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 해가 져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의 칸타타 🩸

🩸 해가 져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의 칸타타 🩸

박찬욱, 박쥐

해가 진다. 검붉은 태양이 박동을 멈추고 섬뜩한 푸른빛의 밤하늘이 그 자리를 메운다. 그곳에 이미 죽어버린 두 사람이 있다. 하얀 블라우스 차림의 한 여성이 갈라진 맨발을 끌며 뛰어간다. 주변의 착취로부터 생을 잃은 태주에게 야밤의 전력 질주는 유일한 생존의 시간이다. 그곳에는 질질 짜는 남편 강우도, 온갖 잡일을 강요하는 시어머니 라 여사도, 자신을 희롱하는 시선들도 없다. “어째서 난 안 죽는지 몰라! 그 이상한 약들을 내가 다 마시고 삼켰는데.” 스스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있는 힘껏 내달린다.

“나는 맨발로 막 나가요.

이 지옥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요.

자다가도 일어나서 나가요.

쟤네들은 몽유병인 줄 알지만

난 그 시간만 깨어있는 것 같고

나머지 시간은 자고 있는 것 같아요.”

유달리 그 소리에 예민해진 한 남성이 자기 허벅지를 세차게 친다. 신부라는 본분과 태주를 갈망하는 본능이 뒤엉켜 그를 괴롭힌다. 새도 아닌 존재가 된 상현이 야밤의 거리를 맴돈다. 시작은 엠마누엘 신부 기념 생화학 연구소였다.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 얼핏 보면 상현은 순교를 위해 연구소로 향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죽어가던/죽길 원하던 사람들을 보며 수포처럼 번진 그의 권태와 무기력이 자리한다. 합법적 자살을 위해 찾아왔냐는 사제의 말에 묵묵부답이던 그의 모습은 신앙심에 의해서라기보다 죽음을 바라 찾아온 사람에 가깝다. 여타 500명의 연구 참여자와 동일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 허나 우연히 수혈받은 모종의 피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병 환자와 같이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달릴 때만 깨어있음을 자각하는 태주와 원치 않게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상현. 어느 밤 상현은 그런 태주에게 자신의 구두를 건넨다. 해가 져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진정한 숨을 토해낸다.

떨어진다. 효성 씨의 혈관에서 시작된 핏방울이 상현의 목구멍으로 향한다. ‘붕대 감은 성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환자의 피를 받아먹는 그의 모습은 가히 우스꽝스럽다. 어쩔 수 없다. 살인은 하지 않되 사람의 피를 구하는, 상현 나름의 윤리적인 방식이다. 비록 지금은 식물인간이지만 상현이 기억하는 효성 씨는 자기 피를 기꺼이 내줄 자비로운 인물이다.

피 냄새로 발현된 욕망이 연민과 얽힌다. 효성의 피를 갈취했듯 상현은 그만의 숭고한 논리를 내세우며 태주를 갈망한다. 주체할 수 없는 피 냄새와 성적 욕망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자신의 구원으로 맺어야 할 가엾은 운명. 상현에게 태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와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내 육체가 내 것이 아닌 듯한 감각들에 뒤엉키고는 그에 대한 애정을 발견한다. 상현이 태주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유도 그를 향한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일 테다. 물론 돌아온 것은 태주의 외마디 비명뿐이었지만.

그날 상현이 태주에게 건넨 온기는 뒤틀린 사랑의 시작점이었다. 순수한 애정과 해방의 갈증 사이에서 그 역시 상현을 감각하고 기억한다. 신고 있던 구두도 내어주고, 까진 발도 기꺼이 어루만져 주던 그. 스스로 그은 상처를 보고 남편이 그런 거냐며 열성을 내던 그. 강우고 어머니고 다 죽여버리자던 그. 태주에게 상현은 사랑하지만 구워삶아야 할 존재이다. 폭력이 일상이 된 태주의 세상에서 상현이 건넨 다정함은 그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자신의 삶을 바꿀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사제가 이러면 죄가 더 커요.”

“나는 신자도 아닌데요. 나한텐 그냥 불쌍한 노총각이에요.”

“이러다 우리 둘 다 지옥 가요.”

“나는 신앙이 없어서 지옥 안 가요.”

“나는요. 끔찍한 병에 걸렸어요.”

“난 지긋지긋하게 건강해요. 한 번 아파서 누워보는 게 소원이야.”

다시, 떨어진다. 상현의 품에 안긴 태주가 건물 아래로 낙하한다. 늘 죽어있던 그의 표정에 처음으로 개구쟁이 같은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상현에게 제압당한 강우 역시 물속으로 잠긴다. 이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은 한 꺼풀 벗겨진다. 아내를 때리는 남편, 게다가 그 대상이 자신이 사랑하는 태주라는 사실은 그의 살인에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홀딱 젖은 강우의 환영이 주위를 맴돌며 이들은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축축한 침대, 태주의 입안으로 내리꽂던 바느질 가위, 잠식된 상현의 관 위에 놓인 돌덩이까지. 강우를 죽였다는 죄책감은 괴상한 상들로 이들의 생을 옥죈다. 돈과 자유 혹은 사랑이 있다면 살인 정도야 괜찮다며 그날의 호수에서 행복을 약속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추락한 믿음 사이에 깃든 죄의식은 자신을, 서로를 계속해서 죽인다.

태주의 거짓말이 들통나던 밤, 서로를 향한 공격은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다. 상현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태주. 그는 상현에게 가시 박힌 말들을 쏟아내기도, 라 여사에게 면죄부를 달라며 빌기도 한다. 자신의 신념도 사랑도 잃은 상현은 배신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태주의 목을 비튼다.

그 죽음의 틈으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피를 흡입하던 한 마리의 짐승과 사랑하는 이를 살리고자 하는 인간, 욕망과 이성이 뒤얽힌 미지의 존재가 자신의 손목과 혀를 긋는다. 새로운 탄생을 위한 의식이 시작됐다. 상처가 아물고 혈기가 돈다. 손과 발을 핥던 그때처럼 서로의 피를 빤다. 그렇게 자신의 생일도 알지 못하던 한 인간은 사라지고, 뱀파이어로 삶의 제2막을 열 태주가 눈을 뜬다.

“해피버스데이 태주 씨.”

삶이 진다. 새 생명을 부여받은 태주에 의해 수많은 삶이 진다. 닭이 새를 잡아먹는 게 무슨 죄냐면서, 순순히 내주면 그게 무슨 맛이냐며. 그의 살인에는 부차적인 요소가 없다. 오로지 생존과 쾌락뿐이다. 태주가 살아가던 세상의 가치와 닮은 그의 살생은 그래서 잔혹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뱀파이어의 삶은 태주에게 저주보다는 축복에 가깝다.

그와 달리 상현에게 이 삶은 저주일 뿐이다. 죽었다 살아난 신부라는 명목으로 한때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끔찍한 운명. 그래서 상현의 살인에는 사족이 붙는다. 병원에 있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피를 마시는 건 괜찮다며, 나의 도움으로 그들이 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상현 역시 수많은 삶을 지게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끝까지 놓지 않은 상현의 궤변 내지 믿음은 그에게 생의 의미를 부여한다. 누군가를 살리고 싶다는 믿음은 그에게 부끄러움을 일으켰다. 그는 의사를 태주의 밥으로 대령하고, 죽어가던 오아시스 사람들을 외면하면서도 그만의 기지로 이블린을 살려둔다. 죽기 직전 자신을 떠받들던 신도들에게 자신의 가장 추악한 면을 보여주어 그들을 향한 기만을 멈추기도 한다. 영화 끝자락 상현이 죽음을 택한 이유 역시 미약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생을 붙잡을 수 있는, 제 딴의 가장 큰 속죄였기 때문일 테다.

“태주 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이윽고 해가 뜬다. 죽음을 통해 원죄를 갚으려는 상현과 그와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태주. 태양에 물든 핏빛 바다가 물을 뿜어내기 시작하고, 태주는 체념한 듯 그날 밤 상현이 건넨 구두를 신어 보인다. 상현은 그런 태주에게 마지막으로 피를 건넨다.

해가 져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일출을 바라본다.

타들어 가는 서로의 살갗을 지켜본다.

고엽을 닮은 구두처럼 사랑도 생명도 그렇게 진다.

221013_한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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