가졌다. 하늘에서 본 한국은 예뻤다. 입시에 지쳐 ‘죽어야지’를 달고 살던 고등학생 때와 별로 달라진 것 없이 권태로운 일상을 저주하다가도, 상공의 비행기에서 내가 살던 곳을 내려다볼 때는 행복했다. 작고 흐릿해진 색색 풍경에 이륙의 긴장감도 금세 잊고 창문 밖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날 괴롭게 한 것들은 보이지 않고, 구획된 도로들과 네모난 건물들, 그보다 몇 배는 큰 산과 구름만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사진을 마구 찍었다. 왜 멀리서 보면 막연하게 애틋할까. 그때의 기묘했던 정서가 다시금 느껴졌다. 지구 밖으로 나가 아예 우주로 가버린 라퓨타를 보며. 아니, 라퓨타가 바라보던 지구를 보며.
새들의 아침을 깨우는 나팔 소리와 절벽 사이를 활공하는 날갯짓이 하늘 위에서 펼쳐질 모험의 시작을 알린다. 700년 전에 땅으로 내려온 라퓨타 일족의 후손인 시타. 죽은 아버지가 말한 ‘하늘에 떠다니는 섬’의 존재를 굳게 믿는 파즈. 서로를 만나게 된 아이들은 라퓨타를 향한 필연적인 여정을 시작한다. 시타가 목에 건 ‘비행석 결정체’만이 유일하게 라퓨타의 위치를 가리키는 가운데, 목걸이를 노리는 도라 해적단과 노무스카 군대에게 시타가 연이어 납치된다. 아이들은 때때로 화염이 도사리는 위험 속으로 빠지지만, 희망과 절망을 딛고 성장한다. 결국 도착한 그곳은 죽음만큼 생명도 넘치는 녹음으로 충만하다.
생태주의에 기반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SF에서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생존을 걸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의 초기 작품은 특히 대립 구도가 부각되는데, 그중 주인공은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얽힌 격돌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한다. 주인공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생태계를 훼손하고, 자연은 그에 맞서 응징하고 심판하는 신격화된 존재로 등장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속 거대 곤충인 ‘오무’는 과거에 대지의 분노를 일으켜 인간 문명을 절멸시켰으며, 그로 인해 쇠락한 인간들은 곤충들의 영역을 두려워하거나 정복하려 든다. 바로 다음 작품인 〈천공의 성 라퓨타〉(1986)에 이르러서 욕망과 경외의 대상은 라퓨타로 변모한다. 라퓨타는 수많은 금은보화와 현대 문명을 뛰어넘은 과학 기술, 그에 따른 권력과 지배를 선물하는 환상적인 이상향으로 비춰진다.
응징과 심판을 상징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괴력을 가진 로봇 병정’을 통해서. 로봇 병정은 오로지 왕족인 루시타 공주를 지키기 위해 주변을 불길로 초토화시킨다. 로봇을 조사하려다 실패한 노무스카가 한 말에 따르면, 그것의 “몸체가 금속인지 흙인지조차 인간의 과학으론 알 수 없” 다.
라퓨타 내부에 즐비한 로봇 군대는 본래 로봇이 아니다. 자연의 일부분이다. 라퓨타 상층에서 숲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정원을 지키는 로봇’은 자연으로 회귀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자연을 개발시켜 산업과 전쟁의 도구로 만드는 이들은 영화 속 천상인과 역사 속 인류, 지금의 인류다. 본래의 모습을 잃은 로봇은 결국 자연도 완전한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시타는 자신을 지키다 생명을 다한 로봇을 가여워하는데,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을 향한 근본적인 태도, 예컨대 연민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연민은 라퓨타가 멸망해야만 했던 이유로 이어진다. 시타와 파즈가 함께 멸망의 주문을 외울 때 정말로 멸망하는 것은 물질문명의 보고이자 탐욕을 부르는 라퓨타 중추와 하반신이다. 그곳이 산산이 붕괴되어 바다에 잠기자, 지탱해주던 거대한 나무뿌리가 드러난다. 하야오의 자연은 응징과 심판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의 원인인 인간을 용서하고 희생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영화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오염된 숲을 계속 정화하던 곤충이 그 존재들이었다. 전작에서 대지이자 곤충의 모습을 했던 자연이 이번에는 천공의 섬으로 형상화되어 해방을 맞는다.
하야오의 SF에서 자연과 인간은 불화하지 않는다. 그는 공존을 지속하기 위해선 쟁취하기보다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파즈는 구름 속에서 아버지와 재회하며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트라우마를 떨쳐낸다. 시타는 땋은 긴 양갈래를 바람을 따라 아무렇게나 휘날리도록 짧게 풀어헤친다. 인간 문명의 잔재를 완전히 버리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라퓨타는 거대한 나무뿌리의 모습으로 멈추지 않고 상승한다. 그리고 라퓨타는 우주의 별이 되어 지구를 내려다본다. 우주가 해방을 의미한다면, 지상세계는 그 대척점에 위치해야 한다. 하지만, 하야오는 그 세계의 당신에게 “넌 살아야 해.“(모노노케 히메, 2003)라고 외치고 ‘어떻게 살 것인가‘(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묻는다.
“라퓨타가 망한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곤도와에 이런 노래가 있죠.
‘땅에 뿌리내려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씨앗과 함께 겨울을 넘고 새들과 봄을 노래하자.’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고 불쌍한 로봇을 무수히 지배해도 땅을 버리고 살 수 없어요.”
하야오는 라퓨타를 지상으로 추락시키지 않고 절대 손에 닿을 수 없게 지구 밖으로 띄우는 것을 선택했다. 대신에 시타와 파즈는 한편의 꿈 같았던 모험을 마무리하고 땅으로 돌아간다. 그 모험 안에서 물리친 건 고작 한 명이었다. 지상에는 노무스카보다 더한 악인과 모험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고난도 존재한다. 그래도 소년과 소녀는 돌아간다. 땅으로, 인간이 맞닥뜨려야 할 고통으로 떨어지길 선택한다. 700년 전, 라퓨타인이 지상에 내려왔던 것처럼 인간은 ‘땅을 버리고 살 수 없’다. 반대로, 땅으로 간다면 그 고통 속에서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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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나가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타국은 이방인인 여행자를 반길 뿐 알려고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자유로웠다. 마지막 일정이 끝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는 지난 행복에 비례하는 아쉬움이 찾아왔다. 그래서 생각보다 안락하지도 않고 편히 누울 수도 없는 나의 작고 고역스런 좌석에 계속 머물고 싶었다. 다시 꾸역꾸역 살아갈 미적지근한 하루보다는 달가웠으니까.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 발은 한국 땅을 밟고야 만다. 출국행 티켓을 끊으면 곧바로 입국행 티켓 페이지로 넘어가던 그때부터, 이번엔 어느 국가로 가는 게 최선일지 따져보던 그때부터, 출발하기 전부터 나는, 내가 돌아올 것을(곳을) 알고 있다. 진짜 나는 엄연히 여기에 있다. 비행기는 영원히 날아주지 않는다. 땅이라는 알맞은 장소에 도착하고야 만다.
240711_수연 보냄.
너무 좋아요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인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