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 東柱 📝

🎓 東柱 📝

이준익, 동주

나는 시를 자주 읽는 편이 아니다. 정확히는 글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한 글자도 안 빼놓고 읽었던 시집이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었다. 나는 역사를 전공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영향이 적지 않다. 10대 후반의 나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시에 매료되어 있던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번쯤은 여담에서 역사 영화를 다루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영화 속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더 조심스러워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역사와 영화의 만남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 길지 않은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도 초등학생 때 보았던 역사 영화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주제로 ‘적막’이 결정되었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올랐던 영화가 〈동주〉였던 것 같다. 역사 영화라는 점과 더불어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윤동주 시인은 적막에 괴로워하던 모습이었고, 그런 그를 담아낸 영화가 〈동주〉이니 말이다.

〈동주〉는 윤동주 시인의 전기적인 영화이다. 비록 그의 짧고도 긴 27년의 세월을 모두 담아낸 것은 아니지만, ‘윤동주’의 삶에 집중하여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30-40년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왔던 한 청년 윤동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사전에서 말하는 적막은 ‘고요하고 쓸쓸함’, 또는 ‘의지할 데 없이 외로움’이다. 동주는 처음부터 적막에 잠긴 인물은 아니었다. 명동학교 시절 그는 친구이자 친척인 몽규, 그리고 가족과 함께 웃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동주는 점점 웃음을 잃어간다. 이러한 동주의 적막은 동주의 의지인 것과 아닌 것이 얽혀 비롯되었다. 연희전문학교로의 진학이나 일본으로의 유학은 모두 동주의 선택이고 의지였지만,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침묵이 따라왔다. 동주가 선택했지만 선택하지 않은 길이라는 모순은 그를 쓸쓸하고 외롭게 했고, 동주는 그 적막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동주의 적막과 괴로움은 몽규의 존재로 더 증폭되었을 것이다. 영화 속 몽규는 동주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동주가 망설이는 것들을 항상 한발 앞서서 행하는 인물이다. 동주와 몽규는 시와 혁명이라는 갈림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돌아보면 같은 길을 향해 있었다. 비슷한 삶을 살았던 그들이었기에 동주는 몽규를 보며 그처럼 하지 못함에 대한 더 많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동주〉에서 나타나는 고요함은 부끄럽지 않은 삶임에도 부끄러움을 느낌에서 비롯한 적막과 괴로움인 것이다.

영화는 취조를 받는 동주에게 던져진 물음의 답을 찾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분위기는 격동적인 시대이지만 전체적으로 잔잔하게 흘러가며, 후반부 동주와 몽규가 일본 형사를 향해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 외에는 비슷한 톤으로 진행된다. 폭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역시 많지 않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취조를 받는 동주의 안색은 나빠지지만, 취조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폭력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원인 모를 주사’로 추측할 뿐이다.

동주가 원인 모를 주사를 맞고 옥사에서 피를 토할 때, 내레이션으로는 그의 대표적인 시 중 하나인 「서시」가 낭독된다. 화면 속 동주는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데에 비해 동주의 비명은 「서시」에 묻혀 상대적으로 조용히 표현된다. 동주가 옥사 밖으로 끌려간 장면 뒤에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구절과 함께 창살 밖 별들은 평화롭고 고요하게 반짝인다. 괴로운 동주의 상황과 모순적인 고요함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처럼 영화에서 시는 적막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전체적으로 청각적인 공백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동주의 속마음을 대체하는 듯한 시의 낭독이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이는 마치 고요한 영화를 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차분한 목소리는 동주뿐 아니라 보는 이들 또한 쓸쓸해지게 만든다.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공허함을 표현한다. 이 영화는 흑백 영화이다. 컬러 영화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보는 이들에게 많은 정보를 남긴다. 그에 비해 검은색과 흰색만으로 정돈된 흑백 영화는 ‘색’이라는 부가적인 정보를 제거함으로써 더 고요한 느낌을 준다.

한편 영화에는 인물이 없는 쇼트들도 있다. 비가 내리는 처마나, 허공에 흩날리는 먼지들이 클로즈업되면서 분명히 사람이 있는 공간임에도 아무것도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극도로 움직임이 제한된 쇼트들도 자주 보인다. 동주와 몽규가 일본으로 떠나는 장면에서 두 인물은 마치 멈춰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적다. 몽규의 뒤로 떠가는 배나 흩날리는 옷자락 등으로 이 장면이 정지 화면이 아님을 파악할 뿐이다. 동주가 감옥에서 주사를 맞으러 끌려가는 장면 역시 극적이고 혼란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고정된 프레임 한구석에서 움직이는 동주가 등장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쇼트들은 움직임이 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느낌을 준다. 흑백에서 비롯한 고요함에 이러한 카메라 연출이 만들어내는 고요함이 더해지면서 적막한 느낌은 배가된다.

〈동주〉는 다른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폭력적이지도 잔인하지도 않으며 매우 담백하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가 시대를 그리는 영화가 아닌 시대를 살아가던 한 개인을 그리는 영화이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담백함이 오히려 개인에 대한 공감과 먹먹함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를 떠나 윤동주라는 사람과 그의 시가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에는,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에 대한 공감도 한몫할 것이다. 나는 가끔 90년 전에 살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상해 본다. 오만했던 어린 시절에는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처럼 앞장서리라 생각했다면, 해가 지날수록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 나는 너무나 평범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상상으로만 해보는 고민은 당대를 살았던 윤동주의 시에 깊이 묻어있다. 그는 보통의 시선에서 시대를 바라보고, 자신을 성찰하며 나름의 의지를 보인다. 그리고 이를 아름다운 시어로 풀어낸다. 이게 내가 윤동주라는 인물과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평범함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보통의 사람들이 평범함을 지켜내려는 과정들은 연민을 느끼게끔 한다. 용기와 다짐을 필요로 하는 너무나 대단한 과정임에도 더 위대하지 못함에 동주가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은 시대를 넘어선 위로를 건네고 싶게 만든다.

220127_유안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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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2년 01월 28일 / 3:38 오후

너무 잘 읽었어요. 어릴 때 아빠가 쓰시던 물컵에 윤동주의 서시가 적혀있었는데 그 때는 뭐가 그렇게 부끄럽다는 걸까, 부끄럽고 못 견디겠으면 그냥 부끄럽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정도의 감상이었어요. 저도 유안 님처럼 커갈수록 윤동주 시인의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남들보다 한발짝 앞선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요. 진심이 느껴지는 글에 짧게나마 답장을 보내요. 너무 고뇌하지 않도록 모두에게 평안한 시간만이 가득하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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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유안
2022년 02월 05일 / 3:39 오후

정성스러운 답장 감사해요.

불과 1년 전의 저라면 망설임 없이 했을 법한 행동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더 망설여지고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점점 시간이 더 지날수록 과연 제가 윤동주 시인처럼 자신만의 저항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런 부분에서 그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고요. 아는 게 많아질수록, 성장할수록 오히려 겁쟁이가 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가끔은 저 자신에게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해본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생각해요.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적어도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요. 구독자님의 말씀처럼 모두에게 평안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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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 東柱 📝”의 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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