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프와 이데올로기, * 국물 한 술에 이념은 풀어 버리고 *

양영희, 〈수프와 이데올로기〉

평생 북한을 지지해온 오사카의 한 재일조선인 가정. 아버지는 일본인 사위는 안 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별말 없이 딸의 재혼 상대를 환대한다. 양복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예비 사위에게 어머니가 내놓은 메뉴는 뜨끈한 닭백숙.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인 어머니와 일본인 사위의 어색한 대면을 딸 양영희가 캠코더에 담는다.

* 국물 한 술에 이념은 풀어 버리고 *

양영희, 〈수프와 이데올로기〉

비건 지향을 시작하면서 가뜩이나 자주 없었던 가족 식사는 더 줄어들었다. 매끼 무엇을 먹는지가 갑자기 화제에 올랐고, 내 건강 걱정이 뒤따르는 식사는 피곤함을 안겼다. 밖에서는 주변인들에게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워 식사 자리 자체를 피하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첫 몇 년은 비슷한 지향점을 가진 친구들에게만 편안함을 느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에겐 무엇을 먹는지가 중요한 만큼 함께하는 이나 함께하는 방식 역시 중요하다. 엄밀함과 단호함보단 유연함을, 갈등보단 이해와 파급력을 고민하게 되었다.

 

가족 관계에 있어 식사를 중시하는 태도, 꽤나 ‘한국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이 의례를 함께하는 사람을 우리는 가족으로 정의한다. ‘식구(食口)’라는 단어엔 ‘음식’과 ‘입’밖에 없는데 의미는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란다. ‘식구’와 생김새가 비슷한 외국어 단어들은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중국어 食口[shíkǒu]는 부양가족, 즉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을 의미한다. 영어단어 중에는 ‘동료’를 의미하는 companion이 라틴어로 com-(함께)과 panis(빵)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을 의미한다. 모두 비슷한 의미이지만 유독 한국어의 ‘식구’에서는 정이 느껴진다.

 

정. 그러고 보면 관계는 사소한 식사 한 번에서 시작될 때가 많다. ‘밥은 먹었냐’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은 유독 한국에서 자주 쓰이는 인사말이고, 구습이기는 하지만 조직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 역시 주로 식사다. 낯선 누군가를 받아들일 때도 항상 식사가 중요하다. 특히 비혈연 관계의 누군가와 처음 만나는 자리라면, 식사를 둘러싼 요소들부터 식사 중 보이는 모든 행동까지 도마 위에 오른다. 그래서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양영희 감독이 담은 이 어색한 첫 대면은 보기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버지는 일본인 사위는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50세가 넘은 딸이 데려온 재혼 상대를 별말 없이 받아들인다. 아라이 카오루 씨를 처음 만나는 날, 양복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그에게 어머니 강정희 씨는 뜨끈한 닭백숙을 내놓는다. 비워진 닭의 몸통에 마늘, 인삼 등 여러 재료를 넣고 5시간 이상 끓여내야 하는 백숙은 오랫동안 보양의 상징이자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내놓는 요리였다. 정성으로 준비한 요리에 진심으로 감동하는 예비 사위의 모습에 예비 장모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첫 식사 이후 카오루 씨는 닭백숙 조리법을 배워 직접 정희 씨를 위한 식사를 준비한다. 시장에서 각종 재료를 사고, 재료를 채우고, 꿰매고, 끓이는 그 모든 과정을 서툰 손으로 연습한다.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도쿄에서 이 과정을 수없이 연습했다고 한다) 아무리 잘해도 어머니의 손맛을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받은 환대를 그대로 돌려주려는 그 마음은 정희 씨에게도 가닿아 결코 하나 될 수 없을 듯했던 두 사람 사이를 잇는다.

수많은 자전적 다큐멘터리가 그랬듯, 렌즈를 통하면 가족의 몰랐던 모습을 새삼 발견하기도 한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이후 제작된 NHK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촬영하며 ‘서로를 향한 서로의 마음에 놀라고 감동했다’고 밝혔다.* 재일코리안 2세로 태어나 6살 때 세 오빠가 북송되고, 평생 북한을 지지했던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며 아나키스트로 살아온 양영희에게 가족은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카오루와 정희 씨가 보여준 가족의 가능성은 그가 계속해서 이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게 했다.

 

식사를 나눈 사이가 되는 것은 카오루가 거리낌 없이 자신을 ‘아들’로 칭할 만큼 거리감을 좁힌다. 감독의 카메라 앞에선 한없이 순박하기만 했던 카오루는 한 장례 업체가 보낸 ‘장례식 견학’ 초대장에 전화로 강하게 항의한다. 자신은 강정희 씨의 아들이며 매우 불쾌하다고, 당신 어머니라면 이런 걸 보낼 수 있겠냐고, 가만 안 있겠다고 화를 낸다. 본인의 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시는 마음으로, 어느덧 카오루는 정희 씨가 평생 가족과 공유하지 못했던 비밀에 동행하는 식구가 된다.

오래 유지되지는 못할 세 식구의 마지막 바람은 제주 4・3 사건 생존자인 어머니의 기억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었다. 첫 증언 이후 정희 씨는 알츠하이머로 점점 기억을 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병상에 누워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모습을 담는다. 정희 씨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5세까지 오사카에서 살다가 1945년 대공습을 피해 제주도로 향했다. 그러나 남한의 단독선거에 반대한 제주도민들의 저항에 무자비한 학살이 가해지며 정희 씨는 약혼자와 친척을 잃었다. 결국 3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해 어린 여동생을 업고 남동생의 손을 잡고 30km를 걸어야 했다.

 

어렵게 돌아간 오사카에서 정희 씨는 조총련에서 활동하던 량공선을 만나 결혼한다. 세 아들과 딸을 낳고 드디어 정착하는 듯했으나,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으로 세 아들 모두를 북에 보낸 후론 몇 번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믿을 것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북한 정부의 말뿐이었다. 그러나 오사카에서만 살다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이북에 ‘귀국’한 아들 중 첫째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울증을 앓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살뜰하게 모은 돈과 물건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식민국가에서 태어나 독립 후에야 부모의 고향인 제주에 돌아갔지만, 자국민을 학살하는 남한 정부는 더 끔찍했다. 그래서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와 북한을 지지하기로 ‘선택’한 강정희 씨에게는 아들들을 빼앗아간 ‘조국’을 부정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뜨끈한 국물 한 숟가락에 분위기가 풀어진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지켜주는 국가도, 허울 좋은 이념도 허상임을 삶 속에서 깨달아 버렸기에. 식탁 위에서는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그리고 ‘가족 3부작’을 마무리하는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양영희의 카메라는 항상 사적인 곳을 향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탄생한 그의 다큐멘터리까지 사적인 것은 아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여러모로 샹탈 아커만의 〈노 홈 무비〉가 떠오른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어머니의 현재와 희미해져가는 증언. 영화가 풍기는 쓸쓸함. 홈 무비이지만 근저의 주제는 역사적 문제의식이라는 점(no “home movie”), 평생을 ‘집 없음’의 상태로 살아온 이의 이야기라는 점(“no home” movie).

 

아커만은 자신의 영화가 개인적일수록 관객의 집단 무의식과 욕망을 파고들어 오히려 보편성을 띠었다고 말하곤 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불완전한 증언은 카메라의 언어로 다시 쓰였고, 강정희의 이야기는 수많은 희생자를 기억하고 생존자를 위로하는 공동의 이야기로 남았다. 늘 함께 밥을 나누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어머니. 어쩌면 이 ‘홈 무비’는 그의 목소리를 가장 또렷하게 남길 방법이었으리라.

240321_성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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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3.nhk.or.jp/nhkworld/en/ondemand/video/3016161/

** 김혜리, 「영화 일기」,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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