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담 제23호 〈러브레터〉에서는
한 사람이 짧은 추천과 함께 사랑영화를 보내면,
이를 받은 다른 사람이 답신으로 비평을 작성합니다.
수연🦄 이 한님🍀에게 보내는 사랑영화 💌
“다들 미친 것 같아요. 근데 오히려 좋아.” 이 두 문장이 영화에 대한 나의 3년 전 한 줄 평이었어.
미친 게 좋다니, 정말 미친 것 같지. 근데 언니도 알 거야. 미친 영화가 가장 재밌고, 미친 인간이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미친 사랑에 쉽게 감동받아 버린다는 사실 말이야.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봤어. 아마도 그가 가진 날 것의 취약함이 진정한 관계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겁쟁이인 우리는 그 매력에 깜짝 놀라서 “미쳤어.”라고 감탄을 내뱉는 걸지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두 주인공도 똑같아. 그럴싸한 말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법을 상실한 티파니와 팻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친 자신을 스스럼없이 노출해. 너는 미쳤어, 실은 나도 미쳤어, 아니 너만 미쳤어! 진심 아닌 비난들과 느닷없는 자기 고백들을 발사하면서.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었나 봐. 솔직했고, 둘 다 미쳐있었고, 아주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
언젠가 내게 “사랑해야 하나?”라고 물었던 언니에게 이 영화를 보내. 그 질문의 답은 오롯이 언니 거겠지만, 이 말을 해야겠어. 언니의 미친 점은 사랑에 빠지기에 완벽하다고 말이야. 러브레터라면 역시 사랑 고백으로 끝내야겠지? 지구 반대편에서 한님을 사랑해! 안녕!!
💐(^.^ )> 수연 보냄.
⛅ 다들 미친 것 같아요. 근데 오히려 좋아 ⛅

답신: "사랑해야 하나?"
이 발언에 대한 해명을 좀 해보겠다. 얼핏 보면 사랑을 불신하는 냉소론자의 말, 사랑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애송이의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어쩌면 사랑을 섹슈얼한 끌림 정도로만 좁게 해석하는 편협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도 입밖으로 꺼내 본 적은 없지만 사실 난 풍족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고 믿는다.) 부모나 형제 간의 상호작용도 사랑이고, 우리집 고양이들과의 유대도 사랑이며, 매일 같이 팔로우업하는 덕질 또한 사랑이니까! 형태와 성질만 다르지 다 같은 사랑 아닌가?
흠… 쓰다 보니 변명 같기도 하다. 사실 저 문장 속 ‘사랑’은 좁은 의미의 성애적 사랑을 칭한 게 맞다. 애인이나 반려자 사이에서 벌어질 법한 그런 애정 말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가슴이 팔팔 뛰고, 얼굴이 홍당무마냥 화끈 달아오르며, 온종일 그 사람 생각에 허우적대다 잠 못 이루는 그런 화학작용.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고, 막 접촉하고 싶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충동까지 드는 그런 욕망.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해봐야지 인생을 더 알 수 있어! 나는 그런 사랑을 향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그런 ‘사랑’ 굳이 해야 하나요? 일종의 반발심리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더더욱 그 사랑을 부정하고 싶었나 보다.
미안하지만 내 변호를 좀 더 해보겠다. 뻔하고 고리타분한 사랑이라면 더더욱 물음표가 찍히는 게다. 사람들이 말하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은 사실 정말 희소하지 않나. 자고로 진정한 사랑이란 한 인간의 치졸하고 부끄러운 면모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그게 사랑의 완벽한 이해와 공감의 경지라 나는 믿는다. 그 발화점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신뢰가 쌓여야 가능한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제 잘나고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시간과 감정을 내어주기는 더더욱 힘들어진 사회에서, 이런 칙칙하고 뾰족한 사랑이야말로 더 어렵다.
내가 믿는 ‘사랑’은 고생깨나 해야 한다. 없으면 인생이 공허하다 못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 정도로. 그래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속 이 날 것의 취약함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골 아픈 세상에서 삶이 더욱 고달파진 이들이 펼치는 사랑이라니. 미친 사람들의 사랑이야말로 더욱 값지고 빛나는 법 아니겠는가.
사랑은 고통, 고통은 분노
주인공들은 그놈의 사랑 때문에 극도로 고통스러워한다. 남자는 아내의 외도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무려 제 결혼식 노래 〈My Cherie Amour〉를 틀어놓은 채 아내는 욕실에서 같은 학교 정교사와 정사를 하고 있었다. 이 최악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 남자는 몇 가지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평소에는 흥분과 우울 사이를 매번 오르락내리락하기 일쑤, 이따금 그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남자는 극도로 불안해지거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다. 정신의학적으로는 ‘간헐적 폭발성 장애’와 ‘양극성 장애’라고 일컫는 병들 때문에 병원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영화는 그 병을 ‘사랑’으로 이겨내려는 그 남자 팻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신과 약은 몰래 뱉지만, 부정이라는 독약만큼은 누구보다 경계하는 긍정왕. 늘 검은색 쓰레기봉투를 몸에 두른 채 조깅하며 자기관리 하는 운동광. 사랑하는 여자가 가르치는 소설책이라면 낮이야 밤이야 열심히 읽어보는 노력파. 이제는 엑스-와이프가 되어버린 니키와 재회할 수만 있다면야, 사랑에 단단히 미친 팻은 뭐든지 할 수 있어 보인다. 물론 그는 8개월 만에 정신병원에서 나왔고, 니키를 향한 접근금지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 새드엔딩으로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읽고 있던 헤밍웨이 책을 창밖으로 던지고, 자고 있던 부모님을 깨워야 할 정도로 팻의 분노는 여전히 억세다.

“더욱더 높이. 그거 아세요?
다들 날 의심하지만 인생의 먹구름을 다 걷어내고 햇살이 비치게 할 거예요.
진짜예요. 열심히 해서 해낼 거예요.”
여기 또 다른 고통도 있다. 권태기를 겪던 남편이 제 속옷을 사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주검으로 마주한 여자. 그 시점을 계기로 여자는 유달리 성관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다니던 회사 사람 전부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을 정도로. 남편의 죽음에 가장 큰 원인이 자기라고 생각했을까. 그 관계를 통해 일부러 나쁜년이 되어 죄를 씻어내고자 한 걸까. 짧지만 강렬한 그 인스턴트식 관계 덕분에 그 아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그런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며, 그런 구린 과거마저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늘어놓는 사람. 그게 바로 티파니의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이미 헤픈 데다가 사회성도 없는 여성으로 소문나 있다. 그를 못 잊은 남성이 못내 티파니의 집에 찾아오기까지 하고, 관심을 표한 팻마저 너와 나는 다르다며 선을 긋기까지 하니. 이 여자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상처를 입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은 채, 테이블을 뒤엎고 가운뎃손가락을 날려 보낸다.

“내 안엔 추한 부분들도 있지만 난 그걸 좋아해요. 다른 부분들만큼이나!”
쫓고 쫓기는 회피 레이스
팻은 티파니의 존재가 두렵다. 자기가 쏟아내는 무례한 언행에도 매번 맞받아치는 건 물론, 첫만남부터 제 속사정을 늘어놓다 같이 집까지 들어가자고 하니 무지 당황스럽다. 제 미묘한 떨림을 금방이라도 알아챈 건가 싶다. 나는 여전히 니키를 사랑하고, 빨리 니키에게 내가 얼마나 괜찮아졌는지 보여줘야 하는데. 제 안정을 무너뜨리는 이 불온한 상황 때문에 팻은 극도의 불안을 표출한다. 니키와의 결혼식 비디오테이프를 찾겠다며 야밤에 부모님과 실랑이하지 않나, 자신을 쫓아오는 티파니로부터 안간힘을 써서 도망가지 않나. 불도저 같은 티파니의 구애에 팻은 회피하기에 바쁘다.
티파니는 그런 팻의 존재가 반갑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다. 좀 많이 미쳤고, 약도 좀 먹지만,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팻도 자신에게 끌리고 있는 듯하고, 나도 그런 팻이 마음에 든다. 똑똑하고 세심한 제 진가까지 세상 사람들께 얘기해줄 정도로 다정하니, 이 남자 놓치고 싶지 않다. 춤 연습을 빌미로 니키에게 편지를 전해주겠다며 거짓말도 하고, 니키를 가장에 답신까지 대범하게 적어본 것도 모두 그를 제 곁에 잡아두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다. (그렇다고 댄스 대회 날 진짜 니키가 올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팻의 재회를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던 티파니는 춤 경연이 끝나고 부리나케 연회장 밖으로 도망친다.
사랑을 점점 확신하며 직면하는 남자와 사랑이 점점 커져 도망치는 여자. 어쨌든 이 쫓고 쫓기는 레이스 회피 레이스를 통해 두 사람은 한껏 땀을 흘리고 열기를 뿜으며 고통에서 해방되어 간다.


5점짜리 춤과 사랑!
또 다른 고통 특효약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춤(겸 유산소)이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다며, 티파니는 팻과 딜을 한다. 당신의 편지를 니키에게 전해줄 테니 자기와 함께 댄스 경연 대회에 나가자는 제안이다. 팻에게 있어 티파니는 제 편지를 전달할 유일한 우체부였으니, 그는 니키와의 재회를 위해서라면 참고 이겨내야 했다. 물론 춤이 점점 재밌어지고, 티파니를 향한 설렘은 더욱 커지고, 가끔 튀어나오던 결혼식 음악이 거의 들리지 않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티파니의 돌발 발언 때문에 팻은 아버지의 내기에 단단히 얽혀버린다. 풋볼과 춤 경연 모두 이겨야 승리하는 ‘이중내기’에 참여하게 된 것. 아버지가 응원하는 연고지 ‘이글스’가 뉴욕의 ‘카우보이스’를 12점 차로 이겨야 하며, 동시에 같은 날 열리는 댄스 경연 대회에서 자신과 티파니가 ‘최소 5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만 한다. 형편없는 팻의 춤 실력을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인 건 분명했다.
허나 승리의 요정이 정말로 팻에게 깃들었는지, 혹은 티파니와의 미친 케미 덕분인 건지 두 사람은 경연 대회에서 10점 만점에 ‘5점’이라는 점수를 받게 된다. 화려한 의상도 고급 기술도 없지만, 서사만큼은 미치도록 탄탄한 춤사위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으르렁거리는 첫만남을 표현한 오프닝부터, 조깅을 형상화한 듯한 안무를 거쳐, 니키 답신을 볼 생각에 매번 실수하던 리프트 동작을 성공시키기까지. 매일 서로의 뒤통수만 쫓던 이들이 이제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다.
5점짜리 결과에 저리 기뻐할 일이냐며 술렁거리던 심사위원과 관객들. 그와 달리 누구보다 기뻐하는 팻과 티파니, 그리고 가족들. 10점 만점도 1등도 이들에게는 중요치 않다. 점수도 인생도 사랑도 무려 5점이라 더 값진 법 아니겠는가. 그들을 응원하듯 풋볼 역시 44:5라는 기상천외한 점수로 승리하게 된다.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Maybe someday, you’ll see my face among the crowd
Maybe someday, I’ll share your little distant cloud
언젠가는 당신이 군중 속에서
내 얼굴을 볼지도 몰라요.
언젠가는 내가 당신의 작은 먼 구름을
함께 나눌지도 몰라요.
Dear Tiff,
실버라이닝(Silver Linings)은 구름의 흰 가장자리로 새어 나오는 은색 빛으로, ‘불행 속 한 줄기 희망’을 말한다. 플레이북(Playbook)은 미식축구에서 팀의 작전을 기록한 책이나 전술을 뜻한다. 영화는 그 불행의 굴레를 끊어내고, 사랑을 통해 희망을 찾는 두 사람의 전략을 기록한다. 세상이 아무리 미친 사람들이라고 소리 질러도, 더 긍정적이고 멋들어진 내가 아니더라도, 상처와 거짓을 주고받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잘 살아갈 수 있다며. 우리는 더 크고 강력한 먹구름을 몰고 있으니, 더 소중한 빛을 찾아갈 수 있는 거라고.
고통, 분노, 충동, 조울, 상실. 두 사람은 그런 구름을 함께 나누고, 자신을 헐뜯는 군중 속에서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 팻 때문에 화가 잔뜩 났다가도 공황에 빠진 그를 구해주려는 티파니. 이제야 부러진 날개를 붙이고 있는 좋은 여자라며, 티파니를 찾아온 남자를 대신 쫓아내던 팻. 팻의 건강한 삶을 응원하고자 말도 안 되는 내기를 제안하는 티파니. 그리고 영화 끝자락, 니키와의 재회를 볼 수 없어 부리나케 경연장을 벗어나던 티파니의 손을 잡고 고백하던 팻처럼.
“티파니에게. 그 편지 당신이 쓴 거 알아요. 미친 날 위해서…”
“미친 짓을 한 거죠. 고마워요. 사랑해요.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사랑했는데, 너무 늦게 고백해서 미안해요. 그동안 제자리에 멈춰 있었어요. 팻이.”
그제야 깨닫는다. 팻의 트라우마였던 결혼식 노래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 노래는 이미 티파니와의 새로운 사랑과 희망의 과정을 기록한 문장으로 탈바꿈되었다는 것을.


Dear 수연,
팻과 티파니의 미친 사랑, 미친 인간, 미친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사랑을 규정짓는 건 결과가 아닌 과정인가 봐.
서로의 모난 점까지 인정하는, 그래서 고생깨나 해야 하는 완벽한 이해와 사랑은, 영화의 엔딩점이 아닌 영화 곳곳에 쌓인 장면들에 있다는걸. 조금 이상하고 별 난 순간에도, 때론 뻔하고 고리타분한 날에도, 서로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달릴 때도, 두 손을 맞잡고 춤연습을 이어갈 때도, 언제나 둘의 사랑은 빛나고 있다는걸.
여전히 그런 ‘사랑’을 해야 하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보니 ‘사랑’의 힘을, 긍정의 힘을, 그 과정의 힘을 조금은 믿게 돼. 미친 사람들의 사랑이라면 더더욱.
팻의 일요일과 티파니의 춤을 담아,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