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 칸, 🚃 환승 연애 🚃

여담 제23호 〈러브레터〉에서는
한 사람이 짧은 추천과 함께 사랑영화를 보내면,
이를 받은 다른 사람이 답신으로 비평을 작성합니다.

유안🍭이 예은👾에게 보내는 사랑영화 💌

〈6번 칸〉

예은 언니에게.

언니는 그럴 때가 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왜인지 모르게 지치고 도망가 버리고 싶을 때 말이야.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선택한 사람인데도, 참 이기적이지.

그런 한편으로 때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길에서, 불편했던 사람에게서 새로운 의미와 사랑을 발견하기도 해. 인간이란, 또 인간의 사랑이란 참 종잡을 수 없는 건가 봐.

그래서 그 모순이 뭘까 궁금해져. 무엇이 우리를 권태롭게 만들고 또 무엇이 우리를 사랑하게 할까.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이 역시 내가 인간이기 때문일까?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인간이라.

그래서 언니가 포착해 내는 사랑이 더 궁금해. 이 혼란스럽고 복잡스러운 조그만 기차 칸 안에서, 차분하고도 또 단단한 언니가 발견할 그 사랑이. 그래서 염치없이도 나의 고민을 언니에게 보내. 언니와 이 영화의 우연적인 만남이 또 어떤 사랑을 그려낼지 기대하면서 말이야.

초여름의 밤, 한겨울의 영화를 보내며,
유안이가.

🚃 환승 연애 🚃

출발지와 목적지가 달라도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은 가는 길이 같다 해도. 잠깐의 동행 속 요동치는 두 사람의 심정을 〈6번 칸〉은 실어 날라.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까지, 10,000년 이상의 유적과 자원이 묻혀있는 곳까지. 우리의 근원을 알아가는 이 여정은 어제를 돌아보게 하고 오늘을 살아가게 해. 저마다의 이유로 관계에서 환승하는 순간들을 존중하면서 말이야.

라우라는 왜 료하에게 끌렸을까? 너무나도 안락한 곳에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바라봐 주던 아름다운 연인 이리나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쾌적하지 못한 기차 칸에서 만난 퉁명스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불청객이라니.

그는 첫 만남에서 묻지도 않은 러시아 찬양을 늘어놓고 상스러운 말을 지껄였잖아. 안 그래도 같이 있기에 조마조마한데, 갑자기 숨어있다 놀라게 하거나 자기 기분 상했다고 토라지기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보드카를 들이켜며 야밤에 엑셀러레이터를 밟거나, 무턱대고 사업을 할 거라는 떵떵거림은 무모한 기질을 암시하지. 근데 그 사람에게 왜 자꾸만 눈길을 줬을까.

그건 아마 외로움이 느껴져서일 거야.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내 사람에게선 찾을 수 없던 공통점. 외지인이자 방문객으로 무리를 겉돌 동안 느꼈던 박탈감과 소외감이, 이방인이나 낯선 승객과의 대화에 영 끼지 못하는 그에게도 보인 거지.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미소를 보이고 너는 굳은 얼굴로 거리를 뒀지만. 알고 보면 우린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직감했으리라 생각해.

아니면 투박한 다정함이 눈에 들어와서인가. 쉬어가야 할 손님들에게 친히 빈자리를 내어주고, 지루하게 혼자 있을 것 같으니 먼저 손 내밀어 보고, 두려워할 상황을 쫓아내고, 알고 지낸 할머니의 집에 들러 야무지게 챙겨주고, 속 깊은 얘기를 조용히 듣다가 이내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들려는 그런 애씀들. 매번 료하는 마음을 연 사람에겐 최선을 다해.

이리나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 내리자마자 헐레벌떡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벌써 돌아오려는 건 아니지?”라고 못 박거나, 기대하던 관광이 무산됐다는데도 건조한 반응에 괜히 시차를 묻게 하는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 않지. 갑작스레 찾아와 새벽에 벨 소리를 듣게 할지언정, 그는 길고 긴 수신음을 기다리게 하지 않아.

그러니 어쩌겠어. 자신을 그려준 소박한 그림 한 장에도 숨김없이 감동하고, 부질없는 짓이다 소리쳤으면서도 곧 품에 안겨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처음 배운 핀란드어 ‘엿 먹어(Haista vittu)’를 ‘사랑해’라고 순진하게 믿고, 삐뚤빼뚤한 그림과 함께 대문짝만한 글씨체로 마음을 전하는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어.

덜컹거리는 차체만큼이나 확신할 수 없는 마음이 흘러가. 차창으로 보이는 아른한 풍경을 뒤로 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를 답답하게 하던 공기를 내보내고 어느새 우리를 휘감는 온기를 느끼면서. 서서히 찾아오는 감정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이번에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암각화를 마침내 마주했을 때. 계절의 조건도, 날씨의 방해도, 부정적인 반응도, 다 뚫어 버리고 료하에 기대어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하얀 설원 사이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녹지를 밟으면서 라우라를 감쌌을 청명한 대기를 상상해 봐.

아마 점점 선명해지지 않았을까? 이리나의 바람에 편승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건 료하라는 걸. 결국 그 자리에서 확인한 건, 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는 마음이라는 걸.

마치 폭풍의 눈 속에 있듯 고요하고 평안해 보이는 풍경이 곧 사랑의 본질 같다고 생각했어. 거기까지 가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망설이고 불안해서 거리를 두거나, 실망하고 어려워서 포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런데 그런 눈보라 속을 함께 뛰놀고 뒹굴 용기를 낸다면. 마음의 소리를 기꺼이 따라갈 의지가 있다면. 종착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를 수 있는 경유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

유안, 나도 자주 도망가고 또다시 휘말리는 사람이라, 질문에 확실하게 답을 줄 순 없었다는 걸 고백해. 다만 보내준 영화로 정의도, 형태도, 방식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어.

그동안 최고로 쳐 온 사랑은 어쩌면 허물에 불과했던 것 같아. 닿을 수 없는 것만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를 고양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사이를 꿈꿨거든.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더라. 이 비루한 몸뚱어리가 바라는 건 그냥 당장 닿을 수 있는 너의 체온, 그거 하나뿐일 때가 많거든. 관심 어린 시선, 세심한 보살핌, 헤아리는 마음. 이런 소소한 거 말이야.

또 어디서 사는지, 얼마나 배웠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여러 기준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 이상향이던 이리나도 동향으로 보이던 사샤도, 라우라가 아끼던 것들과 함께 예상치 못하게 멀어졌으니까. 그것이 익숙함이건 안정감이건 추억이건 간에 말이야.

흔들리는 카메라만큼이나 흔들리던 동공에 맺힌 건, 그저 꾸밈없이 표현하는 솔직한 행동들뿐이야. 그렇게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내면의 작은 동물을 품은 우리의 영리함을 믿으면서.

–

사랑에 모양이 있다면
서로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잡힌 눈매의 모양일 거야
착각 없이는 무엇도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맘껏 착각하는 것
그게 우리의 임무지

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그게 우리의 임무지」 중.

꽃달이 지는 밤, 여섯 번째 러브레터를 보내며,
250612_예은 보냄.

〈

이전 여담 읽기

🍸 영원한 사랑을 가능케 하는 방법 🍸

다음 여담 읽기

🔏 나의 완벽한 연인 🔏

〉

유호 쿠오스마넨 6번 칸 영화 리뷰 비평 후기

최고은

2025년 06월 21일 / 12:04 오전

안녕하세요, 한 2년 전부터 여담 레터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잘 남기는 편이 아니지만 오늘은 남기고 싶어 글을 씁니다.
며칠 전에 남자친구와 1년 2개월의 만남을 끝내고 홀로 지내고 있어서, 이 글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당신을 조건없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아니었는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영원을 약속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아련해서, 그렇게 짧은 시간을 함께한 게 아니라서 더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제 꿈이 영화감독이라서, 이제 옛 연인이 된 사람이 저에게 꼭 멋진 영화감독이 되었으면 한다는 말로 관계를 마무리 짓더군요. 참..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주길 바랐는데 제 욕심이었나 봅니다. 제가 하는 말들을 빠짐없이 듣고, 저를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봐주던 그이가 이제 옆에 없어서, 그래서 마지막에 인용된 시처럼 착각이 영원하길 바랐습니다. 현실에서 왜 더이상 도피하지 않는 건지, 왜 갑자기 직시하는 건지. 이별 당시엔 너무 미웠습니다. 각자의 이유가 있는 거겠죠? 물과 바람이 흘러가듯 시간도 흐르고 제 마음도 흐르고 흐르다보면 이 기억도 흐릿해지길 바랍니다.

너무 두서없이 쓴 글이라 죄송합니다. 항상 여담레터 구독하고 잘 보고 있어요! 매번 좋은 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P.S. 이란 영화 저도 개봉당시에 보고 매우 좋아했던 영화였습니다!

답글

〈6번 칸〉

🚃 환승 연애 🚃

유호 쿠오스마넨 6번 칸 영화 리뷰 비평 후기

“6번 칸, 🚃 환승 연애 🚃”에 대한 1개의 생각

댓글 달기 댓글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