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에게.
작년 겨울 인연을 주제로 무슨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 우연히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보게 되었어. 영화 포스터 속 앳된 안생과 칠월이 귀엽기도 하고, 세상의 자유와 기쁨은 다 끌어모아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내심 부럽기도 했거든. 소소한 계기로 시작된 이 영화가 나에게 많은 물음표를 남길 줄은 미처 몰랐지만 말이야. 여전히 두 인물의 관계와 그 속에 촘촘하게 박힌 여러 감정은 해묵은 기억과 혼재되어 나를 어지럽게 해. 그래서 내심 누가 이 영화를 보고 해답을 주길 원했는지도 몰라.
이 영화의 원제는 〈칠월과 안생, 七月與安生〉이야. 원작 소설에서 그대로 따온 거지. 사실 나는 원제보다 국내 제목을 더 좋아해. 둘의 관계를 단순히 사랑 혹은 우정이 아닌 Soul·mate로 표현하는 점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점도 더 애틋하게 느껴지거든. 영화를 보고 너도 나처럼 과거의 기억과 마주했을지, 그 기억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와 이 영화가 새롭게 연을 맺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220427_한님 보냄.
🥟 나란히 걷지 못하더라도 🥟
증국상,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한님에게.
네 추천 중에서도 이 영화가 눈에 들어온 것은 과거의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었기 때문일 거야. 마음에 남아는 있지만 여력이 되지 않아 놓쳐 버리는 영화들이 있잖아. 작년 동네 영화관에서 〈소년시절의 너〉와 함께 상영할 때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거든. 그런데 지금 영화가 끝나자마자 하고 싶은 말들이 생겨 이렇게 노트북을 켰네.
그때의 내가 왜 이 영화를 흘려보냈을까, 내지는 경계했을까, 생각해 보았어. 나는 ‘소울메이트’를 믿지 못했거든.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나의 소울메이트가 실패로 돌아간 경험들 때문에 제목에서 이미 어떤 질투를 느껴버렸던 것 같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는 진전시키지 않고 남겨버리는 관계가 있잖아. 우정이라는 단어에만 가둘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일들이 떠올라서, 이 영화가 그런 감정을 잘 다듬은 두 사람의 이야기일 거라고만 생각했어.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난 쭉 이 영화를 오해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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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의 어느 날 처음 만난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즐거운 눈빛에서 우리는 바로 이들이 제목이 지칭하는 ‘소울메이트’라는 사실을 알게 돼.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하지. 곧이어 신중한 성격의 칠월과 자유분방한 성격의 안생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말이야. 이것만 보면 이들을 가까이 엮어줄 어떤 요소를 찾기 어려운데도 둘은 너무 잘 맞는 모습이야.
영원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에 찾아온 첫 분기점인 가명.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칠월의 말에 동요하는 안생의 표정에서 많은 것들을 짐작하게 돼. 그때 둘에게서 사라진 것은 서로에게 서로뿐이던,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일 수 있었던 시절이었겠지. 그 규명하기 어려운 관계를 넘어선 칠월과는 달리, 안생은 칠월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잃고 싶지 않아 고스란히 안고 떠나는 것처럼 보였어.
이제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야. 각각 베이징으로 떠나고, 고향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돼. 안생은 정말 자유분방하게, 칠월은 주변의 기대를 따라 안정적으로 말이야. 두 사람의 어깨에 놓인 삶이라는 짐은 서로를 더 이상 예전처럼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들어. 너무도 다른 서로를 이어주던 마음이 가명의 개입으로 흐려지자 둘은 천천히 상대를 놓쳐 버리고 말지.
우정과 사랑 내지는 질투로 복잡하게 얽힌 둘은 서로에게 미운 말들을 쏟아내다가도 상대를 연모하고 이해하려 들잖아. 그 모습에서 너무도 잘 맞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배려, 망설임을 거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드러나지 않는 이런 작은 마음들은 각자의 삶이 좀 더 선명한 색을 띠어가면서 잊히기 쉽지. 그 빈자리엔 관계에 들인 노력을 상대가 다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이 들어와. 안생은 칠월의 마음을 헤아려 떠났지만, 칠월에게는 그 사실보다 엽서 말미의 ‘가명에게 안부 전해’라는 문구가 더 신경 쓰였던 것처럼.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의 가닥을 잡아가던 순간 칠월의 죽음으로 관객의 기대가 좌절될 땐 어떤 절망감도 느껴지더라. 서로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같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어 돌아왔는데 함께 할 수 없게 된 거잖아. 안생(安生)은 어렵사리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찾았지만, 칠월은 세상 앞에 한 발짝 나가 보려 한 순간 삶을 잃어버렸지. 그러고 보면 살아간다는 것도, 관계도 정말 타이밍이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이 처음 서로를 알게 된 것도, 우리가 만나서 어느 시점에 이끌리는 것도 모두 상황과 조건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지.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아서, 마음의 성격이 같지 않아서, 마음의 온도가 달라서… 멀어지거나 깨지기는 너무 쉬우니까.
두 사람이 맞이하는 극적인 상황들에 묻어나는 약간의 상투성도 ‘소울메이트’라는 이름에 가려진 무수한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는 순간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아. 이들이 마음을 전달하는 과정에는 항상 불완전함이나 지연이 있기에 그러한 깊이가 생겨나지. 그토록 부러워하고 질투했던 안정적인 삶이 사실 칠월에게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된 안생처럼 말이야. 안생의 소설 역시 이들이 주고받은 말들 사이사이 숨겨온 마음들을 드러내.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이고, 두 사람에 관한 소설인 만큼 『칠월과 안생』은 한 사람의 입장이나 해석을 더 많이 담기 마련일 거야. 자유분방하게 떠돌아다녔던 안생이 사실 안정적인 삶을 갈망했다는 것, 그리고 끝까지 칠월은 이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안생이 쓰는 소설을 통해서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여러 우연을 통해 이루어진 어긋남이었기 때문일까, 관계를 다시 쌓아 올리는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돼. 내가 내어 준 마음이 반드시 상대에게 좋지만은 않았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서로를 향한 원망을 거두게 되지. 마지막 순간, 안생은 칠월의 삶을 소설로 옮겨 와 이번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잖아. 그렇게 해서 칠월의 삶은 영원히 지속될 무언가로 남고, 소설 속 칠월은 안생의 그림자를 밟으며 그의 삶을 짐작해 보고. 내가 본 가장 아름답고 슬픈 ‘안녕’의 방식이었던 것 같아. 소설가의 일관된 해석처럼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역동이 오래도록 남을 수많은 감정을 경험하게 하는 거겠지.
‘소울메이트’라는 단어가 주는 운명적인 느낌에 기대는 것이 아닌, 그 모든 곡절에도 끝까지 서로의 그림자가 되는 관계. 그러고 보면, 처음 칠월의 집에 간 안생이 만두소는 기름져서 싫다며 칠월의 만두피를 대신 먹어줄 때부터 영화는 둘의 관계가 그저 운명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 같네. ‘소울메이트’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런 헤아림들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니 관계에 익숙한 피로감을 느끼기보다는 온 마음을 다하고 싶어지는 것도 같아. 서로에게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열세 살 두 사람의 마음처럼 말이야.
너도 누군가의 그림자를 밟아보았을지, 이 영화에서는 어떤 부분이 네게 가닿았을지 궁금해진다. 나중에 네 이야기도 들려줘 🙂
220602_성하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