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 줍는 시간의 깊이 🌾

집요한 낙관주의자. 아녜스 바르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말이 주는 느낌처럼, 바르다의 영화는 어쩐지 모순적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그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일 거예요.

 

영화에서 감독은 무엇이든 빠르게 상품 가치를 잃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문제를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 않아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정직하게 담아내고, 그로부터 ‘나’에게 발생하는 우연한 감각들을 지긋하고 따뜻하게 응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죠. 여정 사이사이에 숨은 재미도 놓치지 않고요. 그 바탕에는 이 세계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바르다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여담을 함께 하며 본 세림의 글쓰기에서 어쩐지 그런 바르다의 시선이 떠올랐습니다. 어렵지 않게 읽어가다가도 멈칫하게 만드는 문장들 속에서 그런 ‘지긋하고 따뜻한’ 응시가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세림의 시선이 이 영화에 닿는다면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낼지 궁금했습니다.

🌾 줍는 시간의 깊이 🌾 

아녜스 바르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이삭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세 여인은 이삭을 줍는다. 큰 앞치마를 두르고 실한 이삭을 찾아 줍는 일은 농촌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16세기 법률에도 추수가 끝나면 가난하고, 가련하고, 불우한 자를 밭에 들어가게 하라고 적혀 있었으니, 이들의 줍는 행위는 적법하고 마땅하게 부여된 권리인 셈이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밀레의 그림과 이삭, 허리 굽혀 줍는 행위로부터 출발해 현대 도시, 농촌의 줍기를 관찰한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작은 신형 디지털카메라—이제는 그저 쓸 만한 캠코더로 보이지만—를 들고 버리고 줍는 삶의 감각을 발견하고 기록한다. 그는 줍는 사람들을 만나고, 줍는 삶을 포착하고, 그 과정에서 떨어지는 인상을 줍는다.

줍다

“흔치는 않지만 허리 숙인 그 모습이 이 배부른 사회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영화엔 다양한 ‘줍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생계를 위해 감자를 줍는 사람들, 감자 더미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카라반의 부랑자들, 집시들, 농장에서 재료를 주워 요리하는 미슐랭 셰프, 양식장 근처에서 굴을 줍는 사람들, 폐품을 모아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 시장에 버려진 치커리나 사과 등을 줍는 사람들.

 

생을 이어가기 위해 음식을 줍는 것이 목적인 자들이 있고, 줍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이 있으며, 주워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반자본주의적이거나 생태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줍는 행위는 식생활, 놀이, 채집, 수집, 예술, 윤리, 운동이다.

 

단순하게 나열했을 뿐이지만 영화는 한 시간 이십 분 동안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현대 사회와 사람들은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는가? 이 거대한 물음만 보면 영화가 아주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바르다는 생산소비, 그리고 자연의 세 가지 단어를 아우르는 행위인 ‘줍기’를 발견했을 뿐이다. 그것이 카메라를 쥔 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따뜻하고 친절한 성찰적 글쓰기이다.

잉여

줍는 행위는 어딘가에서 잉여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삭에서 감자, 포도, 나아가 냉장고나 텔레비전까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수많은 잉여가 발생하고, 쉽게 버려진다. 예컨대 영화 속 감자 농장에서 수확한 4,500톤의 감자 중 25톤은 불합격해 버려지는데, 여기서 시작된 감자 추적기 속 불합격 감자들의 운명과 하트 감자와의 만남은 귀여운 웃음을 자아낸다.

 

그렇게 감자를 쫓아가는 이 흥미로운 여정을 관망하다 보면 아주 당연하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하나의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버리기로 한 것, 내 손을 떠난 무언가는 어디론가 간다.

쓰레기

“어디든 주우러 다니죠. 감자밭이든 쓰레기통이든요.”

“거리의 폐품들이 꼭 크리스마스 선물 같아요.”

다시, 내 손을 떠난 무언가는 어디론가 간다. 마법 지팡이를 휘둘러 반짝, 사라지게 한 게 아니라면 길가로, 쓰레기통으로, 수거함으로, 재활용 센터로, 매립지로 간다. 쓰레기라는 이름표를 붙여 내버리는 것은 불합격 물건들이 거리에 나뒹굴고, 태워지고, 물에 잠기는 운명을 결정하는 일과 같다.

 

그리고 ‘친환경’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버린 요즘엔 그 결정의 무게가 재활용이라는 아주 편리하고 입맛에 맞는 단어 아래 잠겨 버린다.

 

사물은 생산되고 버려지면서 태어나고 죽는데, 어느새 ‘재활용’과 ‘분리배출’이 동의어나 유의어처럼 취급되는 것이 모순적이다. 분리배출함에 가득 쌓인 플라스틱 위에 일회용 컵을 올려두는 것은 마치 농구공을 던져 골대에 넣은 것마냥 뿌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대부분의 플라스틱은 재활용되고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줍는 삶과 쉽게 버리지 않는 태도를 동시에 생각한다. 부쩍 늘어난 쓰레기가 이젠 갈 곳이 없다.

자연에 모순되는 생산과 소비에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그 화법에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은 바르다가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사용기한’이나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 것들의 이미지를 채집하는 일은 그들에게 쓰레기가 아닌 다른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아름다운 호명과도 같다. 하트 감자를 쥔 손, 렘브란트 자화상 위의 손, 지나가는 트럭을 잡는 놀이를 하는 손. 그 주름진 손들을 흙 묻은 감자와 인화된 사진, 추월하고 추월당하는 트럭들에 병치시켜 본다. 때로는 선명하고 직접적인 외침보다 찰나의 감각과 각고의 사유가 필요하다.

220609_세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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